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마켓-36화 (36/277)

#036화

【달리는 히어로의 양말

1분간 주력을 2배 올린다.

착용 시 귀속.

가격: 9,000P.】

'9,000포인트라.'

노려볼 만했다.

현재 내가 보유한 포인트가 4,750. 초창기완 다르게 최근엔 500포인트짜리 돌발 미션도 등장하는 걸 보면 엄두를 못 낼 정돈 아니었다.

'이건 저축이랑 비슷해. 억척같이 모으다 보면 결국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을 때 남는 게 다 내 돈인 것처럼.'

푼돈이라도 치킨 시켜 먹고, 배달 부르고 하다 보면 돈이란 건 사르륵 녹아 버린다. 결국, 그런 돈이 모여서 종잣돈이 되고, 좀 더 고급스럽게 얘기하면 시드 머니가 되는 거 아니겠나? 솔직히 1억, 10억이 우스운 시대가 되다 보니 좀처럼 돈을 모을 수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지만, 그렇다고 티끌 모아 태산을 무시하면 안 된다. 나도 그 인내 끝에 구질구질하더라도 작은 빌라 하나는 얻었었다.

'이 추세면 한 달 후엔 모을 수 있을 거야.'

9,000포인트가 까마득해 보이지만, 못 모을 것도 없단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저건 양말이니 일상생활 할 때 부담 없는 아이템이 될 것이다. 가격이 깡패라지만 다른 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 활을 커스텀하지 않아서 쉽게 들고 다닐 수도 없는 현실에 비춰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작은 장점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주력이 두 배면 그만큼 공격이나 방어 때 월등한 성능을 낸다는 거지.'

힘 곱하기 2를 경험해 봐서일까.

내 전력 질주가 2배가 된다?

상상만 해도 다양한 가능성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게 가장 현실적인 목표야. 무엇보다 도망갈 때 좋을 거고.'

물론, 옆을 보면 5만 포인트, 10만 포인트짜리 어마어마한 성능을 자랑하는 아이템이 많다. 그러나 이건 더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 차근차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치원생이 유아 교과서를 봐야지, 갑자기 대학 논문을 본들 감당할 수 있겠는가.

【투시 안경

사물을 투과하여 속을 볼 수 있다.

깨지면 고칠 수 없다.

가까운 거리에서만 효과가 나타난다.

가격: 31,000p.】

힐끗 본 아이템.

참으로 탐났다.

올 때마다 계속 눈에 밟히던 놈.

"…."

물론, 이런 건 지금 내 목숨을 연명하는 데 하등 쓸모가 없었다. 무려 3만 포인트를 소모해야 하는 것도 문제였고.

"언젠간…."

포인트 열심히 벌어서 이런 아이템도 쿨하게 지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면….'

나는 사십 평생 명품을 한 번도 산 적이 없었다. 벤츠나 BMW 같은 차도 운전은커녕 조수석에도 앉아 본 경험도 없다.

'지금이라면….'

내게 이 진열장은 마치 명품관 같았다. 이전에는 근처도 못 가 보았던 곳. 물론, 이곳도 아직은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것들이 더 태반이고, 억지로 내 몸에 걸쳐도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지만, 언젠가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샘솟는다.

'사치가 아니야.'

40년을 살면서 부러운 놈들을 보면 나 스스로 합리화하기 바빴다. 그들만큼 공부하지도, 그네들처럼 노력해 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목표 그거면 돼.'

절실하게 닿아야 할 곳. 그곳이 이제 생긴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과거는 과거일 뿐.

이젠 내 목숨 줄을 붙잡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돌발이랑 두 가지 굵은 메인 미션이면 9,000은 될 거야.'

1,000km 달리기랑 500만 원 모으기를 하면 포인트가 꽤 모일 거다.

'아껴서 한 방에 지른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돌아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목표를 정했으면 이제 다른 것들은 잊어야 한다. 욕심이 크면 화를 부른다.

