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화
나는 빛이 드는 구멍을 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표범이 이제 어느 정도 움직이는 덴 지장이 없어 보인다는 거다.
'더 시간을 끌어 봐야 답은 없어.'
이렇게 자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오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이젠 치가 떨릴 정도로 적응하고 있었다. 40년을 무력하게 살아왔건만,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가게 될 줄이야.
일단, 다시 한번 구멍 밖으로 나가서 확인했다.
아직도 매가 창공에서 날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어제 번뜩 스쳤던 생각을 이제 실천으로 옮길 때다.
가방에서 몇 가지 도구를 꺼냈다. 그런 뒤 가방을 단단히 메고 어깨끈을 조였다. 활도 둘러멨다.
꾸웅?
표범이 다가와 머리를 갸웃거릴 때, 나는 생수를 따서 절반을 마신 뒤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쪼로록.
생수에 다른 것이 섞여들었다.
【피로가 회복되었습니다.】
청량함이 온몸에 퍼져 나가면서 갈증을 싹 해소해 주었다.
"마셔."
끄으으으응?
이번엔 녀석이 코를 벌름거리면서 냄새를 맡았다. 그러더니 눈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벌컥벌컥!
몇 초 만에 다 마셔 버리더니 활짝 웃었다. 이제까지 먹던 생수보다 몇 배는 맛있었을 거다.
나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몸이 다 빠져나오자마자 곧장 벽에 매달렸다. 5미터 위로 올라가면 평지다. 저기까지만 가면 도주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마땅히 잡을 것도 없었고, 밟을 곳도 마땅하지 않았다.
그래서 활을 두 손으로 잡고 벽을 긁었다.
부스스스스.
디딜 곳을 만들려고 흙을 파내는 것이다.
'와라.'
그러나 이건 내 진정한 목적이 아니었다. 암벽 등반 선수도 아닌데 홈을 낸다고 저 위까지 올라갈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힐끔, 위를 보았다.
빙빙 하늘을 날던 매가 어느 순간 아래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걸렸어!'
나는 몸을 돌리며 활을 높이 들었다.
쫘악!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고, 촉이 가장 깨끗한 화살을 걸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겁먹고 숨어 있어 봐야 얻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부딪히면서 놈의 패턴이라도 확인할수록 생존율은 올라갈 것이다.
'날개를 노리면 안 돼. 깃털 때문에 의미가 없어.'
몸통을 노려야 하는데, 새의 특성상 머리부터 이쪽으로 오기 때문에 그것도 쉽지 않았다.
'치명상을 줄 만한 곳을!'
새애애애애애액!
미사일처럼 이쪽으로 날아오는 매를 보니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오지게 빠르네.'
내 예상을 넘어선 속도에 잔뜩 긴장한 채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마침내 녀석이 30미터 안쪽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첫 번째 화살을 놓았다.
피잉!
놈이 날아오는 속도와 화살이 나아가는 속도가 맞물리며 찰나에 화살은 놈의 대가리 앞까지 도달했다.
푸욱!
"맞았어!"
머릴 노렸지만, 놈이 뒤트는 바람에 화살은 어깻죽지에 맞았다.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였지만 놈은 허공에서 잠깐 발광하다가 다시 이쪽으로 향했다. 나는 두 번째 화살을 시위에 걸면서 구멍 쪽으로 등을 붙였다.
"와라-!"
이대로 도주할 생각은 없었다.
기회는 이번 한 번이다.
내가 미끼가 되어 최대한 놈을 흥분하게 해야만 했다.
캬아아아아!
놈이 부리를 쩍 벌리며 포효했다. 날개를 활짝 펴고 속도를 줄이면서 두 개의 발을 내 쪽으로 겨냥했는데, 이번엔 그 다리 사이를 노리고 활을 쐈다.
피잉!
수북한 털로 덮인 가랑이에 화살이 정확하게 날아갈 때쯤 이미 놈의 몸은 10미터 이내로 근접하고 있었고,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옆으로 뛰었다.
콰과곽!
내려서는 놈의 체구에 화살이 부러졌다. 분명 두 번째 화살도 맞았는데, 멀쩡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이때였다.
쩌엉-!
놈의 몸에 한기가 서렸다.
으드드드드드득!
녀석의 몸 전체에 살얼음이 맺혔다.
활의 고유 효과가 터진 것이다.
'나이스!'
푸드드득!
당황한 녀석이 몸을 흔들어 댔는데, 깃털에서 떨어진 얼음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잠깐이지만 놈은 당황했고, 나는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무언가를 기다렸다.
'틀렸나?'
도박이었다.
그래, 도박. 목숨을 건 도박.
