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만 포인트라니….
도대체 얼마나 잡아야 한다는 거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움직여야겠다.
'방향을 측정할 수가 없으니 정찰을 하며 우선 주변을 익혀야겠어.'
이젠 지독히도 불친절한 재능마켓에 익숙해졌다. 내 힘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뭐든 해 봐야 한다.
활을 단단히 쥐고 일정한 속도로 나아갔다. 일단은 저 오두막을 중심으로 돌아볼 생각이었다.
'사냥이라….'
생각해 보면 활을 지정한 게 잘됐을지도 모른다. 아직 칼을 휘둘러서 무언가를 죽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그나마 원거리에서라면 부담이 덜할 테니까.
요는 화살이 목표에 맞느냐지만.
'스킬을 얻었으니까 전보단 확실히 도움이 될 거야. 게다가 이런 넓은 곳에서도 마음껏 연습해 보고 싶었었잖아?'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이전의 삶에선 어느 순간 무기력해져서 그걸 잊고 살았었다.
더 걸었다.
이곳은 해발 1,000미터 이상 올라온 산등성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나무는 별로 없고, 식물들도 듬성듬성 나 있어서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었는데,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보이면 망설이지 말고 활을 쏴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뭐가 있긴 한가?'
하지만 뭐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뭐가 보여야 잡지 않겠는가?
이왕이면 무난하게 토끼나 사슴 같은 게 나오면 좋겠지만, 갑자기 구울 같은 게 튀어나올 수도 있었으니 마음을 놓아서도 안 된다. 아니, 그보다 더한 게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그렇게 50미터쯤 더 전진했을까?
'뭐지?'
분명, 뭔가가 저 앞에서 움직였다.
나는 주의력을 높이며 더 앞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이상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구멍?'
정확히 말하면 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 크진 않았는데 군데군데 작은 구멍들이 있었고, 뭔가가 그리로 드나드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히 자세를 낮추고, 활을 겨눴다. 아까 그 정체불명의 뭔가가 어디서 나올지 모르니 준비는 해 두어야겠다.
'정말 토끼인가?'
못 보고 넘어갔다면 모르겠지만, 분명 뭔가가 움직이는 걸 본 이상 지나칠 순 없었다.
휘이이이이이잉.
5분쯤 지났을까?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추위 내성이 발동했습니다.】
스킬이 아니었다면 몸이 부들부들 떨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나마 아직까지는 견딜 만했고, '바람 무시' 스킬도 얻었으니 해 볼 만하다.
'먼 구멍은 포기하고, 가까운 것만 공략하자. 반드시 나올 거야.'
통로가 여럿인 걸 보면 무척이나 예민한 녀석임이 분명하다.
'내가 떠나길 바라고 있겠지만….'
놀랍게도 나는 뭐 하나 잘하는 게 없는 삶을 살았지만, 참는 거 하난 잘했다. 참아야만 이 혹독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인내심 하면 또 나다.
'30분쯤 됐나?'
더 기다렸다.
이렇게 포기하기엔 기다린 시간이 아깝다.
'뭔지 확인은 해야지 안전해.'
사냥에 실패하더라도 저 구멍 속에 있는 게 위험 요소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앞으로 마음 편히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휘잉.
찬 바람에 코끝이 찡하게 시려 왔다.
손을 올려 코를 매만지려는 그때, 나는 멈칫 동작을 멈췄다.
'나왔다!'
15미터쯤 떨어진 곳.
바닥에서 무언가가 쑤욱 올라왔기 때문이다.
'토끼? 아니야, 여우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이상하게 생겼는데….'
머리는 토끼처럼 귀가 크고, 털이 복슬복슬하다. 몸통은 개나 고양이처럼 길고 컸는데, 회색빛 털을 지녔다.
한데, 더 괴상한 점이라면….
'뭐야, 저 송곳니는.'
턱까지 자란 송곳니가 섬뜩했다.
이때였다.
【회색 산맥 육식 토끼를 발견했습니다.】
【회색 산맥 육식 토끼는 매우 포악합니다. 몸놀림이 재빠르고 주로 굴을 파고 생활합니다. 사냥 포인트 200p.】
【식용으로 사용하면 매우 좋은 재료입니다.】
【털가죽은 보온성이 뛰어납니다.】
'저게 토끼라고?'
진돗개까진 아니어도 중형견 정도의 몸집을 가졌고, 딱 봐도 이빨 때문인지 무섭다.
'어쨌든 200포인트면 나쁘지 않아.'
고블린이 50이었는데, 저 녀석은 200포인트다. 50마리만 잡으면 미션을 완료할 수 있다는 뜻이다.
