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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마켓-54화 (54/277)

#054화

【수호자의 코트 효과가 발동 중입니다. 기척 감소.】

"…!"

다행이었다.

코트 덕분에 그녀는 아직 내가 자길 지켜보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 더 안쪽으로 몸을 숨기며 계속 지켜보았는데, 택시에서 한 사람이 더 내렸다.

"꺼억-!"

내리자마자 걸쭉하게 트림을 한 배불뚝이 중년인은 이미 만취한 듯 비틀댔는데, 그런 그의 몸을 그녀가 부축했다.

"여기야?"

"네, 오빠."

"자주 지나다녔는데 네가 여기 사는진 몰랐네."

"아셨으니까 이제부터 자주 보면 좋죠. 호호!"

"그래, 그러자. 집에 마실 건 있고?"

"맥주 사 갈까요?"

"좋지!"

두 사람이 1층 편의점으로 걸어왔다.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경비실 옆으로 돌아들어 가서 편의점을 주시했다.

여자와 중년인은 맥주와 과자 몇 개를 사더니 나와 곧장 엘리베이터를 탔다.

띠잉-!

그들이 타자마자 나는 빠르게 움직여 엘리베이터가 몇 층에서 멈추는지 확인했다.

'11층!'

쫓아가긴 늦었지만, 그녀가 이 건물 몇 층에 사는지 알아낸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정체도 모르는데 더 접근하는 것도 위험했다.

'당장 나오진 않겠지?'

남자의 상태를 보면 적어도 아침까진 곯아떨어질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오피스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멀찌감치 서서 11층을 찾아 주시했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은 지금 내가 얼마나 긴장했는지를 알려 주었다.

잠시 후.

'저긴가?'

한 호실에 불이 켜졌다.

수많은 호실이 있으니 우연처럼 다른 사람이 때마침 불을 켰을지도 모르지만, 막 올라간 그녀의 집일 확률이 더 높았다.

그래도 좀 더 기다려 보았다.

11층 라인에서 불이 켜지는 집은 10분간 더 없었고, 재능마켓이 있던 호실과 그녀의 집으로 짐작되는 호실을 가늠해 보았다.

'1102호인가?'

수많은 가정이 앞선다.

하지만 무작정 가서 초인종을 누를 수도 없으니,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

.

.

약 1년 전쯤 선릉역 일대 화류계에 유선이란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도 그렇지만, 다른 여자들이 갖지 못한 묘한 매력이 있었고, 그걸 기회로 단박에 에이스가 되었다.

그녀는 처음엔 가라오케부터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높은 주대의 가게로 옮겨 갔는데, 마침내 화류계의 정점이라는 텐프로에까지 입성하기에 이르렀다.

하룻밤에 기본 200만 원.

심지어 이건 그녀를 데리고 나오는 값이 미포함인 가격이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성매매는 하지 않는 가게였지만, 은밀한 거래를 통해 얼마든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오늘도 김 사장은 흐뭇한 얼굴로 넥타이를 풀었다.

"잠깐 씻고 올게요. 괜찮죠?"

"그럼! 그럼! 하하! 같이 씻을까?"

"아직은 부끄러워요."

도망치듯 욕실로 숨는 그녀를 보며 김 사장은 껄껄 웃었다.

복층 오피스텔엔 1층에 소파가 2층엔 침대가 있었다. 김 사장은 소파에 앉으며 맥주를 땄다.

'이제껏 내가 본 애들 중에 최고야.'

그는 곧 있을 황홀한 경험을 앞두고 만족한 듯 웃었다.

김 사장은 어려서부터 유복하게 자랐다. 돈이 부족해서 무언갈 못 해 본 경험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세상엔 돈이 있다고 무조건 가질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유선도 그랬다.

그녀를 보기 위해 대기한 사람만 수십 명이 넘는다고 했다. 본래 이 바닥 에이스들이 공주님 허벅지 안쪽 보기처럼 어렵다지만, 그녀의 소문이 퍼지면서 돈깨나 있는 양반들은 죄다 예약을 걸었고, 오늘도 앞선 예약자가 펑크를 내지 않았다면 그는 유선을 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집도 깔끔하네. 딱 내 스타일이야. 얜 오래 볼 수 있겠는데?'