하지만 내겐 도전과도 같았다.
'빨리! 시간이 없어!'
내 공격력으론 놈의 눈알이나 부리 안쪽에 화살을 정확히 쏘지 않는 한 놈을 사냥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녀석은 일반 매가 아니다. 몬스터나 다름없었다.
고작 화살 몇 대론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란 거다.
캬아아아악! 캬아!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에 분노한 놈이 펄쩍펄쩍 뛰면서 얼음을 털어 냈다. 그러면서 내 쪽으로 조금씩 접근했다. 나는 물러설 대로 물러났기에 더는 뒤가 없었다.
휘이이이이잉.
까마득한 절벽이 뒤에 보이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제기랄!"
시위에 화살을 걸면서 욕을 했다.
마지막 한 발!
이것으로 내 공격은 끝날 거다.
빗맞거나 맞아도 치명상을 주지 못하면 나는 저 부리에 산 채로 살점이 뜯겨 나가거나 발톱에 온몸이 찢길 것이다.
그그그극!
역대 가장 팽팽하게 시위를 당겼다. 시위가 끊어질 것 같았지만 이 활의 효과를 보면 그럴 일은 없을 것이었다.
시위는 당기면 당길수록 파괴력이 늘어난다. 익숙하지 않으면 명중률이 떨어지지만, 이 거리에선 그럴 일도 없었다.
캬아아아아아!
빙결 효과가 점차 사라져 가자 놈은 의기양양하게 날개를 좌우로 쫙 펴더니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캬아! 캬오오오오오!
펄쩍펄쩍 뛸 때마다 우수수 흙먼지가 일었는데, 궁지에 몰린 먹잇감을 앞에 두고 과시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쏠까?
'아니야. 조금만 더!'
궁사의 마음이 흔들리면 화살도 흔들린다. 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집중했다.
'절대 혼자 안 죽는다!'
단 한 발.
죽을 때 죽더라도 먹이고 죽을 거다.
그리고 마침내.
놈의 발광이 뚝 멎었다.
스으으으읍.
그러더니 숨을 들이마시며 나를 노려보았다. 매서운 놈의 눈이 나를 주눅 들게 했지만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해보자고!'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선 곳이 그리 넓지 않았기에 공방은 극히 짧을 것이다. 전투력 측정을 하면 내가 1일 때 놈이 100 정돈 되겠지만, 화살이란 변수는 그걸 뒤엎을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녀석의 발목을 주시했다.
그 각도가 조금씩 기울 때, 긴장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나는 숨을 꾸욱 참아 눌렀다.
'흐으읍!'
내 화살촉의 목표는 놈의 눈동자다.
부들부들.
막 시위를 놓으려는 그때,
"…!"
그토록 기다리던 이변이 일었다.
캬아아아아아!
나를 향해 달려들 것 같던 매가 갑자기 뒤로 넘어가더니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 댔다.
"왔구나!"
카드드득! 카득!
뭔가 사정없이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캬아아아아!
매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는데, 매가 혼자 자살이라도 하는 게 아닌 이상 이건 뭔가에 공격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카드드드득!
매가 더는 버티지 못하겠는지 옆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곧장 절벽이었기에 녀석의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쳤고, 몇 초 후 무언가 물컹한 게 내 몸에 닿는 걸 느꼈다.
"잘했어!"
나는 표범의 몸을 손으로 더듬어 가늠하면서 등에 매달렸다.
"최고다! 역시 네가 올 줄 알았어!"
사실 반신반의했다.
무모하단 것도 알았다.
하지만 이것밖엔 방법이 없었고,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잘했어! 잘했어!"
나는 녀석의 털을 마구 헝클어 주었다. 이 순간만큼 동물과 사람을 떠나 녀석과 나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였다.
사실 아까 생수의 반을 마신 뒤 거기에 은신 드링크를 섞었었다. 본래는 나도 같이 먹고 녀석에게 의지해서 빠져나갈까 했지만, 무엇보다 녀석이 내 말을 알아듣는다는 보장이 없었고, 30분이라는 지속 시간도 문제였다. 그래서 내가 한 모험은 표범에게 은신 드링크를 몰아주는 것이었다.
표범이 매와 그냥 싸우면 지겠지만, 은밀하게 접근해서 한 방을 먹일 수 있다면 내 화살보단 월등하리라고 여긴 것이다. 어쨌든, 녀석이 작전을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팀플레이는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순간, 후욱!
몸이 붕 떠올랐다.
표범이 그새를 놓치지 않고 동굴을 빠져나가기 위해 절벽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쉽게?'
