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화
나는 아저씨의 눈썰미에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어떻게 아세요?"
"나도 키우거든."
"에에엑?"
"뭐가 에엑이야? 나는 뭐, 고양이 키우면 안 되냐?"
"아뇨. 그건 아니지만…."
"안 어울린다고?"
"하하! 아뇨…. 어울리세요."
내가 머릴 긁적이며 말하자 아저씨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알아, 인마. 근데 살다 보니까 사람보다 동물이 더 편해. 잘 키워 봐라. 귀찮게 군다고 버리지 말고. 아, 그리고."
"네?"
"시간 될 때 일찍일찍 와."
"…?!"
나는 시급 받는 알바다.
그런데 이 말의 뜻이라면?
"정말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정식으로 고기 다루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뜻이었다.
"틈틈이 공부하고."
"네!"
전용 무기를 활로 정했지만, 아저씨의 기술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매나 표범, 토끼와 싸울 때도 고생하지 않았던가? 그때 내가 녀석들의 약점을 파악하고 있었다면 일격에 치명상을 줄 수도 있었을 거다.
'좋아, 뭐든 배워 두면 쓸 거야. 그게 내 생존율을 높이는 지름길이고.'
아저씨가 들어가고 표범 앞에 쪼그려 앉아 있다가 불판 바구니를 끌고 왔다.
"잘 먹네."
제 몸집보다도 많이 퍼 왔건만, 어느새 바구니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하긴, 녀석의 진면목은 내 몇 배나 큰 표범이었으니 오죽할까. 저 정도론 배가 차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 본다면 믿기지도 않을 괴이한 일이겠지만.
"퇴근하면… 쩝…."
생닭이라도 몇 마리 사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녀석 먹성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너 혹시 사료 먹을래?"
빈 바가지를 혀로 핥던 녀석이 나를 보며 얼굴을 갸웃갸웃했다.
"아니다, 사료는 무슨…."
평생을 야생에서 육식 토끼 사냥하던 녀석에게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일 것이다.
벅벅벅!
머리 비우기엔 불판 닦기가 최고다.
【광택을 머금었습니다.】
【경험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표범은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지붕에 올라가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안전한 곳을 찾아 쉬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도 고생했다!
드디어 기나긴 하루가 끝이 났다.
신문 배달을 마치고, 재능마켓의 '하층'으로 가서 최소 일주일을 보내고, 나와 바로 학교에 알바까지. 정말 무던히도 긴 하루다.
"휴우,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해가 저문 서울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럽다. 내가 겪고 있는 일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세상. 그런데 나는 지금 여기 있었다.
.
.
.
【재능마켓에 입장하세요.】
다음 날.
알람처럼 울리는 메시지에 위를 보았다.
이미 신문 배달을 마치고 강남역에 새벽같이 와 있었다. 오늘 보급소 소장님께 일을 그만둔다고 말을 했다. 하루 800부나 소화하는 인재가 떠난다니 무척 아쉬워하셨지만, 신문 배달을 전업으로 삼으라 말할 순 없는 아저씨는 고생했다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
오전 6시의 강남역.
이 근처는 참 신기한 동네다. 어둠이 찾아오면 더 불야성을 띠다가도 날이 밝아오면 잠시 고요해진다. 그러다가 출근 시간이면 밤과는 전혀 다른 풍경으로 변했다.
물론, 이 변화무쌍한 곳에서도 단연 가장 기괴한 일이 이 오피스텔에서 벌어지고 있다.
511호 앞.
문을 열었다.
갸르르르릉.
앞으로 멘 가방에서 표범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재능마켓에 입장하셨습니다.】
이젠 이골이 날 법도 한 메시지였지만, 언제나 가슴이 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잠깐 현관에서 대기하다가 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뒤 문을 닫았다.
"와…."
어제도 봤지만 참으로 놀랍다. 작은 원룸이 대궐처럼 변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기술을 적용하면 모두가 서울에 집 한 채씩 다 가질 수 있을 거다. 쪽방도 궁궐처럼 만들어 버릴 거니까.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표범이 가방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워낙 날렵한 녀석이라서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
전엔 좁은 공간에 필라테스 기구들이 들어차 있어서 답답했는데, 이젠 기구가 더 늘었음에도 공간이 넉넉했다.
나는 유리 벽으로 다가갔다.
언제나처럼 안쪽엔 수많은 아이템이 진열되어 있고, 품목도 늘었다.