김 사장의 여성 편력은 매우 심한 편이어서 세 번쯤 만나면 아무리 예뻐도 질리곤 했다. 그런데 유선은 달랐다. 분명 아까 5시간 넘게 룸에서 얘기도 하고 술도 마셨는데, 황홀했던 기억만이 남았을 뿐 그녀와 무슨 얘길 나눴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냄새도 좋네. 무슨 디퓨저 쓰는 거지?'

얼굴을 돌려 찾아봤지만, 딱히 보이는 디퓨저는 없었다.

어쨌든 그는 그녀를 기다렸고, 이 시간마저 행복했다.

솨아아아아아.

줄기차게 들려오던 물소리가 어느덧 뚝 멎었다.

그도 손에 들었던 맥주 캔을 선반에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욕실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멋진 몸을 감상하려는 것이다.

"흐으…."

기대감으로 신음이 절로 나왔다. 어른이 되기 전부터 즐겼던 유흥이었다. 그게 수십 년이었고 최근엔 매너리즘까지 왔었는데, 유선을 본 뒤론 다시 가슴이 뛴다. 이렇게 매력적인 여자는 처음이었고 그의 경험상 이런 여자는 볼 수 있을 때 무조건 봐야 했다.

덜컥.

욕실 문이 열리면서 수증기가 안쪽에서 화악 풍겨 나왔다. 김 사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모습을 단 하나도 놓치기 싫었던 것이다.

먼저 매끈한 팔이 보였다.

한데, 이내 그게 스위치를 찾아 불을 꺼 버렸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네.'

김 사장은 웃으며 일어났다.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다.

"이야…."

큰 수건으로 몸을 감싼 유선이 나타났다.

"역시 멋져."

그가 살면서 본 가장 아름다운 몸이었다. 김 사장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감쌌다. 그러자 유선이 웃으며 그의 몸을 가볍게 밀곤 소파로 뛰어갔다.

김 사장은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일 그만하는 게 어때?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어머, 정말요?"

"그럼! 뭐 하러 힘들게 술 마시고 그래."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한 말이었지만 그는 진짜 그런 생각도 하고 있었다.

"유선아."

그가 소파에 앉아 그녀 쪽으로 몸을 밀며 말했다.

"오빠가…."

그의 몸이 점점 그녀 쪽으로 바짝 다가설 때였다.

"…어?"

갑자기 김 사장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변했다.

"오빠?"

"…어…."

"그게 아니잖아. 오빠?"

김 사장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네, 주인님…."

어느새 그의 눈빛은 탁했고, 목소리는 감정이 담기지 않았다.

유선은 깔깔 웃으며 일어났다.

그리곤 그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훅 밀린 그가 소파에서 벌러덩 넘어지자 그의 배를 유선이 짓밟으며 말했다.

"너는 오늘부터 내 노예야. 그렇지?"

"네, 주인님."

그녀는 이 세계에 온 뒤로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었고, 그녀의 미모는 곧 절대적인 무기였다.

"너 돈, 많아?"

"원하시면 다 드리겠습니다."

"당연하지. 일주일 뒤 우선 천만 원. 가능하지?"

아직은 완전히 이 세계에 동화되지 않아서 그녀의 힘이 온전치 못하다. 주술이 유지되려면 기간을 두고 한 번씩 만나야 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게다가 이 세상엔 그녀를 위협하는 사회 안전망도 있었다. 생각 같아선 다 죽여 버리고 갈증을 풀면 좋겠지만, 경찰에게 잡히면 감옥에 가야 한다. 정신 공격엔 특화되었지만, 육체적 능력은 상대적으로 미흡했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야만 한다.

"때가 되면 나를 위해 네가 나설 날이 올 거야. 그때까지 잘 처신하도록 해."

"명심하겠습니다."

그녀가 웃자 김 사장이 넙죽 엎드려 그녀의 발등에 입을 맞췄다.

"가 봐."

"네, 주인님."

김 사장이 비틀거리며 나가자 그녀는 소파에 앉아 김 사장이 따 놓은 맥주를 들었다.

"여긴 천국이야…."

몇 가지 규칙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것들만 잘 지키면 너무도 안전한 곳이었다. 모든 편의 시설은 돈으로 누릴 수 있었고, 그녀의 미모면 안 되는 것도 되게 했다.