40년을 밑바닥에서 살아 보고 느낀 건데, 행복이란 건 만족에서 온다. 1억? 10억? 그게 없는 지금이라면, 당장 내 이불 아래 깔린 전기장판이 더 중요할 겨울이 반드시 오는 법이다.

"몇 시간 남았더라?"

욕심을 버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할 일이 산더미다.

공부도 해야 하고, 좀 이상하지만 고기를 연구하기 위해 각종 책도 봐야 했으며 실내에서 할 수 있는 활 연습도 해야 한다.

【재능마켓 체류 가능 시간이 271시간 39분 남았습니다.】

'271시간….'

최대한 아끼며 썼지만, 그새 많이도 썼다. 부패의 주인과 싸웠던 게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벌써 이만큼밖에 안 남았다는 건, 이 시간을 다 써 버리면 또 무언가와 목숨을 건 승부를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 효율적으로 써야 돼. 다 써 버리면 미션 끝나고 필라테스를 할 시간이 모자랄 거야.'

계산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필라테스 이용권은 써 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체력 하나, 지력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당분간은 더 바짝 아껴야만 했다.

'오늘은 1시간만 하고 가자.'

양말을 사야겠다는 목표도 정했으니 오늘은 욕심을 버리고 공부나 조금 하고 가야겠다.

벽에 기대앉아 막 책을 펼쳤다.

그런데 이때,

【이벤트 발생!】

"…?"

나는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파앗!

모든 불이 꺼졌다.

"…!"

뭐야!

뭐가 벌어지려는 거지?

【침입자가 수호자의 존재를 감지했습니다.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이벤트 미션이므로 수락하지 않아도 됩니다.】

'수호자? 균열? 이게 무슨 말이지?'

오피스텔이 삽시간에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저쪽에 분명 강남역 한복판이 내려다보이는 통창이 있는데도 어떠한 빛도 들지 않는 게 기이하다.

나는 침착하게 메시지를 분석했다.

'수락할 필요가 없다고 했어.'

미션을 고를 수 있다니.

지금까지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때, 메시지가 또 날아들었다.

【균열 발생.

수락하시면 해당 스테이지로 이동합니다.】

【이벤트 미션에선 특별한 아이템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이벤트 미션에선 확정적으로 3,000P를 얻을 수 있습니다.】

"허얼… 삼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제까지 받았던 그 어떤 미션보다 많은 포인트가 걸린 것이 솔깃한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하다는 거겠지.'

덥석 물었다간 위험에 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긴 야생 아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기엔, 유혹하는 보상이 컸다.

'특별한 아이템이라면 레어 활 같은 것 말인가?'

【해당 균열은 24시간 후 닫힙니다.】

'하지만 까딱 잘못하면….'

평소처럼 당연히 내게 주어지는 기본 미션이 아니다. 언제, 뭐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 거다.

【이벤트 미션에선 특수한 스킬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제길…."

특수한 스킬이라니.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점차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아이템에, 스킬에, 3,000포인트까지!

어떡하지?

"무기 같은 걸 고를 순 없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질문을 던져 봤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하고 싶어. 하고는 싶은데….'

저번처럼 포인트를 다 쏟아부어서 준비하기엔 아까 다짐했던 목표가 너무도 허무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번 미션만 어떻게든 완료한다면 양말까지 정말 얼마 안 남는다는 얘기다.

【이벤트 미션 수락 가능 시간까지 23시간 57분 남았습니다.】

"도박이냐…."

나는 지지리도 운이 없는 놈이었다. 무려 40년을 확인했으니 그건 확실했다. 그러나 다시 사는 삶에선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들을 얻어 냈다.

'할 수 있을까?'

시간이 줄어드는 걸 보면, 저 균열이란 게 닫혔을 때 이벤트 미션도 사라지는 것 같다. 하지만 저쪽의 상황을 알 수 없었기에 안일한 생각도 금물이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나를 어떻게든 저 미션 안으로 떠밀려는 것일까?

【이벤트 미션에선 특수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습니다.】

다시 울린 알림은 나를 결국 끌어들이고 말았다.

'정보?'

