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화
내겐 필라테스 이용권 2장이 있다.
지난 시간 나는 스쿼트와 팔 굽혀 펴기에 성공해서 지력과 체력을 따냈었다.
【필라테스 이용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귀하에게 허락된 종목은 두 가지입니다.】
【철봉 오르기 10,000회. 하강 시 팔꿈치 관절을 완전히 펴야 함. 근력+1.】
하나는 철봉.
근력+1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밸런스 볼 운동 10,000회. 순발력+1. 정확한 자세 필수.】
둘 다 도구를 이용한 운동이었다.
'어차피 뭘 하든 다 해야 할 것들이야.'
나는 고민할 필요 없이 철봉을 선택했다.
일단, 체력+1이 있으니 수월하리란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철봉 오르기 10,000회를 선택하셨습니다.】
【미션을 완수하기 전엔 재능마켓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후우우우웅.
바람 소리 같은 게 나는 것 같더니 저쪽 기구에 빛이 생겼다. 철봉뿐 아니라 여러 운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운동 기구 아래, 나는 그곳으로 걸어가서 섰다.
"후… 우우우우. 이게 얼마 만이냐."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벗어 옆 기구에 걸었다. 처음 필라테스를 할 때는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젠 갈증까지 난다. 죽다 살아나길 반복해서일까?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들뜨게 할 수가 없달까? 철봉 아래 서 있으니, 가슴이 두근대기까지 했다.
'남은 시간 안에 해내야 해.'
체류 시간을 다 쓰기 전에 스탯을 하나라도 더 올려 둬야 했다. 마침 이벤트 미션을 할 때 생수도 넉넉히 사 둬서 따로 포인트를 소모할 것도 없었다.
준비를 마치고 팔을 위로 뻗었다. 코어가 성장하면서 키가 훌쩍 자라서 그런지 까치발을 하지 않아도 봉이 아귀에 들어왔다.
'우선 해 보자.'
일단 하나를 해 보면서 기준을 정해야 했다.
"끄응…."
팔을 완전히 펴라고 했으니 대롱대롱 매달린 다음 팔심으로만 올라갔다.
한데, 어라?
봉이 눈높이까지 왔는데도 숫자가 줄어들지 않았다.
'아직인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턱에 봉이 왔는데도 반응이 없다.
'더?'
반동을 주며 올라가면 모를까, 이렇게 순수하게 팔만 써서 올라가는 건 근육질 남자들도 50개를 해내기 어려울 거다.
이윽고 목 아래까지 봉이 위치했을 때,
【철봉 오르기 9,999회 남았습니다. 팔을 완전히 편 상태로 올라야 인정됩니다.】
"크흐…."
나는 참지 못하고 철봉을 놔 버렸다.
"이거 미쳤는데?"
그간의 경험도 있고 각종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혹시 밸런스 볼도 해 볼 수 있나?"
【필라테스 이용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두 개 다 해낼 수 있을까?
"둘 다 해도 되나?"
【필라테스 이용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해도 된다는 건가?
근데, 둘 다 하면 둘 다 할 때까지 못 나가나?
나는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재능마켓 체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동시에 둘 다 성공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버는 셈 아니겠나? 이 안의 시간도 공짜로 주는 건 아니다.
물론, 쉽진 않겠지만….
나는 결심을 굳혔다.
"그래."
【밸런스 볼 운동 10,000회를 선택하셨습니다.】
【미션을 완수하기 전엔 재능마켓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그건 내가 바라는 바인데 체류 시간이 끝나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차라리 한 10장 사서 싹 해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만만한 재능마켓이 아니다. 아마도 체류 시간을 벌기 위해 강제로 어딘가에 끌려가겠지.
【미션을 완수하기 전엔 재능마켓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대답 대신 같은 메시지를 반복했는데, 반대편에서 또 빛이 났다.
밸런스 볼이란 건 아주 커다란 고무공을 절반으로 뚝 잘라 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내가 다가가자 친절하게 설명이 나왔다.
【한 발로 올라갔다가 두 발로 딛고 서서 1초간 자세 유지 후 다시 한 발씩 내려오는 동작을 반복합니다.】
"…."
얘기만 들어선 잘 모르겠다.
"이렇게 한 발 먼저 올라가라는 건가?"
나는 우선 오른발로 볼을 밟았다.
물컹!
한 뼘은 박혀 들어가는 발 때문에 당황스럽다.
"이렇게…."
올라타려 했다.
그런데,
"이크…!"
남은 발을 떼서 볼로 올라가려는 순간 몸이 휘청였다. 넘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바닥에서 중심을 잡았는데, 당연하게도 카운트는 올라가지 않았다.
