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화
할짝.
혀로 상처를 핥으며 나를 노려보던 표범이 콧등을 찡그렸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놈의 포스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동물을 아무리 모른다지만, 이런 맹수에게 다가가는 건 절대 위험한 일이라는 걸 본능으로 안다.
"으음…."
살면서 나는 동물을 키워 본 적이 없었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인생이었는데, 무슨 동물을 키우나? 그만큼 동물에 대해 무지했다는 건데, 동물을 길들인다라….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으음…."
아니, 그보다 저걸 뽑아야 할 것 같은데.
'뽑지 말고, 그대로 둬야 하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대로 두는 건 또 아닌 것 같은데.'
생각은 있지만 난감하다.
대화도 안 통하는데, 화살을 뽑겠다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저 덩치만 큰 사나운 표범이 오냐, 하고 고통을 참고 기다려 주긴 할까? 어떤 게 옳은 선택인지 확신도 없는데, 환장하겠다.
"내가…."
녀석에게 슬쩍 다가가며 앉았다.
'오매….'
눈높이를 맞추니 더 무서웠지만, 꾹 참았다.
"편하게 해 줄게. 알아듣진 못하겠지만 지금보단 나을지도 몰라."
나지막하게 하는 말엔 내 진심이 담겼다. 나는 정말로 녀석을 도와주려는 거다.
스윽.
손을 뻗자 녀석이 몸을 움츠렸다. 내가 뭘 하려는지 몰라서 경계하는 거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어쨌든 지금보단 낫지 않겠나?
"나는 널 도와주려는 거다. 해치려는 게 아니야."
참 어려운 문제였다.
말이 통해도 맞는 사람을 찾지 못해서 40년을 솔로로 살았는데, 동물과의 소통이 쉬울 리가. 그래도 이걸 하지 않으면 우리 둘 다 여기서 죽을 것 같으니 해결책을 찾아야 했고, 그건 우리가 힘을 합쳐야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스윽.
녀석의 상처 주변으로 손바닥을 댔다.
'생각보다 부드럽네.'
워낙 무섭게 생긴 놈이라 털도 까칠할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괜찮아."
다른 말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괜찮길 바랐고, 그래서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녀석의 긴장을 풀어 주려고 애썼다. 그렇게 10분쯤 지나자 녀석이 내 손길을 피하지 않았고, 나는 한발 더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제대로 자세를 잡은 다음 화살을 내 바로 앞에 두고 녀석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이걸 뽑아볼 건데, 아플 거야. 분명, 아프겠지."
그르르르르르.
알아듣지 못해도 분위기를 느낀 걸까?
녀석이 낮은음으로 그르렁댔다.
"하지만 날 믿어 줬으면 해.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널 도우려는 거니까."
손을 화살로 가져갔다.
일단은 반응을 보려는 거다.
"…."
녀석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쪽으로 돌렸다.
뜻이 통한 걸까?
"…."
화살을 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괜찮을까?'
이거, 자살 행위 아닌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떻게든 해야 했지만, 불안감을 떨치기란 쉽지 않다.
그나마 내가 지금까지 부족한 화살 때문에 재활용하느라 사체에서 계속 화살을 뽑아 본 경험이 있었으니까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
'다행인지 불행인지 맞은 위치가 나쁘진 않아.'
등허리라고 해야 하나? 화살촉이 털가죽을 뚫었지만, 장기를 상하게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녀석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거다.
'괜히 어영부영 힘을 줬다간 고통이 더 커질 뿐일 거야.'
의사가 백날 환자한테 떠들어 봐야 고통이란 건 당사자가 가장 잘 안다. 그리고 그 고통이란 것도 매우 주관적인 감각이라서 나는 이 표범이 되어 보기 전까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단박에!'
화살을 꽉 쥐었다.
'뽑는다.'
그리곤 있는 힘을 다 주면서 화살을 뽑았다.
'됐어!'
그렇게 느꼈을 때,
크앙-!
녀석이 화들짝 놀라며 내게 그 거대한 몸을 덮쳐 왔다.
"허억…!"
이때는 진심으로 놀랐다.
놈의 커다란 아가리가 내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았다. 육중한 녀석의 체중 때문에 나는 뒤로 넘어가면서 빠져나갈 수도 없이 제압됐다.
크르르르르르.
