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화
'으윽….'
하지만 토끼는 빨랐다.
아니, 정말 빨랐다.
맞았다고 생각했지만, 휙! 지나가는 토끼 꽁무니 뒤로 화살이 날아가 처박혔다.
급히 화살을 하나 더 꺼내 시위에 먹였다.
그리곤 이어지는 출살!
"아…."
그러나 이번에도 화살은 명중하지 않았다.
토끼는 일정한 패턴으로 뛰지 않았다. 요리조리 잘도 피해 가면서 고기를 향해 질주했는데, 가장 먼저 도착한 놈이 고기를 낚아채자 다른 놈들은 그 토끼를 향해 뛰어갔고, 우르르 구멍을 향해 사라져 갔다.
"…이거."
장난 아니다.
이놈들이 이 정도로 날랠 줄이야.
'계속해 보는 수밖에.'
하지만 한 번 실패했다고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고기를 뜯어내면서 몇 번 더 할 수 있는지 가늠해 보았다.
'꽤 넉넉하니까 아껴서 하면 100번 정도는 될 거야.'
여차하면 내 가방 속 음식물로도 놈들을 낚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남겨 두는 편이 좋다.
'무작정 던져서도 안 돼.'
나는 주변을 넓게 보았다.
그러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놈들은 구멍에서 나와서 구멍으로 돌아가는 패턴이야.'
한 번 봤다고 놈들이 우르르 뛰어다니는 모습이 머릿속에 시뮬레이션처럼 그려졌다.
'포인트를 잡고 노려야 돼.'
한참을 걷다가 멈춰 섰다.
'그래, 여기라면….'
구멍에서 너무 멀면 토끼들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당히 엄두를 낼 수 있는 거리이면서도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위치.
'두고 봐. 반드시 잡는다.'
다섯 걸음 물러서면서 각오를 다졌다.
.
.
.
내 토끼 사냥은 쉽지 않았다.
무려 50번 넘게 시도했지만, 토끼는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놈들이 얼마나 빠른지 고기를 던진 뒤로 내가 쏠 수 있는 화살이라고 해 봐야 3발이 전부다. 그 이상 억지로 쏴 봐야 도주하는 놈들을 맞힐 순 없었다. 활을 연속해서 50번을 쏘는 것에 대한 체력적인 부담은 없었지만, 정신력이 극도로 소비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낄낄!
-낄낄…!
놈들이 먼 구멍에서 튀어나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50번 정도 하다 보니 이제 놈들의 숫자가 정확히 파악됐다.
24마리.
토끼들도 나를 학습했는지, 아니면 내가 자기들을 절대 맞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한 놈은 멀지 않은 곳에 늘어지게 누워 나를 보며 고기를 씹고 있었다.
"짜증 나…."
나도 모르게 마음이 튀어나왔다.
놈들의 비웃음이 이골이 날 법한데도 저런 모습을 보면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후…."
그렇지만 놈들에게 휘말려선 안 된다.
빠르게 호흡을 가다듬고 뭘 해야 하는지 눈으로 가늠했다.
'놈들이 방심하는 지금이 기회야.'
앞으로 50번은 더 미끼를 쓸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패턴으론 놈들을 맞힌다는 건 우연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애초에 내 실력으로 저렇게 빠르고 변칙적으로 뛰는 토끼를 사냥한다는 게 불가능했던 거다.
지익.
고기를 찢었다.
한 조각 슬쩍 먹고 싶었지만, 그만큼의 기회를 날린다고 생각하니까 먹지도 못하겠다. 식욕보다는 놈들에 대한 분노가 더욱 컸으니, 이 정도를 못 참으랴!
"스으으으읍, 하아아아."
남은 고기를 가방에 넣고, 한 줌 크게 쥔 고기들을 놈들이 보란 듯이 흔들었다.
-낄낄!
-낄낄낄낄!
-낄낄!
그러자 놈들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이제 저놈들에게 나는, 먹이 주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녀석들의 들썩이는 엉덩이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나는 고기 한 뭉치를 쥔 손을 뒤로 뺐다. 원랜 여기서 하나씩 던지며 사냥을 했었지만, 이번엔 내가 노리는 게 있었다.
"와라! 이 자식들아!"
화아아악!
날아가는 고깃덩어리들이 허공에서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말린 거라지만 1개가 날아갈 때와 10개가 날아가는 건 전혀 다른 비주얼이었고, 녀석들에겐 황홀한 고기 파티가 될 것이다.
-낄낄?
-끼끼끼이이이!
놈들도 당황했는지 눈이 더 커진 것 같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광견병 걸린 개들처럼 폭주하며 동시에 고기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혼란, 그걸 유도할 수밖에 없다.'