'생각보다 어려운걸?'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균형 잡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한 발로 딛고 1초를 버티라면 괜찮겠는데, 두 발로 다 디디는 건 고도의 균형 감각이 요구되었다.
"…."
나는 멍하니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철봉? 밸런스 볼?
어떤 걸 먼저 해야 할까?
'남은 체류 시간을 날짜로 환산하면 약 8일 언저리…. 어쨌든 시간 안에 두 가지 다 하려면 20,000개인데….'
하루에 최소 2,500개.
단순한 계산이지만 확실히 살인적인 횟수였다. 운동이란 게 처음 몇 개는 빨리할 수 있어도 그게 반복되면 점차 힘들어서 느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잠을 줄이고 생수를 많이 마신다면?'
더 여유가 생기긴 할 거다.
'일단은 서로 다른 근육을 쓰니까 번갈아서 해 보자. 팔심이 빠지면 볼을 하고, 체력을 비축해서 다시 철봉을 하는 거야.'
그러다 보면 길이 보이리라.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
.
.
하루가 지났다.
"으…."
4시간쯤 자고 일어나는데, 온몸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철봉 때문에 팔만 쑤시는 게 아니다. 밸런스 볼인지 뭔지 하느라고 허리와 등도 아팠다.
중심을 잡는다는 건,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웠고, 쉽게 익숙해지질 않았다. 20시간 가까이했지만 철봉 811회와 밸런스 볼 오르기 277회가 내 성적이었다. 결코 만만한 것들이 아니란 거다.
꿀꺽, 꿀꺽!
생수로 목을 축였다.
항상 가방에 가지고 다닌 비상식량으로 좀 더 버틸 순 있겠지만, 만두 같은 것을 보상으로 따내지 못한다면 포인트를 소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할 수 있어!'
하지만 의욕이 꺾이진 않는다.
하다 보니 결과가 자연스레 그려졌는데, 어렵긴 하지만 밸런스 볼을 익숙하게 다룰 수 있다면 전투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 같단 생각에 오히려 몸을 혹사하면서도 의지가 넘쳤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전투 중 어떤 자세로 쓰러져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달까?
'이제 하루야.'
그리고 내가 걱정하는 건 내 몸이 아니다. 오히려 체류 시간이 24시간이나 깎여 나간 것이 뼈아프다.
'숙달할수록 속도를 내야겠어.'
그나마 다행인 건 500만 원 벌기나 1,000km 달리기 같은 메인 미션이 아직 뜨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철봉과 밸런스 볼에만 집중하면 된다.
철봉 아래로 이동했다.
"후우우우…."
팔을 올리려는데 그게 뜻대로 안 될 정도로 욱신거렸다. 나도 참 독하긴 하다. 이걸 811개나 했으니까.
'오늘은 1,000개 이상 해야 돼.'
이대로라면 남은 시간 안에 미션을 완료하지 못한다.
'무조건…!'
봉을 단단히 잡고 팔을 굽혔다.
"…하나."
다시 팔을 편다.
몸이 축 늘어진다. 또 올라간다.
"둘."
어제 해 본 바론 20개를 연속으로 했을 때 녹초가 된다. 그러면 밸런스 볼로 이동해야 했다.
"셋, 넷…."
지나치게 느려서도 곤란하지만 조급해도 안 된다. 이건 장기전이다. 초반에 힘을 너무 빼 버리면 10시간, 20시간 운동은 지속할 수 없었다.
"스물…. 으으으…."
역시 오늘도 20개의 벽은 거대했다. 하지만 나는 봉을 놓지 않았다.
'하나씩만 늘려 가자.'
목표는 짧게 잡는 게 확실한 의지가 생긴다.
"끄으응…."
천근만근 몸뚱이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온 힘을 쏟아 내 간신히 21개를 했을 때서야 나는 손을 놨다.
"하아, 하아. 됐어."
밸런스 볼을 하고 나서 다시 1개를 더 늘려 보자. 이렇게 하나하나 조금씩 벽을 깨다 보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
밸런스 볼 앞에서 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곤 한 발을 가볍게 디딘다. 내가 어제 깨달은 바론 호흡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호흡이 엉키면 몸이 들썩이게 되고, 중심도 흐트러진다. 오르고 내릴 때는 무호흡이 낫다.
성큼!
볼 위로 올라섰다.
여기서 가장 실패가 많았다.
이제 남은 다리 하나를 가지런히 두고, 1초를 버틴다. 볼이란 게 한쪽이 움푹 들어가면 다른 쪽이 풍선처럼 부푼다. 그래서 정확한 지점을 파악해서 밟고 쓰러지지 않게 균형을 잡은 다음 뒷걸음질 치듯 내려와야 했다.
