#055화
의자를 밀며 일어난 어머니가 미안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아유, 어쩌죠? 오늘은 영업 끝났는데."
"벌써요?"
"네, 죄송해요. 언니가 다릴 다쳐서 일을 못 해요."
"허어…. 언제요? 많이 다치셨어요?"
"한동안은 못 나오실 것 같아요."
"어이쿠, 쾌차하셔야 할 텐데요."
그는 단골인 듯 진심으로 신경 써 주는 것 같았다. 그가 나가자 어머니가 내 앞으로 돌아와 앉으며 말했다.
"이모가 다리가 부러져서 몇 달은 일이 힘들대."
"어쩌다가요?"
"계단에서 넘어졌어. 우리 나이쯤 되면 자주 부러지고 그래."
"아…."
"그래서 말인데, 민준아. 엄마가 이 가게를 인수해서 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네?"
"이모가 이참에 쉬고 싶은가 봐. 엄마 때문에 꾸역꾸역 버텼었거든. 그래서 싸게 준다는데…."
이전의 삶에 이런 이벤트가 있었던가?
아니다. 이건 없었다.
그랬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다.
'왜 변한 거지?'
어머니는 말을 이었다.
"엄마가 그래서 생각해 보니 그간 적금 든 돈하고, 대출 조금 받으면 인수할 수 있을 것 같거든. 근데 이게 너 대학 가면 주려고 하던 돈이라서…. 만약에 장사 안되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
"우리 아들, 공부도 잘하는데, 엄마가 미안해서…."
아….
이제야 어머니의 고민을 알아들은 게 죄송스럽다.
나는 손을 뻗어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해."
"응?"
"무조건 하라고. 내 생각은 하지 말고."
표정을 보면 엄마는 이미 마음이 기운 것 같았지만, 내 걱정이 더 앞선 것이다.
"내가 도와줄 테니까 엄마 하고 싶은 거 해."
"정말?"
"대학은 장학금 받아서 갈게."
"…호호호호! 뭐라고?"
"그거 아니어도 내 힘으로 갈 수 있으니까 엄마는 엄마만 생각하고 살아."
나는 가방에서 통장을 꺼냈다.
그리곤 어머니께 내밀었다.
"부족하면 이것도 좀 보태구."
이미 700만 원이 넘게 들어 있었다. 얼마 후에 월급까지 들어오면 1,000만 원이나 된다. 미션 때문에 시작하긴 했어도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다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웃으면서 통장을 열어 보지도 않고 돌려주었다.
"기특하네, 우리 아들이…."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엄마가 어떻게든 너, 대학 보내 줄 거야."
어머니가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건강만 해. 알았지?"
"내가 할 말이거든? 엄마가 건강해야지!"
"호호호! 우리 아들이 진짜 다 컸네."
.
.
.
독서실에 간다고 했지만, 다시 강남역으로 가는 길이다.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어머니가 사장님이라….'
이전엔 없던 일이었다.
'아마도 내가 영향을 줬던 거야.'
반에서 1등을 했으니 어머니도 심경의 변화가 생겼을 거다.
'하지만 그 가게… 잘 안 될 것 같은데 말이지.'
강남역 번화가에서 가장 잘나가는 고깃집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 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뭘 어떻게 해야 손님이 찾는지 깨우치고 있었다.
'그럭저럭 버티긴 하겠지만….'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는 그 가게에 나갔었다. 그 뜻은 당장 망하진 않을 거란 거다.
'이모도 없이 어머니 혼자 할 수 있을까?'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선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보상은 재능마켓에서 수령하세요.】
도화지가 꿀물을 쓴 모양이다.
"흐으음…."
갑자기 기발한 생각이 들었다.
'꿀물이나 생수를 쓴다면?'
사람도 아닌 짐승조차 마약처럼 홀려서 핥던 생수다.
그르릉?
범이가 머릴 가방 밖으로 내밀었다.
'생각만 해도 나오냐?'
하긴, 이 녀석도 한 방에 낚은 생수다.
꿀물도 쓸까 잠시 생각했지만, 그렇게 많은 양을 확보하긴 어려울 것이다. 좀 비싸야 말이지.
그래도… 생수는 가능하지 않을까?
'음식에 섞어 쓴다면 말야.'
마냥 퍼 준다는 게 아니라 밥을 지을 때나 뭔가에 희석해서 타 준다면 그걸 맛보고 안 올 손님이 있을까?
