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막 시위를 놓을 때였다.
콰아아아아아!
갑자기 목덜미가 서늘한 기분에 급히 머리를 숙였다. 머리칼 몇 가닥이 뭔가에 잡혀 뜯겼다.
"…?!"
내 머리를 노리고 날아온 뭔가는 곧장 표범에게로 향했는데,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펴면서 속도를 낮추고 두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저게 뭐, 뭐야? 독수리? 아니, 매라고 해야 하나?'
갈고리 같은 발톱은 식칼을 박아 넣은 것 같았다. 날개 끝에서 반대편 날개 끝까지 8미터는 넘어 보였는데, 하마터면 저 발끝에 머리를 잡혀 하늘로 끌려 올라갈 뻔했다.
'제길! 뭐가 저렇게 큰데?'
일주일 전 표범을 만났을 때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회색 산맥 포식자를 발견했습니다.】
【회색 산맥 포식자는 이 구역의 지배자입니다. 사냥 포인트 10,000p.】
【회색 산맥 포식자를 사냥하면 높은 확률로 희귀한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일… 일만 포인트?'
설마 내가 여기 온 이유가 바로 저것이었나? 차곡차곡 포인트를 모아서 나가는 게 아니라 저놈 하나만 사냥하면 끝나는 미션이라고? 아무리 '높은' 확률로 희귀한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다지만….
'망할. 아이템이고 나발이고, 일단 살고 봐야지!'
순간, 표범이 아래로 휙! 떨어졌다. 그 위를 매의 발톱이 스치고 지나갔는데, 저놈이 선회해서 이쪽으로 오면 나는 어디로 피해야 한단 말인가?
몸을 숨길 만한 곳도, 들어갈 쥐구멍도 없으니, 저 표범도 뛰어내린 거 아니겠나? 살려고!
"×발!"
나는 순간 아래를 내려다봤다.
"으으으…."
저 아래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개활지에서 매의 공격을 받으면 필패라 할 수 있었다. 보병과 전투기의 싸움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화아아악!
매가 저쪽으로 날아갔다가 몸을 돌렸다.
선회하는 매의 모습이 그렇게 섬뜩할 수가 없었다.
'놈이 노리는 게….'
분명 나였다.
뛰어내린 표범을 노렸다면 저 대가리가 아래로 향했을 거다.
바바바바바박!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써서 달렸다.
표범처럼 몸을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
펄럭!
매의 날개가 움직였다.
놈은 한 번의 날갯짓만으로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을 거다.
'저기까지 갈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이래서 그 토끼들이 이쪽으론 절대 오지 않으려고 한 거다. 여기 깡패가 있는데, 뭘 믿고 들어오나?
후우우웅!
놈에게서 바람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젠장, 저렇게 큰 매가 세상 어디에 있나? 표범조차 쉽게 찢어발길 수 있을 것 같은 덩치의 매.
놈이 점차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냥… 당하진 않는다고!"
나는 뛰면서 활을 치켜들었다.
아무리 크고 무서워도 결국엔 살아 있는 생물이란 건 변함없는 거다.
20미터, 10미터!
빠르게 우리의 거리가 줄어들 때, 나는 시위를 놓았다.
"…!?"
놈은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급히 얼굴을 틀었다. 놈의 부리에 화살촉이 정확히 맞았지만,
팅!
안타깝게도 그대로 튕겨 나갔다.
그나마 화살이 놈의 방향을 틀게 했는데, 그 덕에 나는 녀석의 발톱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 앞으로 내달릴 수 있었다.
내가 있던 자리를 저공 비행하며 뒤로 날아갔던 매가 땅에 착지했다. 그리곤 다시 나를 쫓아 날았다.
"쳇…."
명중할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저게 다라니. 그나마 약간의 시간을 벌었지만, 눈앞이 캄캄해진다.
"…흐읍…."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한 절벽이다.
듬성듬성 뻗은 나무들이 있지만, 그걸 잡긴커녕 맞으면 뼈가 부러질 거다.
이때였다.
'꼬리!'
5미터쯤 아래에 표범의 꼬리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까 살짝 튀어나온 곳이 있었고, 표범도 그쪽으로 숨은 것 같다.
'방법이 없어.'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뒤도 돌아볼 새 없이 나는 몸을 아래로 내리며 손으로 벼랑 끝을 잡았다. 그리곤 놓아 버렸다.
