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화
탁,
뒤로 뻗은 손아귀에 공 같은 게 잡혔다. 사과였다.
"…?"
교실 문가에 강남석 패거리가 있었는데, 콧등을 찡긋한 강남석이 입을 열었다.
"이열, 역시 운동 신경 좋네?"
힐끔 옆을 보니 박치가 내 시선에 목을 움츠렸다. 전에 한번 깨져서 그런지 부담스러운가 보다.
"볼일이라도?"
잡은 사과를 보면서 강남석에게 물었다.
-쟤들이 왜 온 거야?
-몰랐어? 전에 민준이랑 한바탕했었잖아.
-그럼 시비 걸러 왔다고?
-모르겠어!
반 아이들이 쉬쉬하며 우릴 지켜봤다.
"그거 주러 왔다."
이런 구닥다리 사과라니? 하…?
"근데 너, 들리는 소문에…."
강남석이 내게 바짝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인성고 애들 깠다면서? 거기 2학년 대가리가 얼굴도 못 들고 다닌다던데."
"누구…?"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도화지를 괴롭히던 애들, 영준이랬던가?
"내 귀에 들어올 정도면 노는 애들은 다 안다고 봐야 할 거다."
"그게 왜?"
강남석이 씨익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학교 명예도 있는데 네가 깨지면 우리가 뭐가 되겠냐? 3학년 형들도 주시하고 있으니까."
강남석이 쪽지를 하나 꺼내서 내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위험하면 전화해라."
"…."
"혼자 너무 날뛰지 말고. 아무리 네가 잘 쳐도 쪽수엔 답이 없는 거야."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강남석은 할 말 다 했다는 듯 돌아서서 나갔다. 그런 나를 보며 조마조마한 얼굴로 있던 박인성이 쪼르르 달려와서 물었다.
"민준아, 괜찮냐?"
"어."
"쟤가 뭐래? 끝나고 옥상으로 오래?"
녀석의 말에 나는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런 거 아니야."
"정말? 솔직히 말해. 내가 같이 가 줄게!"
"진짜 아니라니까."
녀석, 기특하네.
나는 인성의 어깨를 손으로 톡톡 두드려준 뒤 자리로 걸어갔다.
'이건… 잘 지내보잔 건가?'
사과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나는 꼬마들의 투덕거림에 낄 생각도, 시간도 없다.
위험하면 전화하라고?
하하, 어이가 다 없다.
내 기준의 위험이라는 단어의 뜻을 녀석들이 알기나 할까?
그보다….
'하층민은 어디에 있는 걸까.'
자연스럽게 강남석을 머리에서 지워 버리며 미션을 생각했다. 이제 8일 남았다. 8일 안에 하층민을 찾지 못하면 미션은 실패하게 되고, 그러면 내게 어떤 후환이 생길지 몰랐다.
'오전엔 1학년부터….'
그렇게 마음먹고 쉬는 시간마다 나는 각 반을 돌면서 어떤 이상한 점을 찾으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경에 걸리는 건 없었다.
점심시간엔 2학년을, 그 이후엔 3학년도 모자라서 교무실까지 다 뒤졌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일단 학교엔 하층민이 없으니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주변이라고 해도 범위가 너무 넓은데.'
등하굣길부터 시작해서 내가 자주 다니던 곳과 신문 보급소까지 다 돌았지만, 안경에 걸리는 건 없었다. 학교를 마치고 강남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도 사람들을 주시했지만, 모두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 안경에 하층민이 어떤 형태로 보일까?'
그조차 알 수가 없다.
-이번에 내리실 역은 강남….
8일이란 시간과 '안경'을 통해 보고 확인해야 한다는 제약. 얄미울 정도로 정보를 주지 않는 재능마켓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발로 뛸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강남역 일대를 한참 돌아다녀 보았지만, 여전히 걸리는 건 없었고 결국 발길을 돌려 고깃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멈칫.
발이 멈췄다.
'설마 아니겠지?'
내 주변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딱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왔냐? 좀 늦었네?"
가게로 들어서자 아저씨가 언제나처럼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봤다.
'휴….'
나는 순간,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아저씨와 싸워야 한다면…?
아… 생각도 하기 싫다.
"내일부터는 일찍 올게요!"
다시 한번 힐끔 아저씨를 보며 확인했지만, 다행히 안경에 잡히는 건 없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릴 벗어났다.