허무하리만치 절벽 위로 올라온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녀석의 몸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표범은 엄청난 속도로 뛰었는데, 흔들림이 어찌나 심한지 아까 먹은 생수가 울컥 목구멍으로 치밀 것 같았다.
표범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누가 보면 나 혼자 공중 부양하는 걸로 보일 것이다
"멀리 가야 해!"
나는 녀석을 꽈악 잡곤 외쳤다.
이제 말을 알아듣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 의사를 전한다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이때,
끼아아아아아아아!
저 뒤쪽에서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헛…!"
매가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며 우리 쪽으로 몸을 돌린 거다.
"역시 안 죽었어!"
아무리 표범이 빠르다고 해도 뛰는 놈은 나는 놈의 속도를 이길 수 없다. 표범도 그 소릴 들었는지 근육이 경직하는 게 느껴졌는데, 내가 급히 외쳤다.
"그만! 서 봐! 이렇겐 안 돼!"
오토바이를 탄 것처럼 휙휙! 지나가는 지형지물을 보면서 나는 표범의 몸을 손으로 두드렸다.
뜻이 통했을까?
속도가 조금씩 줄자 나는 녀석의 몸에서 뛰어내렸다.
'뒤를 따이는 것보단 정면으로 맞서야 돼.'
재수 없으면 놈의 발톱에 잡혀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면 그냥 떨어뜨리기만 해도 죽는다.
끼아아아악!
벌써 우리 머리 위까지 날아온 놈이 선회했다. 녀석도 방금 자길 공격한 게 뭔지 파악을 못 해서 곧장 공격하진 않는 눈치였다.
'놈도 쫄았어!'
피지컬로만 보면 대항할 생각도 못 하겠지만, 활이란 특수성을 가진 무기는 날아다니는 녀석을 맞힐 수 있었고, 은신한 표범까지 있다. 아까 표범에게 당했다는 생각을 못 하는 녀석에겐 치명적인 한 수가 될 것이다.
'도망치다가 은신이 풀려선 곤란해.'
지속 시간 안에 결판을 내야 한다.
꺄아아아아아-!
놈의 울음소리가 고음의 소프라노가 지르는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참으로 거슬렸는데, 그만큼 놈이 화가 났다는 증거이기도 해서 내겐 나쁠 게 없었다.
"내려온다!"
표범에게 알려 주는 것처럼 소릴 지른 나는 앞으로 뛰면서 하늘을 향해 활을 들었다. 아까처럼 막다른 곳에선 놈이 반드시 내 앞으로 내려올 걸 예상했지만, 이런 탁 트인 개활지에선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몰랐기에 철저히 경계해야 했다.
'내려서기 전에 아까처럼 날개를 펴고 속도를 줄일 거야. 그때가 기회고.'
안 그러면 녀석도 머리부터 땅에 처박히지 않겠나?
나는 놈의 루트를 계산하며 이동했다.
그러나 이번엔 내가 틀렸었나 보다.
"…흐읍!"
놈은 발톱으로 나를 낚아채서 하늘로 올라갈 생각이었는지 10미터쯤 앞에서 땅을 스치듯 날며 내게 어뢰처럼 날아오고 있었다.
"여, 염병!"
옆으로 피해도 소용없을 거다.
시간도, 여유도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곤 활을 쏘는 것뿐!
티잉!
날아간 화살이 놈의 몸에 닿았다.
푸욱 박혀 들었지만, 놈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화를 돋운 듯 주둥이를 쩌억 벌렸다.
"크윽…!"
×됐다.
"으아아아악!"
놈이 거짓말처럼 바로 앞에 다가왔을 때, 나는 비명을 지르며 화살로 놈을 후려치려고 했다.
그런데,
"…!"
콰드드드드득!
날 향해 날던 놈의 방향이 틀어졌다. 그러더니 땅에 처박히며 뭔가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깨앵! 깽!
표범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보이지 않는 표범과 매는 한 대 엉켜 바닥을 구르며 서로를 향해 공격하고 있었다.
'이, 이런!'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그런데 그것의 대부분은 매의 것이 아니다.
"야! 도망쳐!"
매의 부리가 뭔가를 단단히 물고 있었다. 그게 어느 부위인지는 모르겠지만, 표범이 매에게 잡혀 있음이 분명했다.
촤악! 쫘아아악!
표범도 날카로운 발톱으로 공격을 하는지 매의 몸 곳곳도 쓸리는 것같이 보였다. 하지만 매의 털이 어찌나 두툼한지 큰 상처를 내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젠자아아아아앙!"
나는 화살을 시위에 올린 뒤 매를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깽! 깨애앵!
표범의 비명이 구슬프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