후욱!
중력이 내 몸을 누르는 기분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꼈다. 돌부리가 얼굴을 할퀴었지만, 몸을 틀진 않았다.
'닿아라! 닿아!'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지나간 것 같다. 그게 뭔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뭔가 발에 닿는 기분에 나는 곧장 엎드렸다.
'크윽!'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충격이 상당했지만, 머뭇거리다간 매의 발톱이 등을 찢어발길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역시! 있었어!'
나는 네발로 기듯 앞으로 튀어 나갔다. 뭘 가리고 자실 게 없다. 지금 살려면 저 앞의 구멍으로 들어가야 한다.
'좁아.'
일단 그래도 몸을 들이밀 순 있을 것 같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슬라이딩하듯 그대로 밀어 넣었다.
"…!"
'이런 빌어먹을!'
저 구석에서 몸을 말고 웅크리고 있는 놈이 보였다. 지독한 짐승의 냄새에 정신이 어질할 정도였지만, 활을 들고 놈을 겨누면서 몸을 더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때마침 뭔가가 밖에서 빛을 가렸다.
화르르륵!
날개를 접는 소리가 난다.
매가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거다.
"…."
밖엔 이 구역의 지배자가 있다.
안엔 표범이 두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걸 엎친 데 덮쳤다고 하나?
끼이이잉….
그나마 표범은 나를 공격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일단 몸에 박힌 화살 때문에 불편해 보였고, 밖의 매 때문에 의지가 꺾인 것 같았다.
"…."
나는 활의 방향을 바꿨다.
만약 매가 대가리라도 밀어 넣으면 쏴 버릴 생각이다. 이때 만약 표범이 달려든다면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겠지만,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표범은 전투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두근두근.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순간.
숨죽인 채 눈동자만 굴리는 그때,
펄럭-!
다행히 매는 더 머물지 않고 날아 버렸다.
"휴우…."
나도 모르게 숨이 내쉬어졌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나는 급히 활의 방향을 바꾸며 표범을 경계했다.
끼잉… 낑.
그러나 다행히 표범은 아픈지 자릴 바꾸며 몸을 동그랗게 말았는데, 삐죽 솟은 화살이 거치적거리는 것 같았다.
그제야 털썩.
"하아…."
표범을 향해 들었던 활을 조금 내리며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너나 나나…."
여기 갇혀 버렸다.
저 녀석이야 몸 상태가 괜찮으면 이런 절벽은 훌쩍 기어 올라가겠지만 나는 이제 어쩌나.
살았다는 안도감과 막막함이 몰려왔다.
"…."
나간다고 해도 벽을 기어오를 수 있을까? 아래로 가면 어디로 가나? 가장 큰 문제는 매가 그런 나를 가만히 놔둘까?
그렇게 어색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
.
.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잠들었나?'
새근새근 들려오는 숨소리가 규칙적이다. 나는 표범을 앞에 두고 잠을 잘 수 있을 만한 강심장은 아니었기에 계속 정신을 부여잡고 있었건만, 저 녀석은 아닌가 보다.
'어쩌지.'
나가서 정찰을 해야 할까? 그러다가 내 뒤를 저 표범이 덮치면? 오만가지 상상이 다 들었다.
그런데 이때,
"…."
꼬로록. 배가 고파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배가 고프다니. 정말 서글프다.
나는 활을 앞에 슬며시 내려놓았다. 언제라도 다시 들 수 있게 긴장하면서 가방에 손을 넣었다.
기척 때문인지 표범이 슬며시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밤이 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저 녀석이 나를 공격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적.
나는 초코바를 하나를 뜯어 입에 넣었다. 이런 열량 높은 음식을 위주로 챙겨 왔는데, 정말 잘한 것 같다. 단맛이 확 퍼지자 몸이 노곤해졌다.
'몇 개 안 남았네.'
생명 줄이나 다름없는 생수와 몇 종류의 드링크가 있었기에 가방을 음식으로만 꽉 채울 수는 없었다. 가방을 뒤적이며 다시 재정비를 하며 생각했다.
【시력 향상 드링크.】
【은신 드링크.】
'이걸 어떻게 쓰면 좋을까?'
지난번 구울 사냥에서 얻은 아이템들이다.
