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화
상층, 하층.
이러한 단어들이 무얼 뜻하는지를 모르겠다. 겪은 일들을 유추해 보면 그 구울이라는 것이 균열을 통해 하층에서 올라왔다는 걸까? 전에 내가 갔던 설원은 하층의 어딘가였고?
모르겠다.
단 한 페이지밖에 없었기에 정보는 너무 부실했다.
'순간 이동이라니….'
게다가 알바 시간에 약간 늦긴 했지만, 한순간에 돌아온 현실에 어안이 벙벙했다. 생활에 지장이 있기 전에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갈수록 진귀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수호자 포인트 지정 스킬이라….'
이건 언제든 오키나와로 순간 이동 할 수 있다는 것 같은데, 이것도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 여권도, 비행기도, 배도 필요 없이 이제 마음만 먹으면 일본에 갈 수 있다는 건가?
아니, 이게 말이 되나?
'뭐 말이 되는 게 있긴 해?'
내가 생각해도 참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이제 내가 생각해야 하는 건 진실인지 거짓인지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웠지만, 다 잘 해결했어.'
무지막지한 포인트를 벌었고, 스킬도 얻었다.
【도민준. 레벨 5. 재능마켓 소유자. 체력 1. 지력 1. 누적 포인트 8,800.】
레벨도 올랐고, 아직은 효과를 알 수 없는 드링크 2종류도 챙겼는데, 무엇보다 구울과 싸울 때 코어가 급성장했다.
코어는 내면의 힘이자 외형의 성장까지 동반한다. 직접적으로 스탯이 오르거나 하는 체감은 없었지만, 기본값이 오른다랄까? 더 빠르게 멀리까지 뛸 수 있고 순발력과 체력도 오른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막지 못했다면….'
그 구울들은 어떻게 되는 거였을까?
설원의 좀비나 오피스텔의 고블린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는 현실이었고, 일상이었던 곳에 나타난 구울.
그게 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있었다면….
'수호자라….'
아직은 그 뜻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묵직한 무언가가 가슴에 내려앉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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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날처럼 새벽에 신문을 배달하려고 나왔다. 한숨 잤더니 어제의 긴장이 어느 정돈 풀렸다. 그런데 배급소에 들어가서 1면을 보는 순간, 나는 심장이 철렁할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연쇄 살인!】
다른 나라 얘기가 우리 신문 1면에 실리는 건 드문 일이다.
"말세야, 말세."
소장님이 그런 나를 보며 혀를 찼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나. 13명이나 죽었다는데."
"…배달 다녀오겠습니다."
"차 조심하고."
"네."
자전거에 신문을 얹어서 보급소를 나섰다.
'살인이 아니야. 그들은 구울이었어.'
내가 가지 않았다면 그 괴물들이 더 많은 사람을 해쳤을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조여 오는 죄책감과 정당성.
어떤 게 더 옳은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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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가서도 이 얘긴 단연 화제였다. 삼삼오오 모인 애들은 다 이 얘길 하고 있었는데, 휴대폰으로도 바로 뉴스를 볼 수 있는 시대였으니 모르는 애가 없었다.
점심시간.
뒤숭숭한 마음으로 운동장을 보며 계단에 앉아 있는데, 예원이가 옆에 와서 앉았다.
"밥 안 먹어? 식당에 없던데."
"어, 속이 좀 안 좋아서."
"아파?"
"그런 건 아니고. 새벽에 과식했거든."
"아…. 난 또. 호호!"
대충 둘러대고 나니, 걱정하던 예원이의 얼굴이 풀어졌다.
그리더니 대뜸 말했다.
"나, 하기로 했어."
"뭘?"
"유닛 활동. 채린 언니랑."
"아…."
할 말이 없었다.
구울만큼 끔찍한 게 채린인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나?
"딱 한 곡만 활동해 보고 반응 보자고 하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 마침 곡도 적당한 거 받아 놓은 것도 있다셔서 들어 봤는데, 너무 괜찮더라구."
"억지로 할 필요가 있어?"
"억지 아니야. 나한테도 큰 기회야."
"그래?"
"응, 우리나라에 오디션 프로가 얼마나 많은데. 우승한다고 해도 잠깐 반짝하다가 그대로 묻히는 사람들이 더 많아. 채린 언니, 성격이 좀 세긴 하지만 우리 아빠에 비하면 뭐…."
애써 웃는 예원이었다.
"아마 다음 주부턴 학교에 자주 못 나오게 될지도 몰라. 연습해야 해서."