내 얼굴 위에 바로 녀석의 입이 벌어져 있었고, 침이 뚝뚝 떨어졌다.
"…."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눈썹이라도 하나 움직이면 아주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그런데…!
할짝.
녀석의 혀가 내 얼굴을 쓸었다.
'…어?'
그러더니 녀석이 몸을 돌려 원래 자리로 돌아가선 화살이 뽑혀 나온 부위를 혀로 핥았다.
"파하…."
숨도 못 쉬고 있다가 폐에 머물던 공기를 뱉어 내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깜짝… 놀랬잖아."
잠깐이었지만 정말 잡아먹히는 줄 알았다. 얼마나 빨랐는지 반응조차 못 했다. 이게 맹수인 거다. 이게 진정한 육식 동물의 순발력이다.
녀석이 계속 상처를 핥았다.
나는 그걸 보다가 가방에서 생수를 하나 꺼내서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녀석이 상처를 핥다 말고 내게 얼굴을 들이밀더니 혀를 날름댔다.
"야, 아니야. 아니라고."
녀석의 얼굴을 손으로 밀면서 생수 마개를 따고 상처 부위에 조금씩 물을 흘려 보았다. 나도 이건 확신이 없다. 외상에 생수를 부어 본 적은 없었다.
조로록.
나는 조금씩 생수를 부었다.
상처에 물이 닿아 아플 텐데도 녀석은 마약 중독자처럼 계속 얼굴을 내게 들이밀다가 제 상처의 생수를 핥아 댔다.
"덧나! 핥지 마! 그러지 말라니까!"
핥을 때마다 상처가 더 벌어지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녀석의 입에 생수를 쏟았다.
할짝할짝!
게걸스럽게 물을 마시는 녀석을 보다가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그렇게 좋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녀석의 이마를 쓸어 주었다. 어찌 보면 이 세상에서 이 생수 맛을 아는 유일한 둘이 우리일지도 모르겠다.
"아껴야 한다고. 계속 마셔 봐야 효과도 없어."
또 한 병의 생수가 바닥이 났다.
끄으으응….
아쉬운지 입 주변을 혀로 핥던 표범이 구석으로 가서 몸을 말았다. 상처가 불편한지 몇 번 뒤척였지만 이내 눈을 감았다.
'호감도란 것 때문인가?'
자기한테 활을 쏜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 저렇게 무신경하게 잘 수 있다고?
'싸우지 않아 다행이지, 뭐.'
만약 여기서 생사혈투를 벌여야 했다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었을 거다.
'이렇게 될진 몰랐지만, 혼자보단 둘이 훨씬 낫겠지.'
나는 활을 챙겨서 내가 들어온 구멍으로 향했다. 표범이 깨지 않게 조심해서 움직였는데, 녀석은 지쳤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놀면 뭐 해.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찾아야지.'
언제까지나 여기 있을 순 없다.
식량도 별로 남지 않았고, 생수도 우물물처럼 계속 솟구치는 게 아니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 돼.'
나는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밖을 향해 머리를 내밀었다. 아까보다 물씬 어두워진 하늘이 보였다. 이제 밤이 오려나 보다.
토옥, 톡톡톡.
바람에 떠밀린 흙먼지가 벼랑을 구르는 기척 외엔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놈은 갔나?'
5분 정도 가만히 기다렸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그래도 반응이 없자 나는 상체를 완전히 구멍에서 빼냈다. 그리곤 빠르게 하체도 빼내면서 활을 들고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이제 이렇게 자세를 잡는 건 어떤 상황에서든 할 수 있을 만큼 경험치가 쌓였다.
'으음….'
빨리 나오길 잘한 것 같다. 완전한 밤이 오면 이 주변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보이는 게 있다 보니 더 절망적이다.
'내려갈 순 없어.'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높이. 여기서 떨어지면 내려가다가 돌부리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온몸의 뼈가 다 부러지고 머리도 터질 거다. 주변엔 손으로 잡거나 발을 디딜 만한 것도 없었다.
'망했네….'
쉬운 길이 없었다. 이제 하나의 차선책이 있다면 표범이 나를 도와 함께 여길 나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주변을 정찰하는데,
"…?"
이번엔 내가 먼저 발견했다.
"이런 젠장!"
약 5미터 위 절벽.
내가 아까 떨어졌던 바로 그 위치에서 섬뜩한 대가리가 하나 삐죽 튀어나왔다.