【밸런스 볼 오르기 9,722회 남았습니다.】
"휴…."
시작이 좋다.
이 볼 운동은 철봉처럼 어마어마한 힘이 드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실패가 많고 빠르게 했을 때 유산소 운동처럼 숨이 차오른다.
"둘, 셋. 넷. 영차!"
【밸런스 볼 오르기 9,720회 남았습니다.】
【밸런스 볼 오르기 9,710회 남았습니다.】
실수만 없으면, 1초에 하나씩 할 수 있다. 1분이면 120개, 1시간이면 무려 7,200개를 할 수 있다. 잘만 하면 24시간에도 1만 번 미션을 끝낼 수 있다는 거다.
"히이이익…?"
물론, 그게 그렇게 쉽게 되면 인생사겠나.
콰당!
옆으로 고꾸라져서 벌러덩 자빠진 나는 잠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아, 하아…."
내가 뭘 하는 있는 건지….
엄청난 의지와 의욕이 샘솟다가도 이렇게 한순간에 몰려드는 회의감과 의문은 파도처럼 나를 덮쳐 왔다.
내게 일어난 많은 일들.
재능마켓부터 시작해서 이런 운동이나 구울 같은 괴물을 상대한 시간들이 영화처럼 눈앞을 스쳐 간다.
왜 하필 나였을까?
과거로 돌아온 것도 재능마켓이 개입한 걸까?
그러면 대체 왜?
나보다 잘나고 운동도 잘하며 끈기도 있는 머리 좋은 사람도 많은데, 왜 나인가….
"끄응…."
몸을 일으켰다.
'원래 이렇게 어려웠었어. 뭐가 좋다고 이걸 그렇게 기다린 거냐.'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다. 스쿼트나 팔 굽혀 펴기를 해 봤으면서도 또 이 지옥에 내 발로 들어왔다. 이런 생각을 더 해 봐야 나아지는 게 없으니 애써 머리를 흔들어 부정적인 감정들을 날려 버리고 일어섰다.
"그래도…."
그나마 두 가지 운동을 같이 하길 잘했다. 밸런스 볼을 할 땐 팔 근육을 쓰지 않아서 철봉과 상성이 좋다.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실패만 더 줄이면 될 것 같은데….'
이틀 차.
상념과 싸우며 나는 오늘도 19시간을 운동했다.
.
.
.
사람이 무언가에 맹목적으로 미친다는 건 그만큼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어떤 것보다 해당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올린다는 뜻이다. 이런 정신력이면 어떤 일을 해도 성공할 수 있을 거다.
【재능 마켓 체류 시간이 23시간 11분 남았습니다.】
진짜다. 내가 해 봐서 안다.
"후우, 후우, 후우우…."
【철봉 오르기 1,135회 남았습니다.】
【밸런스 볼 오르기 500회 남았습니다.】
믿어지는가?
지난 시간 동안 나는 철봉 8,865회와 밸런스 볼 오르기 9,500회를 해냈다. 초기엔 밸런스 볼이 더 어려웠지만, 몸이 적응하자 훨씬 더 속도가 붙었는데, 이윽고 철봉 횟수마저 뛰어넘어 버렸다. 그 덕분에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다. 근육 운동보다는 유산소 운동이 익숙해지면 훨씬 더 빨리 수행할 수 있다는 것!
'35개만 하고 넘어가자.'
게다가 나는 이제 철봉 50개 이상을 한 세트에 끝낸다. 무리하면 더 할 수 있겠지만, 혹사하진 않았다. 밸런스 볼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내 손바닥엔 굳은살이 잔뜩 생겼다. 지문은 닳아 없어질 것 같았지만, 그럴수록 철봉에 대한 부담은 줄어만 갔다.
'할 수 있어. 23시간이면 충분해.'
철봉 1,100개를 남겼을 때, 나는 냉장고로 향했다.
꼬로로로록.
배가 요동을 쳤다.
나도 모르게 배에 손이 갔다.
'오….'
처음엔 몰랐는데, 철봉이란 운동이 복근에도 효과가 있었는지 뱃가죽이 빨래판처럼 느껴졌다. 아, 굶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그나마 죽으란 법은 없다고 간간이 철봉 50개 한 번에 하기, 밸런스 볼 오르기 100회 연속 달성하기 등의 미션이 나와 줘서 만두를 따낼 수 있었기에 버티고 있다.
벌컥!
열린 냉장고 안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 접시가 보였다.
남은 만두는 3개.
최악의 경우 이걸로 23시간을 버텨야 한다.
"…."
나는 만두 하나를 집어 코로 가져왔다.
킁킁!
신중하게 냄새를 맡았다.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