【누적 포인트 18,331】
어느새 엄청나게 모은 포인트는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증명해 주었다. 그런데 그래서 더 함부로 쓰질 못하겠다.
'조금 더 모으자.'
가시권에 들어온 몇 개의 아이템을 보면서 조바심을 꾹 눌렀다.
'비싼 게 비싼 값을 하니까.'
어느 것이든 값을 톡톡히 할 테지만, 비싼 게 더 좋다는 건 진리 아니던가?
매를 사냥해서 받은 1만과 퀘스트 달성으로 누적된 것을 더해 18,000이라면, 앞으로 미션 한두 개만 더 해도 3만 포인트까진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살 수 있는 품목이 달라진다는 거다.
그런데 이때, 상념을 깨듯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전용 무기는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경험치가 누적됩니다. 누적된 경험치는 전용 무기 사용을 좀 더 윤택하게 만듭니다.】
"…."
그렇게 말 안 해 줘도 안다.
이미 일주일간 얼마나 굴렀는지 엄청나게 실력이 늘었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으니까
【새로운 미션을 위해 보급품이 지급됩니다.】
【보급품은 옷장에서 수령하세요.】
'옷장? 그런 게 여기 있었나? 아…!'
지금까지 의식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냉장고 옆으로 붙박이장들이 늘어서 있었다.
【모든 보급품은 커스텀할 수 있습니다.】
【귀속된 보급품을 분실 시 자동으로 파괴됩니다.】
【보급품은 재능마켓에 되팔 수 없습니다.】
옷장으로 걸어가는데 표범이 졸래졸래 따라왔다. 나도 모르게 입술이 꿈틀거렸다. 그저 크기만 작아진 건데, 저렇게 귀엽게 변하다니 본모습을 아는 나로선 볼 때마다 황당했다.
옷장 앞에서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양쪽으로 열었다.
끼이이익.
활짝 열린 옷장엔 몇 가지 물건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이게 다 내 건가?"
생각보다 많은 물건에 당황하는데, 메시지가 들렸다.
【귀속 아이템은 일반인과 공유할 수 없습니다.】
【펫 전용 아이템은 재능마켓에서 구매할 수 있습니다.】
나는 손을 뻗어 가장 가까운 물건을 잡았다.
안경이었다.
"눈이 나쁘진 않은데…."
【수호자의 안경
일정 범위 내의 하층민을 구별할 수 있다.】
"…?"
그 구울 같은 것들을 말하는 건가?
이끌리듯 써 봤다.
도수가 없는지 어지럽거나 하진 않았다.
이번엔 옷걸이에 걸린 코트를 잡았다. 조금 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입어 보니 딱 맞았다. 내가 커진 걸 잊은 거다.
【수호자의 코트
방어력+1
매력+1
물리적 타격으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한다.
낙상에 강하며 쉽게 찢어지지 않는다.
착용 시 기척 감소 효과 발동.】
"오오."
검은색 코트는 그냥 입고 다녀도 될 것 같다.
이어,
【수호자의 셔츠
방어력+1
매력+1
수호자를 지켜 주는 가장 기본적인 아이템.
타이나 단추를 구매하여 추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구김 방지.】
새하얀 셔츠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왜 이렇게 후해? 불안하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지금까지의 사건들을 볼 때 무언가를 받으면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 했었다. 안경에, 셔츠에, 코트까지. 방어력이 줄줄이 붙은 이런 아이템들을 거저 준다고?
【보급품을 모두 수령하셨습니다.】
【미션을 시작합니다.】
그럼 그렇지.
꿀꺽.
뭐가 나온 것도 아닌데,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정도로 긴장해 버렸다.
【메인 미션: 하층민을 섬멸하라.】
【서브 미션: 전용 무기를 숙달하라.】
'하층민?'
【서브 미션 성공 시 '중급 필라테스 사용권' 사용 가능.】
【가장 가까운 지역의 하층민이 자동 타깃팅됩니다.】
놀라운 단어들이 팝콘 튀듯 계속 나왔다.
우선 필라테스가 '중급'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러면 내가 여태까지 해 온 그 어마무시했던 운동은 뭐였던 건가?
【하층민을 섬멸할 시 하층민의 아이템을 자동적으로 흡수할 수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하층민 역시 당신을 알아볼 수도 있습니다.】
가까운 지역의 하층민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구울 같은 게 이 근처에도 있다는 건가? 그게 말이 돼? 그런 게 있으면 왜 뉴스엔 한 번도 안 나왔는데?