'만두 팔면 대박일 건데…. 크으….'
하지만 그 만두는 나도 쉽게 맛볼 수 없는 물건이었다.
'어쨌든 내가 도와드릴 거야.'
내 인생도 그렇지만, 이번 생엔 어머니 인생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강남역이다. 오피스텔 건물 앞에 도착하자마자 11층을 올려보았다.
'아직 들어오지 않았나?'
불이 꺼져 있었다.
나는 어제의 화단이 아닌 안쪽으로 몸을 숨긴 뒤 거리를 바라보았다.
1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반드시 어제 그 시간에 그녀가 나타나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내게도 계획이 있었다.
'내일 학교에 가지 말자. 아프다고 둘러대면 되니까.'
생사가 걸렸는데,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작은 부분이라도 알아야 했고, 정보가 있어야 작전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개략적인 구상을 했다.
'여기서 활을 쏠 순 없어. 그렇다고 칼을 쓸 수도 없고.'
강남역 한복판에서 그런 일을 벌일 순 없었다.
'나를 발견하면 다른 곳에 숨어 버릴 수도 있고.'
참으로 까다로운 싸움이었다.
'재능마켓으로 납치해? CCTV는?'
괜히 그러다 감옥에라도 가는 건 아닐까?
나는 살고 싶은 거지, 감옥에 가고 싶진 않다.
어느새 40분이 지나갔다. 지방으로 가는 광역 버스도 끊길 시간이라 거리가 한산해졌는데, 간혹 술에 취한 사람들만이 비틀거리며 지나갔다.
나는 저번처럼 택시를 타고 내리는 게 아닐까 싶어 도로의 택시들을 주시했는데, 무슨 스토커라도 된 기분이다.
그런데 그때,
뭔가가 내 등을 찔렀다.
움찔!
홱! 돌아간 내 얼굴은 보지 않아도 잔뜩 긴장하고 있을 거다.
"…아, 안녕하세요?"
"…?"
내 표정이 너무 이상했나?
앳된 여자애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누구…?"
"아, 저기… 여기 사시죠?"
얘를 언제 봤더라?
"혹시 괜찮으시면…."
핸드폰을 내미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긴장이 탁 풀렸다. 설마 이거 내 번호 따는 건가?
"아아…."
그리고 문득 기억났다.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봤던 교복 입은 여자애. 지금은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는데, 이런 일이 부끄러웠는지 목까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답은 빠르게 나왔다.
"죄송합니다."
꾸벅 머리를 숙였다.
목숨을 걸고 하층민과 싸워야 하는 판국에 이럴 여유는 없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럼 좋은 밤 되세요!"
그녀가 후다닥 엘리베이터로 뛰어가는 걸 보면서 나는 머릿속에 스치는 게 있었다.
'설마 그거 때문인가?'
코어가 성장해서 키도 커지고 몸도 좋아졌다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
【매력+1】
내 셔츠와 코트엔 각기 매력이 +1씩 붙어 있었다. 근력이나 순발력 하나가 오를 때마다 얼마나 강해지는지 체감해 본 걸 떠올리면 이 매력+2 또한 장난 아닐 게 분명했다.
'더 눈에 띄게 생겼잖아!'
코트엔 분명 '기척 감소' 효과가 공존하는데, 매력을 올려 주면 어쩌자는 거냐?
'어이가 없네.'
나는 주변을 훑었다.
'누가 나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단 생각을 못 했었어.'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한자리에서 계속 머물고 있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디 사는진 알았으니까 저쪽으로 가자.'
길을 건너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이쪽으로 건너온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오히려 멀리서 보니 오피스텔 안쪽이 더 잘 보인다.
문득, 5층을 보았다.
【필라테스】
창문에 테이프 같은 거로 붙인 간판을 보면서 나는 참으로 뻔뻔한 재능마켓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시선이 11층으로 향했다. 그녀의 집으로 생각되는 곳은 여전히 불이 꺼져 있었다.
'차라리 이 어딘가에서 저격을 해?'
모르겠다.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빗나가기라도 하면 경각심만 키울 거고, 만약 명중해도 뒷일을 감당하기 힘들 거다.
'어렵네. 어려워. 하아.'
새벽 2시가 지났다.
지금 나는 중앙 차로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30분마다 장소를 이동하려고 했다.
'오늘은 안 들어오려나?'