한 마리의 토끼를 노리면 힘들겠지만, 여러 마리가 한곳에 모여 각축을 벌이면 그중에서 반드시 멍청한 놈 하나쯤은 나올 것이다.
'차분히….'
놈들은 광기에 물들었지만, 나는 신중히 활을 들었다. 그리곤 화살촉을 한 곳으로 겨냥했다.
내가 던진 고기는 10개.
토끼는 24마리다.
지금까지 50번을 감질나게 뛰었던 놈들에겐 진수성찬이 차려진 것과 마찬가지. 조금만 노력하면 두 마리중 한 마리는 원하는 걸 입에 물 수 있었으니, 놈들에겐 상당히 높은 확률의 도박이 될 것이다.
'눈이 뒤집혔구나.'
고기 하나에 전력으로 뛰어가는 토끼는 굉장히 빨랐다. 무려 10개의 고기다 보니, 토끼들은 자기가 노리던 고기가 없어져도 다른 쪽으로 급히 방향을 틀었는데, 이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한곳으로 더 많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노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지난 50번의 반복 학습이 놈들을 안전하다고 느끼게 한 것 같다. 씁쓸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내가 그만큼 무능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내가 노린 수!
'여기까지다.'
나는 한 놈을 포착했다.
처음 점찍은 고기를 다른 놈에게 빼앗기고 다른 고기를 향해 뛰다가 그마저도 실패한 불쌍한 놈이 우물쭈물하다가 마지막 남은 고기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본래라면 고기가 없어지면 다들 도망치기 바빴는데, 10개나 되는 고기에 욕심이 생긴 것이다.
투욱.
화살이 날았다.
스아아아아아악.
은밀한 비수처럼 날아가는 화살이 놈에게로 다가가는 1초 남짓한 시간이 왜 이리 더디게 느껴지는 건지!
'아, 조금 높았나?'
이대로면 화살이 놈의 등을 스치고 뻗어갈 것 같아 다음 화살을 준비하려는 그때였다.
퍼억!
-꽤애애애애애액!
엎드려 네발로 뛰다가 멈춰서 대가리를 치켜드는 바람에 등에 정확히 화살을 맞은 한 놈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200p의 사냥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미션 완수까지 9,800p 남았습니다.】
"아자아아아아!"
그간의 울분이 한 방에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낄?
-낄낄!
-낄낄낄?
토끼들도 비명을 듣곤, 단체로 움찔했다.
'이크, 숨어 버리려나?'
쓰러진 토끼를 향해 뛰어가면서 동태를 살폈는데, 놈들은 잠깐 고개를 갸웃하더니 언제나처럼 고기를 물고 구멍으로 쏙쏙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기를 못 먹은 놈들이 나를 향해 대가리를 흔들어 댔다. 또 던지라는 신호였다.
'동료가 죽은 것 따윈 상관도 없는 거구나.'
낚싯바늘에 걸렸던 물고기를 풀어 주면 다시 또 바늘에 걸리는 것처럼 이놈들도 동료가 죽었는데 그건 관심도 없어 보였다.
'뭐, 나한텐 잘된 일이지만.'
쓰러진 토끼의 몸에서 화살을 뽑았다. 그리곤 토끼를 확보해서 비교적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갔다. 말이 토끼지 몸통은 여우처럼 커서 무게가 상당했다.
'저놈들이 빼앗아 갈 수도 있어. 닿지 않는 곳에 둬야 해.'
몇 시간의 사냥 끝에 처음 잡은 토끼.
놈들이 육식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설마 나무 위론 못 올라오겠지?'
토끼굴이 있는 지역을 살짝 벗어나 큰 나무 아래로 온 나는 저쪽을 바라보았다. 23마리 토끼가 죄다 밖으로 나와선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기울어진 나무를 밟고 올라서서 토끼를 가지에 걸쳐 놓았다. 근력과 순발력, 체력 덕분에 나무 오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좋아, 이제 한 마리.'
200포인트를 벌었다.
하지만 여기서 나가기 위해 9,800포인트를 더 벌어야 한다. 저놈들을 다 잡으면 절반 정도는 포인트를 채울 수 있겠지만, 남은 미끼가 별로 없다는 게 함정이었다.
'이렇게 소모하는 게 맞을까?'
잠깐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다.
나는 가방에서 고기를 꺼내 찢었다.
'이번엔 7개만 던지자.'
점점 줄어드는 고기를 보며 나는 다시 마음을 다졌다.
'방금은 운이 좋았던 거야. 더 아래를 노리고 쐈어야 해.'