【은신 드링크: 30분 동안 기척을 숨길 수 있다.】
【시력 향상 드링크: 30분 동안 시력이 월등히 높아진다.】
넉넉하진 않지만 배도 채웠겠다, 이제 머리를 굴려야 했다.
'은신 드링크를 마시면 30분은 안전해진다는 거겠지?'
아깐 경황이 없어서 이걸 떠올리지도 못했다. 아까 매를 보자마자 마셨어야 했는데. 후회가 밀려오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마시고 절벽을?
나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30분 안에 이곳을 벗어나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은신이 풀리는 순간, 놈이 저 하늘 위에서 나를 발견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일 테니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
문득 앞을 보았다.
표범이 축 늘어졌다.
하악, 하악-! 숨을 몰아쉬었는데,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으음…."
갈등이 머리를 휘저었다.
활을 들고 녀석의 목에 정확히 쏘면 놈은 저항도 못 하고 죽을 거다. 그러면 무려 5,000포인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하아악. 하아악.
더 거칠어지는 놈의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오히려 갑갑해지는 건 나였다. 왠지 내 미래 같지 않나….
"미치겠네…."
가방에서 생수를 한 병 꺼냈다.
이게 될지 안 될지도 모른다. 생수는 피로 회복엔 좋지만, 외상에 효과가 있는 것 같진 않았으니까.
살금.
생수를 들고 표범에게 다가갔다. 혹시 몰라서 가방에서 꺼낸 칼을 오른손에 쥐었다.
"도와주려는 거니까…."
피가 바짝바짝 말랐다.
내가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 두툼한 발을 보라.
내가 든 칼보다 날카로운 발톱이 숨어 있을 것이다. 바닥에 처박힌 얼굴이 불쌍했지만,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이빨은 오싹하기만 하다.
"좋게… 좋게… 가자."
언제든 뒤로 물러날 수 있게 엉덩이를 뒤로 빼고 생수병만 녀석의 머리 쪽으로 들이밀었다. 그리곤 조금 흘렸다.
"…!?"
놈이 화들짝 몸을 틀었다.
"흐읍…."
나도 놀라서 뒤로 물러났는데, 녀석은 혀를 타고 흘러든 생수에 곧장 반응했다. 흐리멍덩하던 눈동자가 또렷해졌고, 나를 향해 으르르렁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
나는 칼을 단단히 쥐었다.
늑대와도 맨몸으로 싸워 본 나다. 쉽게 당하진 않는다! 그런 투지로 슬금슬금 엉덩이를 뒤로 밀었다. 활을 잡으려는 거다.
그런데 표범이 먼저 움직였다.
끼잉.
그 큰 대가리를 쑤욱 내 쪽으로 내밀더니 입을 벌렸다. 나를 물려고 하는 게 아니다.
"…더 달라고?"
혀를 날름거리면서 앞발을 모아 엎드린 녀석은 갈구하는 눈으로 내 손에 들린 생수병을 바라보았다.
'하긴, 이게 강렬하긴 하지.'
나도 생수를 처음 먹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약도 이런 효과는 못 낼 거다.
"…줄 테니까 물지 마라…."
갑자기 손을 콱 물어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절로 들 만큼 표범은 존재감이 강력했다.
꿀꺽!
절로 넘어가는 침을 느끼면서 녀석의 입으로 생수를 흘렸다.
졸졸졸.
흘러내리는 생수가 녀석의 혀에 닿았다. 꿀꺽, 꿀꺽. 녀석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생수 한 병이 금세 동나 버렸다.
"없어. 다 먹은 거라고."
빈 병을 흔들어 보이면서 뒤로 물러나자 녀석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다가 몸을 돌려 다시 웅크렸다.
그런데 이때,
놀라운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회색 산맥 표범이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뭐, 호감?'
【호감도가 증가하면 대상을 길들일 수 있습니다.】
【길들인 생물은 귀속됩니다.】
'길들여?'
그게 가능해?
표범을 보면서 심장이 쿵쾅댔다. 개나 고양이도 아니고 저렇게 큰 야생 표범을 펫처럼 만들 수 있다는 건가? 그게 말이 돼?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데, 녀석이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머리를 뒤틀었다. 그러더니 화살이 꼽힌 부위를 혀로 핥았다.
끼이이이잉.
그리곤 아픈지 신음을 냈다.
"…."
그걸 보면서 나는 불현듯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혹시… 할 수만 있다면, 여길 나갈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