하지만 이것으론 부족했다.

더 가지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이걸로 서른 명인가?'

힘이 더 강력해지면 강남역 앞에 서서 지나가는 남자들을 전부 홀려 버렸겠지만, 아직 그럴 수 없었다.

'오십 명 정도면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겠지.'

그녀의 수족이 늘어날수록 그녀의 정신력도 강해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이 한 달에 100만 원씩만 줘도 그녀는 월 3,000만 원이다. 그럴 만한 부자들만 골라서 물고 있었는데, 의사, 변호사, 사업가, 금수저까지 그녀의 말 한마디면 간이든 쓸개든 바칠 것이다.

'거의 다 됐어. 거의 다….'

그녀는 이전의 힘을 되찾기 위해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 제물이 되는 남자의 수는 오십. 그 정도의 정기를 단번에 흡수하면 이전의 힘을 상당 부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호호호!"

하급 마물이었던 그녀.

하지만 이 세계에선 머잖아 정점에 설 수 있을 것이었다.

.

.

.

새벽에 하던 신문 배달 일은 그만뒀지만, 일찍 일어나는 건 변함이 없었다. 샤워로 정신을 맑게 한 뒤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한다. 한동안 미션을 하느라 공부를 못 했다.

'정체가 뭘까? 그 여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 형태를 한 괴물이었다.

'모르겠어.'

아는 게 힘이고 적을 알아야 승산도 높아진다. 그녀가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지, 공격 수단은 무엇이고 힘이나 방어력은 얼마나 되는지 알아야 작전을 세울 수 있지만, 내겐 정보가 부족했다.

'그렇게 익숙한 걸 보면 여기서 꽤 살았단 건데.'

일본에서 본 구울과 대조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누가 봐도 사람이었고, 안경이 없었다면 나조차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같은 건물에 있었을 줄이야.'

이 또한 재능마켓의 안배일까? 아니면 그만큼 위장한 하층민이 많다는 건가?

'그래서 더 위험해. 자칫하면 나까지 노출돼.'

건물엔 CCTV 천지였다.

구울을 생각하면 아무 곳에서나 싸웠다간 또 살인자가 되어 버릴 거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지만 세상이 내 말을 믿어 줄까?

'며칠만 더 지켜보자.'

일단 이렇게 결론을 냈다.

성급하게 나섰다간 내가 잃는 게 더 많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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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학교가 끝나자마자 고깃집으로 가서 빠르게 불판을 해치우고 아주머니께 양해를 구했다.

"효자네. 어서 가 봐."

아주머니는 흔쾌히 나를 보내 줬는데, 가게를 나서기 전 고깃집 앞에서 도화지를 불러냈다.

"어머, 이렇게나 많이?"

꿀물 3병이었다.

"고마워, 민준아…."

그녀가 더 말하기 전에 나는 몸을 돌려 뛰었다. 오늘은 바쁜 날이다.

"야, 도민준! 잠깐만! 야아아!"

어머니가 일하는 가게는 신림에 있었다. 그나마 같은 2호선 라인이라 환승 없이 곧장 찾아갈 수 있었는데,

'기억이란 게 이렇게 무섭네.'

나한텐 체감상 20년은 더 된 곳인데도 용케 한 방에 찾아왔다.

번화가 구석의 작은 식당.

제육볶음이나 찌개류, 백반 등을 파는 곳인데 주인아주머니와 어머니 두 분이 꾸려가셨다.

작은 식당이지만 일은 많다. 채소를 손질하는 것도, 가게를 청소하는 것도, 설거지를 하는 것도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었다.

"…?"

식당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곧장 어머니를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했다.

"왜 혼자야?"

"아들, 왔어? 앉아!"

손님은 없었다.

어머니 말론 그리 손님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배고프지?"

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한 상 들고 오셨다.

"어서 먹어."

나는 끄덕이면서 밥을 먹었는데 솔직하고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맛집'이라곤 할 수 없이 평범했다. 이건 폄하하는 게 아니다. 전에 먹었던 어머니 미역국은 내 인생 최고였으니까.

"민준아."

"응?"

"엄마가 고민 있어서 불렀어."

숟가락을 놓으며 턱을 끄덕였다. 예상은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로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가 말인데…."

무슨 일일까.

때마침 가게 문이 열리고 후덕한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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