【하층민에게 살해되면 당신이 이룬 모든 것 역시 초기화됩니다.】
【미션 완료까지 10일 남았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퍼 줄 때부터 알아봤다. 하층민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는데, 나는 이제부터 그걸 찾아 죽여야 한다는 거다.
"허얼…."
아직 시간이 흐르진 않으니까 여기서 최대한 생각을 하고 움직여야 할 것 같다. 그러다가 발치에 얼쩡거리는 표범을 봤다.
'그러면 이 녀석도 하층민인가?'
하긴 어제 온종일 녀석을 데리고 다녔는데, 그 누구도 이 녀석을 보면서 다른 세상 생물이라곤 못 느꼈다.
그러다 퍼뜩,
'커스텀!'
외형을 숨길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할 수 있다면 상대도 할 수 있다는 뜻이 되는 거 아닌가?
'열흘 안이라.'
하층민을 알아볼 수 있는 안경이 있으니 어떻게든 찾을 것 같다. 하지만 문젠 그게 아니었다.
'얼마나 센 놈인지가 문제인데.'
그 하층민이 얼마나 강한 녀석일지 가늠할 수 없으니 발견을 해도 문제 아닐까?
'그것도 현실에서….'
일본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내가 구울을 사냥했었는데, 그게 연쇄 살인마의 소행이라며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었다.
'그때는 연습이었다고 생각해야 돼. 이번엔 진짜 실전이고.'
뭐가 어떻게 진행되는진 몰라도 앞으론 현실도 살얼음판이나 다름없었다. 하층으로 가는 것과 현실에서 미션을 하는 것엔 장단점이 극명했는데, 적어도 여기선 먹을 거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게 안심이었다.
그렇지만 삐끗하면 죽는다는 건 변함없는 것이다.
"하아…."
숨이 턱 막혀 오는 부담감에 허리를 숙였다. 표범을 안아 들면서 나도 모르게 한탄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우리, 큰일 난 것 같다. 그치?"
갸르르르릉.
표범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혀를 내밀어 내 코를 핥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녀석이라도 곁에 있다는 것이다. 말이 통하진 않지만, 위급하면 녀석과 공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미션도 받았다.
명확하진 않아도 할 일이 생겼다.
'돈 얘긴 없네.'
번 돈은 써도 된다는 뜻일까?
'어차피 이번 미션을 못 하면 내가 죽어. 모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돈뿐만이 아니라 여차하면 내 피 같은 누적 포인트도 써야 할 거다.
나는 진열장으로 갔다.
"으음…."
그리곤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
.
.
【미션 완료까지 8일 21시간 29분 남았습니다.】
하루가 지났다.
그런데 8일이란 단어에 꼭 이틀을 까먹은 기분이다.
"어? 도민준? 안경 썼네?"
"아…."
교실에 들어가자 박인성이 대뜸 말했다.
"뿔테도 잘 어울린다. 야, 근데 또 키 컸냐?"
"몰라."
"하! 뭘 먹고 살길래 너만 쑥쑥 크는데? 배신자야!"
녀석이 내 머리를 자기 팔로 감으려고 했다. 하지만 스윽 나는 녀석의 팔을 간단하게 피하며 자리로 향했다.
"…."
그런데 뭐지?
반 아이들이 힐끔힐끔 나를 보며 수군댔다.
-꺄아! 민준이가 이쪽을 봤어!
-민준이 요즘 존재감 대박이다.
-원래 저렇게 훈남이었나?
여자애들은 여자애들대로,
-쳇, 저놈, 예원이랑 뭐 있지?
-어릴 때부터 친구라던데?
-아, 그래?
남자애들은 그들대로 내게 관심을 보였는데, 그게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관심받는 게 그렇게 좋진 않네.'
나는 쓴 입맛을 다시며 예원이를 생각했다.
오늘 예원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스윽.
나는 교실을 둘러보며 아이들 하나하나를 지켜보았다.
내가 녀석들을 뚫어지게 보는 이유.
단 하나였다.
'다행히 여긴 없는 건가?'
어제부터 나는 재능마켓을 나와 강남역 일대를 계속 바라보고 다녔다. 내게서 가까운 곳 하층민을 '타깃팅'한다고 했었는데, 그 가깝다는 기준이 우리 집이나 학교인지 아니면 재능마켓인지를 가늠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였다.
쌔애애애애액!
뭔가가 내 뒤통수를 노리고 빠르게 날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