본래 활은 과녁에서 더 높은 곳을 조준하고 쏴야 한다. 그래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가 떨어지며 명중하는 거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거리와 바람, 힘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활이란 무기가 어려운 이유였다.
활이 목표물이 아닌 바람과의 싸움이라는 말도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그나마 내겐 두 가지 스킬이 있었다.
명중률 상승과 바람 무시.
이 두 가지 덕분에 내 화살은 물리적 법칙을 다소 무시하면서까지 날아가 주니 분명 도움이 되었다. 내가 300미터 이상 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힘으로 커버하면서 토끼를 향해 쏘면 다른 궁사들보단 훨씬 영점을 잡기 쉽단 얘기다.
물론 그렇다고 빠르게 움직이는 토끼를 맞힌다는 게 쉽다는 건 아니었지만….
'남은 고기로 최대한 많이 사냥해 보자.'
고작 이만큼 고기를 주고 미션을 끝내란 건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게다가 토끼는 24마리뿐이다. 이걸 다 잡는다고 해도 만 포인트가 안 된다.
그 말은 즉 다음이 있다는 거다.
"밥 먹자… 이 망할 놈들아."
나는 아까 있던 자리로 돌아와서 놈들을 향해 팔을 치켜들었다.
들썩들썩!
자동차 경주에 앞서 시동을 거는 고성능 자동차들처럼 놈들의 엉덩이가 쉴 새 없이 움직일 때, 또다시 고깃덩어리가 하늘로 날아올랐고, 붕-! 뜬 상태에서 흩어졌다.
그것들이 떨어져 내리기도 전, 토끼들의 질주가 시작됐다.
-끼기기기기기!
-낄낄낄!
-끼이일!
우두두두두두!
초원의 얼룩말 떼가 달리는 것처럼 토끼들이 몰려왔다.
'좋아.'
한번 사냥해 봤다고 자신감이 붙었다.
'이번엔 저놈이다.'
스아아아아악!
화살이 날아갔다.
하지만 두 번의 운은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놈의 옆으로 스친 화살이 멀리 날아가 땅에 박혔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고, 다음 화살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곧장 시위를 놓았다.
티잉!
아직도 방황하는 토끼들이 있었다. 놈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면 사냥은 더 어려워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놈들은 오로지 고기를 향해 시선이 쏠려 있었다.
퍼억-!
"좋았어!"
한 녀석의 옆구리에 정확히 박힌 화살은 몸을 뚫고 반대로 촉이 튀어나왔다.
-꾸애애애애액!
【200p의 사냥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미션 완수까지 9,600p 남았습니다.】
왜 토끼가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는진 모르겠지만, 연속으로 사냥에 성공한 나는 쾌재를 불렀다.
"이거지!"
고기 17개로 2마리를 잡았다.
다음번엔 고기를 다섯 개로 줄여 볼까 생각하면서 토끼의 몸에서 화살을 뽑아냈다. 그 이하로 줄이면 틈을 유도하기 어려울 것 같다.
어느새 고기를 문 놈들은 구멍으로 돌아갔다. 실패한 녀석들은 다른 구멍 앞에서 나를 보며 울어 댔다.
-낄낄!
-낄낄낄!
빨리 더 달라는 뜻이었다.
저게 운다고 해야 할지, 웃는다고 해야 할진 모르겠다.
'최소 5마리.'
남은 고기가 많진 않으니 한계점이 보였다. 그나마 토끼가 꽤 커서 활용도가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이 토끼로 다른 놈을 사냥하는 그런 패턴일 수도 있으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토끼만으로 1만 포인트를 모으는 건 불가능하다.
'머리를 잘 써야 돼.'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미션의 성패가 갈릴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토끼를 들었다.
놈들이 노릴 수 있으니, 아까처럼 저쪽 나무 위로 올려놓아야겠다.
묵직한 토끼를 들고 걷는 그때였다.
-끼이이이이익!
묘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여태까지 들리던 낄낄! 웃는 소리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뭐야?'
어찌 된 일인지 토끼들이 전부 구멍 속으로 숨어 버렸다. 좀 전까지만 해도 밥 달라고 아우성치던 녀석들이 단 한 놈도 머리를 내밀지 않았다.
마치 겁이라도 먹고 도망친 것마냥….
"…?"
황당해서 머리를 돌리는데,
'저, 저게… 뭐야?'
나 역시 토끼들처럼 본능을 느꼈다.
아까 내가 토끼를 걸어 둔 나무 아래.
짙은 회색의 커다란 무언가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젠장.'
보자마자 알겠다.
내가 잡아야 할 것이 토끼가 아니라 저것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