"…."
"최소 3개월은 연습해야 하는데, 그걸 한 달로 줄여야 하거든."
오늘따라 말이 많은 예원이다.
그만큼 자기도 불안하다는 뜻일 거다. 하지만 이왕 하기로 했다면 후회를 남기는 건 좋지 않다.
"넌 잘할 거야."
"고마워."
예원이가 웃으며 나를 봤다.
"언니랑 촬영했다면서?"
"들었어?"
"응, 진작 얘기해 주지. 살짝 서운할 뻔?"
"미안."
"아냐. 그보다… 예뻤지? 채린 언니."
초롱거리는 예원이의 눈이 참 예쁘다.
나는 그 눈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응? 아니라고?"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일어났다.
"내 타입은 아니더라고."
예원이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리는 것 같더니 배시시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방송 언제야?"
"아직 모르겠어. 편성 확정되면 알려 준대."
"민준이, 너, 스타 되는 거 아니야?"
"스타는 무슨…."
500만 원 땄으니까 이제 그쪽은 발 디딜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런 애랑 엮이는 건 더욱 진절머리가 난다.
교실로 향하는데 뒤에서 몇 사람이 급히 뛰어오는 기척이 났다. 흠칫 뒤를 돌아봤는데 여자애들이 꺄르르 웃으며 뛰어오고 있었다.
흔한 일이다.
흔한 일.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순간적으로 저 애들이 나를 쫓아오던 구울 떼와 겹쳐 보였다는 건 말해 줘도 못 믿을 거다. 꽉 쥔 손아귀에 땀이 흥건했다.
'그게 뭐였든 간에.'
이 세상엔 없어야 할 것들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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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이 기간 동안 재능마켓에 가지 않았다. 어차피 체류 시간도 얼마 없었고, 두 가지 미션도 수행해야 했기에 가도 할 게 없었다.
더 근본적인 이유론 혹시 갔다가 다시 덜컥 미션이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좀 더 강해진 다음 뭘 해도 하고 싶기도 했고.
【일주일 전 일본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에 대한 단서가 아직도 오리무중인 가운데 아직도 범인을 특정하지 못하고 있는 일본 경찰은….】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지나치며 나는 지하도를 빠져나와 강남역으로 향했다.
【미션 완수까지 0.103km 남았습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미션 완수까지 0.031km 남았습니다.】
이제 30미터만 뛰면 된다.
나는 그간 1,000km를 달려 여기까지 온 거다.
막 계단을 다 올라서 5번 출구를 나와 오피스텔 앞에 섰을 때였다.
【축하합니다!】
【미션: '1,000km를 뛰어라'를 완료했습니다.】
【1,00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우웃…!"
너무 좋아서 야호! 외칠 뻔했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1,000km 달리기를 완료한 것이다.
【추가 보상은 재능마켓에서 수령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 만에 온 재능마켓.
보상이라는 단어에 달려오긴 했지만, 어느새 뿌듯함보단 두려움이 앞서기 시작했다.
"…."
멈칫.
나도 모르게 발이 멈춰 섰을 때, 주르륵 소식이 날아들었다.
【서브 미션: '500만 원을 벌어라.'를 완료했습니다.】
【1,00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추가 보상은 재능마켓에서 수령할 수 있습니다.】
【축하합니다! 이제 필라테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흐흐흣…."
웃음이 실실 나왔다.
이때, 전화가 걸려왔다.
PD였다.
-입금 확인했어?
보지 않아도 안다.
"네, 고맙습니다. PD님. 잘 쓸게요."
-네가 잘해서 된 건데 뭐. 그리고 편성 잡혔다. 다음 달 2일 저녁 9시 50분이야.
"그래요?"
-본방 사수해. 끝나면 전화할게.
불행은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지만 살다 보면 오늘처럼 좋은 일도 계속해서 벌어지기도 한다.
'필라테스도 할 수 있겠어.'
보상도 궁금했지만, 무엇보다 필라테스를 반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를 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생존 확률을 높일 것이다. 그 힘을 얻었을 때 느껴지는 쾌감 역시 상당할 것이고.
띠잉.
5층에서 내려 재능마켓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드디어 보상이다!'
내가 이 몸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됐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후면 2달쯤 되는 것 같은데, 그 2달이 무슨 2년처럼 까마득했다. 여러 사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오늘 끝낸 두 가지 미션이 장기 미션이라서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돼.'