"얌전히 있어."
표범을 내려놓고 불판을 닦으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내가 아는 거라곤 이 특수한 안경을 통해서 하층민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과 그 하층민이 내 주변에 있다는 것뿐이었다. 처음엔 보이기도 하고, 주변이라길래 금세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 두 가지 정보로만 누군가를 찾는다는 건 매우 어려웠다.
그가 인근에 있다고 해도 밖에 나오지 않으면 나는 그를 포착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 구울처럼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 거야.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해.'
내가 찾아야 하는 하층민이 정확히 뭔진 몰라도 '커스텀'이란 걸 안 이상 사고의 폭을 넓혀야 했다.
'설마 저 녀석처럼 동물 형태인가?'
늘어지게 누워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표범을 보다가 흠칫했다. 기척이 느껴지는 동시에 귀가 먹먹할 정도로 고음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끼야!"
"아… 귀먹겠어요."
"귀여워! 고양이! 너무 귀엽다아아아아아!"
도화지는 표범 앞에 쪼그려 앉아서 미친 사람처럼 침을 흘려댔다.
"뭐지? 처음 보는 고양인데! 네가 키워? 언제부터?"
"그냥 그렇게 됐어요."
"내가 안아 봐도 될까?"
"그 녀석 사나운데…."
혹시나 했지만, 냉큼 도화지의 품에 안겨든 표범은 공격할 의사가 1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기분이 좋은지 도화지 품에서 데굴데굴 구른다.
"우와, 존예! 졸귀!"
헐, 저 자식.
진짜 자기가 고양이라고 아는 거야, 뭐야.
"이렇게 예뻐도 돼? 이건 반칙이라고!"
표범을 눈에 넣을 것처럼 바라보던 도화지가 갑자기 털썩 내 옆으로 바짝 몸을 당기며 앉았다.
"왜요?"
"저… 그… 혹시."
"노래방 안 가요."
"아니이! 그거 말고!"
"그럼요?"
"전에… 그거 몇 개만 더 줄 수 없을까?"
꿀물?
"아… 그거요…."
내가 난처한 표정을 하자 도화지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비싼 거야?"
"꼭 그런 건 아닌데 귀해요."
"어디서 샀는데?"
"산 건 아니고… 어머니께서 어떤 도사님께 받아 오시는 건데, 자주는 아니라서요."
"아… 어쩐지! 도사님이니까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거였구나!"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재능마켓 어쩌구… 설명할 순 없으니까.
하지만 도화지는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대번에 믿었다. 그만큼 간절하다는 걸까? 도화지의 시무룩한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이미 세 개 있고… 잘하면 두 배로 늘릴 수 있으니 내가 손해 보는 건 아니니까, 한 번 더 도와줘?'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어머니께 물어볼게요."
"정말? 그래 줄래?"
금세 환히 웃는 그녈 보니, 기분이 나쁘진 않다.
'내 전투에도 도움도 될 거고.'
다시 표범으로 시선이 꽂힌 도화지가 물었다.
"얘, 이름이 뭐야?"
"…."
"서, 설마 이름도 안 지었어? 그런 줄 알곤 있었지만 너 진짜 무신경하구나? 이렇게 예쁜 고양이한테 이름도 없다니!"
그거 고양이 아니야.
"범죄라고, 범죄! 방치도 학대인 거 알지? 그러다가 얘가 너 싫다고 가출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어휴, 네가 주인 잘못 만나서 고생이 많다. 너처럼 예쁜 고양이는 본 적도 없는데. 차라리 언니랑 살까?"
고양이 아니라니까….
그리고 쟤가 암컷이었나?
"범이에요."
도화지가 움찔했다.
"뭐…?"
"이름이요. 범이라고요."
이유는 없다.
표범이니까, 단순하게 그렇게 부르자.
그렇다고 표범이라 부를 순 없잖아?
"무슨 이름이 그따위야! 너, 방금 막 지은 거지?"
"지었으니까 됐잖아요."
말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이제 가란 뜻이었다.
"어흑, 이 메마른 감정의 소유자 같으니라고! 너 이래서 여친이나 생기겠냐? 그렇게 늙다가 외롭고 쓸쓸하게 고독사할걸?"
"…."
찔끔.
그래서였나? 여친이 없었던 게.
"…너무 갔는데요?"
"그러니 잘하라고! 나한테 하는 것만 봐도 네 미래가 훤해!"