'생각보다 이 미션은 쉽게 끝낼 수 있겠는데?'
하지만 이 생각이 오만이었다는 걸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쌔애애애애애액!
내 첫 화살이 토끼를 향해 날았다.
'좋아! 그대로만 가라!'
【명중률이 상승했습니다. 목표를 좀 더 정확하게 맞힐 수 있습니다.】
【바람을 무시합니다.】
두 가지 스킬을 업은 화살은 빠르게 토끼를 향해 날아갔다. 화살이란 게 무척이나 은밀하고 빠른 무기다. 인식하면 이미 화살촉은 몸에 박혀 들고 있어야 한다.
쫑긋.
저놈의 귀가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면 말이다.
"흡…?"
나는 황당해서 몸을 일으켜 놈이 있던 구멍으로 걸어갔다. 화살이 닿기도 전, 토끼는 금세 그걸 포착하고 구멍으로 쏙 들어가 버린 것이다.
"엄청 빠른데?"
목표를 잃고 나뒹군 화살을 집어 들며 아까 토끼가 나왔던 구멍으로 걸어가서 그 안을 보았다.
"…."
깊이 숨어 버린 녀석이 보일 리 없다.
그런데 이때,
아주 기괴하고, 오싹한 소리가 구멍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낄낄낄.
"에?"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소름이 좌악 돋는다.
그런데,
"…?"
뭐지?
-낄낄낄…!
분명 앞에서 나던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온다.
나는 고갤 홱 돌렸다.
"…이런…."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5미터쯤 앞 구멍에서 토끼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대가리만 구멍 밖으로 삐죽 나와 있었는데, 놈의 주둥이가 살짝 벌어지자,
-낄낄!
비웃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나왔다.
"뭐 저런 자식이…."
놀림거리가 된 것 같아서 재빨리 활을 겨눴지만, 놈은 다시 구멍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다.
"하…."
동물은 모르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전의 고블린이 소총 앞에서 의기양양하다가 죽은 것도 총의 화력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토끼는 내가 활을 들자마자 숨었다. 이 경우엔 두 가지 가정밖에 없었다. 활이란 무기를 알고 있거나 지나치게 경계가 심하다는 거다.
'근데, 비웃었냐, 지금?'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걸 꾹 참으며 다시 주변 구멍들을 탐색했다.
'나오기만 해 봐라.'
놈의 귀나 털이 보이면 바로 쏴 버려야겠다. 이미 놈의 눈이 나를 보면 그때는 가망이 없다고 봐야 했다.
-낄낄! 낄낄낄!
"…."
사방에서 들려오는 괴상한 소리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송곳니 달린 육식 토끼가 내 주변을 얼쩡거리며 비웃고 있다니? 심지어 저 웃음소리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섬뜩하다.
'아….'
불현듯 나는 깨달았다.
이런 놈들을 사냥해서 만 포인트를 모으라고?
'이게 훈련이구나….'
나는 탄식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낄낄! 낄낄낄!
놈들의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질 때.
'넌 무조건 내가 잡는다.'
나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좀비, 구울, 고블린 같은 것들도 상대했는데, 육식 토끼쯤이야.
'근데 저걸 어떻게 잡지?'
놈이 꽤 잽싼 걸 보면, 이런 식으론 놈의 꼬리도 잡지 못할 것이다.
움찔!
무심코 보던 구멍에서 다시 놈이 얼굴만 내밀었다.
"…."
"…."
거리가 꽤 멀었기에 이번엔 활을 겨눌 수 없었다. 놈의 앞발이 주둥이로 향했다.
그러더니 또 웃는다.
-낄낄!
아주 재수 없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악당처럼 나를 관찰하던 녀석은 다시 쏘옥 모습을 감춰 버렸다.
'미친….'
뭐 저런 게 다 있나?
이대론 저놈에게 농락당하는 꼴이었다.
기발한 방법이 필요하다.
'불을 피워?'
아…. 라이터가 없다.
담배를 안 피우는 게 속상할 지경이다.
'다음엔 꼭 챙기자.'
안일했다. 인간에게 불이 얼마나 중요한데 가방에 라이터 하나쯤 넣어 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니!
'아냐, 연기로 안 먹힐 수도 있는데 후회는 말자. 다음을 대비하면 돼. 그러면 뭐가 있을까….'
나는 스스로의 부실함을 다독이며 다른 방법을 구상해 보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활은 계속 겨누고 있었는데, 혹시 가까운 구멍에서 기척이 느껴지면 바로 쏠 요량이었다.
하지만 놈도 바보가 아니었나 보다.
쏘옥!
또 먼 구멍에서 나타나더니 이번엔 몸까지 다 빠져나와서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젠장…."