그 매였다.
"근처에 있을 줄 알았다니까!"
나는 급히 몸을 숙이며 동굴로 다이빙하듯 날았다.
푸드드드득!
순식간에 떨어져 내린 매의 발톱이 방금 내가 있던 바닥을 밟았다.
'이 자식!'
그냥 당할 순 없다. 이게 맞을지 말진 모른다. 그냥 이렇게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피잉-!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쏜 화살 하나. 휘익, 날아가더니 매의 오른쪽 날개 부근에 닿는 것 같다가 뒤로 사라져 버렸다. 깃털만 뚫은 거다.
"…!"
하지만 그래도 그게 놈에게 경각심을 줬는지 놈이 뒤로 훌쩍 뛰었을 때 나는 그 틈에 구멍으로 몸을 밀어 넣을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안으로 들어와 숨을 헐떡이다가 귀를 기울였다. 나도 바보는 아니다. 저놈이 그렇게 쉽게 포기할 것 같단 생각은 해 본 적 없다.
'화살을 아껴야겠어.'
지형이 이렇다 보니 방금처럼 빗나가면 화살을 회수할 수가 없었다.
푸드득!
놈이 밖에서 서성이는 게 느껴졌다. 언제 대가리를 밀어 넣을지 몰라서 활을 겨눈 채 기다렸다.
"…."
이 구역의 지배자라더니 과연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놈을 죽이는 것보다는 벌레를 잡아서 2~3포인트씩 쌓아 여길 나가는 게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 협곡을 탈출해야만 가능한 일.
'이게 연습이면 본게임은 대체….'
분명 활쏘기 연습이라고 하지 않았나? 어이가 없어서 할 말도 없다.
그렇게 나는 한참을 입구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
.
.
불쾌하지만 묘하게 기분 좋은 감각이 얼굴에서 들었다.
할짝!
"…?"
눈을 번쩍 떴다.
내가 잠이 들었던 건가?
"노, 놀랐잖아…."
엄청나게 큰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표범이 내 얼굴을 핥아서 깨운 거다.
"좀 괜찮냐?"
녀석의 상처를 보니 피는 멎은 것 같았다.
끄으으응.
표범이 내 가슴에 이마를 비벼 댔다. 그게 뭘 뜻하는지 바로 알았다.
"안 돼. 아껴야 한다고. 여기서 다 마셔 버릴 순 없어."
꾸우우우웅.
앞발을 모으고 불쌍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는 녀석을 보며 왠지 마음이 약해져 버렸다.
"어휴, 알았다. 하지만 이게 진짜 마지막이야. 네가 환자니까 주는 거라고."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자 녀석이 벌떡 일어나서 꼬리를 흔들었다.
'이게 개냐… 고양이냐….'
자꾸 보다 보니까 귀여운 구석도 있었다.
졸졸졸.
떡 벌어진 입에 생수를 부어 주었다. 녀석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겠다는 듯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잘도 받아 마셨는데,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나도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다.
고갤 돌려 구멍을 보니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날이 밝은 거다.
'하루 더 여기서 있다간 기력이 떨어질 거야. 반드시 오늘 나가야 해.'
【회색 산맥 표범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나는 녀석이 생수를 다 마시자 병을 치우고 밖을 향해 움직였다. 그놈이 떠나지 않았을 거란 믿음이 있었기에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상체를 밖으로 꺼내자마자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지겨운 자식."
이번엔 놈이 한눈에 보였다.
저 하늘 위에서 빙빙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멀어 보이지만 여기까지 날아오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다시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표범이 만족한 듯 앞발을 혀로 핥았다가 그걸로 얼굴을 비볐다. 세수하는 거냐?
"야, 잘 들어 봐. 밖에 괴물이 있어. 우린 저 녀석을 피해서 여길 나가야 돼."
아무리 진지하게 말한들 통할 리 없었다.
"여기 있다간 우린 굶어 죽을 거야."
무조건 오늘 나가야 했다.
"나간다고 해도 놈을 상대할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하지 않으면 지금보다 상황이 악화할 거다. 이해했냐?"
꾸웅?
녀석이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갸웃하는 걸 보면서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해야 한다고!"
버럭 지르는 고함에 녀석이 움찔했다. 그러더니 배를 깔고 엎드려서 벌러덩 누웠다.
"…."
아니, 아니, 애교 부리란 게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