그녀가 어디에 다녀오는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기다리는 것 외에 대안이 없었다.
30분쯤 더 지났을까?
'왔다!'
택시에서 내리는 그녀는 오늘도 남자를 대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편의점으로 들어가자 나는 일단 뛰었다. 그리곤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으로 가서 비상구 계단에 숨었다.
-다 왔어?
-네, 오빠. 호호!
목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살짝 비상구 문을 열고 저쪽을 보았다.
'역시 맞았어.'
두 사람이 들어간 호실을 확인하고 나는 계단을 통해 내려왔다. 그리곤 건물 밖으로 나와 다시 확인했다. 아까까진 꺼졌던 불이 켜져 있었다.
"1102호…."
적의 거주지를 확인했다는 건 매우 중요한 정보였다. 나는 크게 끄덕이면서 다시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곤 5층으로 가서 재능마켓을 열었다.
【재능 마켓 체류 시간이 3시간 41분 남았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 시간도 거의 다 됐다. 이제 몇 시간만 더 지나면 체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무언가를 해야 할 것이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생수를 사서 가방을 채웠다. 그리곤 냉장고를 열어 '보상'을 확인했다. 도화지에게 준 꿀물이 2병이 되어 돌아와 있었다.
【재능마켓에서 나가시겠습니까?】
콰앙!
문이 닫히고 나는 밖으로 나가서 반대편 건물 화단에 앉았다. 그리곤 11층을 주시하며 휴대폰을 켰다. 이런저런 공부를 하며 아침이 오길 기다리는 거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어? 뭐야, 왜 벌써 나와?'
비틀거리며 안쪽에서 나타난 사람은 아까 그녀와 함께 들어갔던 남자였다. 그가 택시 쪽으로 향하자 나는 잠시 갈등했다.
'여자는? 어떡하지?'
하지만 나는 결국, 그를 따라 길을 건넜다.
"어디로 모실까요?"
"저 차 따라가 주세요!"
기사가 '음?' 하는 표정으로 룸미러를 보았지만, 별말 없이 택시가 출발했다.
'30분도 안 됐어. 자고 가는 게 아니었나?'
아침이나 되어야 나올 거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그럼 왜 굳이 오피스텔까지 함께 간 거지? 그냥 데려다준 건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우선 저 남자의 정체부터 파악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삼성동으로 향한 택시가 섰다.
"감사합니다!"
나도 급히 내렸다.
봉은사 주변, 이면 도로로 걸어간 남자는 비틀거리다가 빌라 주차장으로 들어가더니 오줌을 쌌다.
"…."
저 남자는 누굴까?
어제, 오늘 다른 남자인 걸 봐선 애인은 아닌 것 같은데….
우애애애애애액!
남자는 몇 걸음 나오다가 상체를 숙이더니 토악질을 해 댔다. 어지간히도 술을 마신 모양이다.
기다렸다가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여긴가?'
그가 어떤 아파트로 걸어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 나는 밖으로 나왔다. 이곳이 그 남자의 집인 것 같다.
새벽 4시가 조금 안 된 시간.
'수상해.'
내가 만난 하층민은 분명 괴물이었다. 한데, 그런 괴물을 만나고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다? 심지어 저렇게 인사불성인데도 괴물이 그냥 놔둔다고? 그럼 왜 남자들을 집으로 끌어들였던 거지?
이제 2일 차.
그녀의 목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침까지 기다렸다.
7시 55분.
어젠 그렇게 흐트러진 차림이었는데, 오늘은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로로 나와 택시를 잡는 그를 보며 나도 따라갔다. 압구정동으로 향한 택시는 곧 한 성형외과 앞에서 그를 내려 줬고, 그는 내리자마자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를 따라 병원 앞에 섰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인가?'
1층.
간판처럼 붙은 유명한 의사들 사진 속엔 그도 있었다.
'대체… 무슨 관계지?'
강남역으로 돌아왔다.
출근길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그 속에서 나는 11층을 보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미션 때문에 이러고 있지만, 사실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적어도 나보다는 많은 걸 알고 있지 않을까? 하층민이 괴물이라지만 이렇게 섞여 사는 걸 보면 자아를 가졌다는 거 아닌가?
'밤이 되면 나오려나?'
나는 다시 그녀를 속절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내 예상보다 빨리 그녀를 발견했고,
'…?'
내 심장은 쿵쾅대며 긴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