스킬도, 아이템도, 포인트도 탐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정보'라는 단어는 날 강하게 이끌기 충분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노출된 적이 없던 단어이기 때문이다.

'재능마켓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이미 발길은 냉장고로 향했다.

'생수만 넉넉하게 사고… 버텨 보자.'

생수 10병을 가방에 넣었다.

꿀물 2병도 챙겼고, 초콜릿과 에너지바도 확인했다. 그리곤 아이템 진열장으로 가서 화살을 더 샀다.

여기까지 사용한 포인트가 250.

【누적 포인트 4,500.】

'사천오백은 킵하고.'

하더라도 포인트는 아낀다.

미션이 나올 때마다 포인트를 족족 써 버리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다. 미션은 더 강해지는데, 계속 이렇게 맨몸이면 언젠간 빚더미에 오른 사람처럼 허덕일 것이 분명했다.

'이 이벤트만 따내면 최소 7,500을 확보하는 거야.'

강력한 목표가 생겼고,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서일까? 두려움이 점차 옅어졌다. 게다가 지력+1이 된 내 두뇌는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내가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으면 23시간만 숨어 있다가 와도 되지 않을까?'

힘겹긴 했어도 재능마켓의 미션들은 내가 해낼 수 있는 것들만 나왔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내가 깰 수 없는 것이 나오진 않으리란 생각도 든다.

"…."

가방에 넣어 둔 칼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미션을 수락하려면 스테이지로 입장하세요.】

조심스럽게 2층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향했다. 위를 보니 저번처럼 어디론가 통할 것 같은 반투명한 아지랑이가 보였다.

'좀 다치면 샤워 시설을 쓸 수도 있어.'

투지의 링도 있다.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 되새겼다.

'갑작스럽지만, 언젠 안 그런 적 있었나?'

나는 계단을 오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벤트 미션 수락 가능 시간까지 23시간 48분 남았습니다.】

벌써 10분이 넘었다.

저쪽에선 그 10분이 생사를 가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앞으로 나아갔다.

【스테이지에 진입합니다.】

【이벤트 미션을 수락했습니다.】

【스테이지에서는 재능마켓 체류 시간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

저번처럼 풍경이 돌변했다.

단순하게 보이는 게 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이게 어떤 느낌이냐면 사우나에 가서 뜨거운 방이나 차가운 방에 갑자기 들어가면 숨이 턱 막히거나 몸에 소름이 돋는 그런 정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그거에 100배는 넘어가지만….

'긴장할 거 없어. 여기가 어딘지부터 알아야 해.'

전에도 안전 지역이 있었다.

이곳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방심해선 안 된다.

'동굴은 아니고….'

벽만 봐도 인공적인 느낌이 들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반질반질한 벽면과 넉넉한 원룸 크기의 공간. 석실이라고 부르면 될 것 같다.

'저건 문인가?'

손잡이는 없었지만, 벽 한쪽에 외부로 통하는 것 같은 틈이 있었다. 아마도 미는 것이리라.

'이건 여기에 두고….'

하드 케이스에서 활을 꺼냈다.

화살통에 화살도 빼곡하게 넣었다. 아직 잘 쏘진 못하지만, 원거리 타격으로 이거만 한 게 또 있을까? 여차하면 끝이 뾰족하니까 저번처럼 작살처럼 잡고 찔러 버리는 것으로라도 쓰리라.

지익-.

가방끈도 단단하게 조였다.

꾸울꺽!

마른침이 간신히 넘어갔다.

그만큼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그그극!

문으로 짐작되는 것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때였다.

지이이이잉-!

"…?"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스마트폰이?'

재능마켓에서 머물 땐 시간이 멈춰서 반응하지 않던 스마트폰이다.

"…."

잠시 주변을 훑곤, 조심스레 스마트폰을 꺼내 보았다.

【Web 발신

고객님은 현재 해외 로밍 요금제에 가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공항 로밍 센터에 방문하셔서 해외 로밍 요금제에 대해 안내받으시고 출국하세요.】

"로… 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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