고작 토끼한테 농락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팍팍 깎여 나갈 때였다.
꼬로로록.
배에서 신호가 왔다.
그러고 보니 배고플 때가 됐다. 밤새 신문을 돌리고 여기로 곧장 왔으니 뭐라도 먹어야 했다. 녀석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가방을 뒤적여 먹을 것을 찾았다.
그런데,
'…어?'
바구니에 있던 말린 고기가 손에 잡혔다.
'맛이 괜찮으려나.'
내가 따로 챙겨 온 걸 소비하긴 아까우니 그냥 이거라도 좀 먹어 봐야 하나 생각할 때였다.
주욱.
몇 조각 떼서 입에 넣으려는데, 어라? 나보다 먼저 저쪽에서 반응이 왔다.
-낄낄…!
태연하게 앉아 있던 녀석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엉덩이를 흔들며 비웃고 있었다.
'설마?'
놈의 이름을 다시 떠올려 본다.
'육식 토끼!'
방한복과 말린 고기는 일종의 보급품이었다. 그렇다면 다 이유가 있는 거 아니겠는가?
'이게 미끼였던 건가?'
죽으란 법은 없다고 놈을 유인할 방법이 생겼다.
'어디 보자….'
놈이 아직 저쪽에 있었다.
'이쯤에 하나 흘려 봐?'
나는 들고 있던 말린 고기를 조금 찢어서 발치에 일부러 떨어뜨렸다.
그리곤 모른다는 듯 말했다.
"으으…. 추워. 저쪽이 나으려나."
일부러 팔로 몸을 감싸며 옆으로 이동했다. 놈의 눈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동요하고 있어!'
몸이 움찔움찔하는 게 확실히 보였다. 솟은 귀도 사정없이 흔들렸다.
'와라!'
10미터쯤 이동해서 놈을 빤히 바라봤다. 고기를 가져가려면 이쪽 구멍으로 나와서 3미터는 이동해야 했다. 내겐 그때가 기회일 것이다.
조심히 물러나며 활을 꽈악 쥐곤 기회를 엿보았다.
이번엔 반드시 잡으리라.
그런데….
내 계획은 바로 틀어졌다.
"허억…?"
바바바바박!
다른 놈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저건 또 뭐야!?"
이건 상상도 못 한 전개였다.
저쪽 놈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기에 다른 구멍에서 나온 놈이 고기를 낚아챌 거라곤 예상조차 못 했다.
'두 마리였나?'
하긴 이 근처에만 구멍이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데, 한 놈이라고 여긴 게 실책이었다.
'젠장.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다른 놈이 있다는 걸 확인했고, 고기도 남았으니까 다시….'
이번엔 꼭 잡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고기를 잘라 슬쩍 떨어뜨리려고 하는데,
"…!?"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구울 떼에게 쫓길 때보다 더 어이가 없는 장면이었다.
'이… 이렇게 많아?'
-낄낄낄.
-낄낄!
-낄낄낄낄!
언제 저렇게 나왔을까?
먼 구멍들에서 동그란 머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웃고 있었다.
그게 귀엽다는 건 절대 아니다.
저 송곳니를 보면 입이 바싹 마르니까.
'열 마리는 넘겠는데?'
내게 고기가 있다는 걸 파악했는지 놈들은 낄낄대며 나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는데, 밖에서 보면 완벽하게 포위된 형국이었다.
'두더지 게임처럼 무작정 시작해 봐야 하나?'
저렇게 많은데 말린 고기로 유인해서 활을 쏘다 보면 한 마리쯤은 맞지 않을까?
일단, 놈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해야겠다.
일부러 고기를 떼어서 저 앞으로 휙! 던졌다. 그러면서 활을 겨눴다.
'참지 못하는 놈이 반드시 나올 거야….'
한 놈만 걸려라! 라는 생각으로 시위를 힘껏 당겼을 때,
-끼끼끼끼끼끼!
-끼이이이이!
-낄낄낄!
놈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허엇?"
한데, 이게 뭐야!
열 마리가 아니었다.
숨어서 간을 보던 녀석들까지 죄다 튀어나오고 있었는지 순간적으로 20마리까지 불어났는데, 그놈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무섭기까지 했다.
'빨라!'
고기를 향해 질주하는 놈들을 향해 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그그그으극!
팔이 한껏 뒤로 벌어지고, 그 힘을 고스란히 받은 시위가 끊어질 것처럼 팽창했다.
'진정해.'
어차피 한꺼번에 다 잡을 순 없다. 정확히 한 놈만 노려야 한다.
"스으으으으읍."
숨을 몰아쉬고 호흡을 멈춘 뒤, 나는 시위를 토옥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