문을 열기 전, 가방 속 물건을 다시 체크했다. 늑대라도 튀어나오면 대응해야 한다. 그보다 더한 것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것도 이젠 안다.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끼이이익.
열리는 문틈으로 안을 빠르게 훑었다.
'없나?'
화장실에서 고블린이 나왔던 전적도 있었기에 안으로 진입하면서 화장실 문도 열어 보았다.
"후… 우…."
여기에 뭐가 없다고 마음을 놓아선 안 된다. 또 어디로 끌려갈지 아직은 모르는 거니까.
'보상은 냉장고에 있나?'
가방도 내려놓지 않았다.
활이 든 하드 케이스만 냉장고 앞에 두고, 들뜬 마음으로 손을 뻗어 냉장고를 열었다.
"…어?"
하지만 냉장고엔 생수만 가득했다.
뭐지?
보상은 어디 있다는 거지?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는데,
드드드드드드득!
벽이 진열장으로 바뀌면서 수많은 아이템들이 보였고, 낯선 게 눈에 들어왔다.
"…."
홀린 듯 그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까진 못 보던 것.
"…이게… 보상?"
유리 안쪽엔 따로 자릴 마련한 것처럼 선반이 있었고 그 위에 손바닥만 한 카드가 여러 장 놓여 있었다. 마치 값비싼 시계를 따로 놓아 둔 것처럼 특별함이 느껴졌기에, 얼굴을 바짝 유리에 붙이며 카드를 보았다.
총 5장.
자연스럽게 카드 아래의 글귀에 눈이 갔다.
【스킬: 명중률 상승.】
"…."
옆으로 시선이 갔다.
【스킬: 바람 무시.】
이거 진짜냐?
그 옆의 카드를 봤다.
【스킬: 단기 육체 경화.】
"오우… 야…."
스킬 카드였다.
오른쪽 두 장도 【크리티컬 상승】과 【체력 비축】.
절대 범상치 않았다.
【보상을 수령하세요. 두 장의 카드를 고를 수 있습니다.】
"와… 씨…."
두 장이나?
눈물이 날 것 같다.
이걸 위해 그토록 고생한 거다.
【재능마켓 체류 시간이….】
더 감격하고 싶었지만, 체류 시간이 압박했다.
'필라테스까지 하려면 시간을 낭비해선 안 돼.'
카드는 다섯 장.
내가 고를 수 있는 카드는 두 장이다.
'고민할 필요가 있나? 뭔지도 모르는데.'
나는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활을 써서 이런 스킬이 나온 건가?'
이건 궁금했지만 일단 다섯 가지 중에서 지금 필요한 건 보자마자 느낌이 왔다. 일본에서 구울과 싸울 때 아쉽다고 생각했던 그것!
"명중률 상승."
【보상을 선택하셨습니다.】
진열장 안 카드가 스르륵 사라졌다.
그리곤 내 피부가 잠깐 반짝했던 것 같다.
"된 건가…?"
뭐, 이건 이따가 활을 쏴 보면 알게 될 거고.
두 번째 카드를 바로 골랐다.
"바람 무시."
역시 이번에도 진열장 안 카드는 사라지고 손이 반짝했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양말 줘, 양말."
【달리는 히어로의 양말을 구매하시겠습니까?】
"그래. 그 양말."
오늘을 위해 얼마나 기다렸던가.
【9,000P가 차감됩니다.】
1분간 주력을 2배 올리는 물건!
이걸 위해 오늘 달려왔다.
이런 아이템이 위기 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뼈저리게 깨닫지 않았나?
토옥.
내 앞에 머물던 빛이 양말로 변해서 손에 떨어졌다. 딱 보기엔 평범한 검은색 양말. 하지만 필요할 땐 이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딱 맞네."
행여 잃어버릴까, 바로 신었다.
【누적포인트 1,800P.】
그간 뼈아프게 모은 포인트를 상당히 써야 했지만, 내 손으로 산 첫 번째 완제 아이템이었다.
"좋다. 진짜 좋다!"
꼭 공인 중개사 1차 합격 소식을 들은 날 같았다. 그날도 이렇게 기뻤더랬는데.
'아….'
문득 불길해졌다.
그날 나는 죽었지 않나? 아니, 그냥 과거로 온 건가? 어쨌든 이러다가 뒤통수 맞을 수도 있다 싶어 머리를 흔들었다. 줬다 뺏는 게 세상에서 제일 나쁘다지만, 재능마켓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크흠!"
일부러 정색하면서 반응을 기다렸다.
"…."
하지만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괜찮나?'
자, 그럼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