쩝. 왠지 반박 불가다.
"됐어요, 일 방해되니 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투덕대자 그녀의 품에서 범이가 훌쩍 뛰어내려 담장 위로 올라갔다. 저 작은 녀석이 3미터가 넘는 담 위로 그림처럼 올라가니 멍하니 볼 수밖에 없다.
"와, 진짜 잘 뛴다. 그치? 고양이는 고양이네."
고양이 아니라니까….
"어쨌든 혹시라도 필요하면 말해."
"뭘요?"
"지금까지 뭘 들은 건데! 여자 친구 말이야!"
"소개라도 해 주게요?"
"내가 왜?"
"필요하면 말하라면서요."
"아니, 취소!"
"…누나 좀 이상한 거 알죠?"
"너가 백만 배 더 이상하거든! 흥!"
홱!
돌아섰던 도화지가 붉어진 얼굴을 내 쪽으로 조금 틀며 작게 말했다.
"누가 소개해 준다는 건가…."
"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고오오!"
휙 가게로 들어가 버린 도화지를 보며 나는 웃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연애야.'
이번 생에도 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
.
.
-수고하셨습니다!
-민준아! 밥 먹고 가지?
-아니에요! 오늘은 일찍 가 봐야 해서요! 내일 뵙게요!
알바가 끝나자마자 가게를 나와 오피스텔로 향했다. 하지만 재능마켓에 가려는 건 아니다.
'근처란 게 여기일 수도 있어.'
재능마켓 오피스텔이 있는 브라칸 빌딩엔 수많은 호실이 있었다. 저층엔 영업장도 꽤 여럿 있었는데, 이 건물을 드나드는 사람만 해도 수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대략 1,000명? 2,000명?
오가는 손님까지 생각하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
화단에 걸터앉아 오가는 사람을 지켜봤다.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났지만, 편의점을 찾거나 야간에 외출하는 사람도 많았다.
'내일 아침까지 지켜보면 출근하는 사람까지 다 확인할 순 있을 거야.'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0시 22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이 시간에도 강남역엔 사람이 많았다. 한 사람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후…."
어느새 12시가 지났다.
인적은 드물어졌고, 상층부 오피스텔 불도 하나씩 꺼져가기 시작했다.
이때, 전화기가 울렸다.
"엄마?"
-늦니?
"중간고사 얼마 안 남았잖아. 인성이랑 독서실 왔어."
-인성이가 누구니?
아, 얘기 안 했었나?
-쉬엄쉬엄해.
"알았어."
-그리고 엄마가 할 말 있는데, 내일 가게로 올래?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의논할 게 있어서.
"알았어. 걱정 말고, 먼저 주무세요."
전화를 끊었다.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은 없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이걸 이해할 수 있을까. 선의의 거짓말이란 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근데 무슨 일이지?'
엄마가 일하시는 가게엔 몇 번인가 갔던 적이 있었지만 내 기억에는 까마득한 일이었다.
'가 보면 알겠지.'
하지만 지금은 집중해야 할 때.
죄송하더라도 지금 이 시련을 이겨 내야 엄마를 다시 볼 수 있다.
밤이 되자 기온이 꽤 떨어졌다.
다행히 추위 내성이 있는 내겐 지장을 줄 수 없었다.
그렇게 30분 더 흘렀을 때였다.
'…?'
저 앞에서 택시가 한 대 섰다.
'어어어어?'
지하철역 앞이었으니 택시가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했고, 그것에 이상할 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막 택시에서 내린 여자가 문제였다.
'뭐, 뭐야? 저… 건?'
저 앞에 또각또각 걸어가는….
아니, 저 '사람'이 아니라 저거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
나는 황급히 건물 안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면서 안경을 벗고 여자를 다시 바라봤다.
'이게… 무슨.'
긴 생머리와 하얀 얼굴, 얇은 코트 안의 몸에 딱 붙는 치마 원피스가 보였다. 빨간 하이힐은 그녀의 미끈한 다리와 너무도 잘 어울렸고,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정도의 미인이었다.
하지만 다시 안경을 쓰고 보자,
'흐으읍….'
그녀는 껍데기가 모두 벗겨진 것처럼 모습이 변했다. 머리엔 뾰족한 뿔이 정수리를 기점으로 양쪽에 나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기괴했다.
【하층민을 발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