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화
'자, 알차게 하루를 마무리해 볼까나.'
간만에 잘 놀았다.
그리고 이제 끝낼 때가 됐다.
"자! 숨 가쁘게 달려온 이상형 월드컵! 이제 결승전만 남겨 두고 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도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요! 저 채린이가 여러분 대신 최고의 남자를 골라 드리겠습니다!"
김우태와 나는 나란히 섰다.
이렇게 서니 김우태는 나보다 머리 하난 더 커 보였다. 실제로도 키가 컸지만, 우락부락한 근육 덕에 더욱 거대해 보인다. 상대적으로 나는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는데, 몸에 꽉 끼는 교복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마지막 게임에 앞서 짧게 질문 하나씩 하겠습니다!"
아까 PD가 어두워지기 전에 끝낸다고 했으니, 진짜 얼마 안 남았다.
"먼저 김우태 님! 이 자릴 빌려서 누군가에게 감사를 전한다거나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오늘 채린 씨를 보게 되어서 완전! 좋았습니다. K스타 오디션 때부터 팬이었습니다. 결승전에서 꼭 이겨서 채린 씨와 커플이 되고 싶습니다!"
1초도 고민 없이 말하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웃었다.
나만 빼고.
"…."
아니야. 그러지 마.
쟤가 어떤 앤지 몰라서 그래.
"호호호! 저도 설레네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강력한 상대를 꺾으셔야 하는데요! 자, 그럼 최연소 참가자이자 모두의 예상을 깬 도민준 님!"
-와아아아아!
-도민준! 도민준!
-최애 민준! 최애 민준!
작가들이 후끈 공기를 달궜다.
"각오 한마디 해 주세요!"
500만 원… 아니, 크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내가 고갤 숙이자 채린은 활짝 웃으며 뒤의 무대를 소개했다.
"팔씨름, 팔 굽혀 펴기! 달리기에 이어 마지막 게임을 해 볼 텐데요! 여기서 승자가 가려집니다! 하지만 꼭 이긴다고 제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겠죠? 페어플레이하지 않으면 멋진 남친이 될 수 없어요!"
결승전은 철봉이었다.
"자! 두 분! 무대로 올라 주세요!"
양쪽에서 출발해서 한쪽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는 지극히 단순한 경기. 김우태가 상대라면 누구나 부담이 되겠지만, 내겐 채린을 안고 뛰는 것보다 100배 나았다.
"후후. 끝났군, 끝났어. 난 세 살 때부터 철봉을 했다고."
김우태가 자신감을 보이며 팔을 풀었다.
저 거구가 철봉에 매달려서 그 반동으로 몸을 흔들고 발로 상대를 걷어차면 버틸 수 있는 생물이 있을까?
그런데 이것도 참 묘하다.
'철봉이라니…. 재능마켓이랑 겹치는 게 우연인가?'
팔 굽혀 펴기나 달리기, 철봉까지 내가 해야 하거나 했던 필라테스와 너무 비슷하다. 워낙 대중적인 기초 체력 운동이기도 하니까 비약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상관없지.'
나는 주변을 봤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고.'
혹시나 참가자가 추락해서 다칠 수도 있었기에 철봉 아래엔 두툼한 매트가 깔려 있었다. 더 벗어난다고 해도 천연 잔디다.
'어디, 해 볼까?'
두근!
심장이 뛰었다.
이제까지 수많은 게임을 하면서도 동요하지 않던 가슴이 어떤 것을 떠올리자 비현실적으로 반응했다. 이건 긴장해서 그렇다기보다는 현실에서 비현실을 떠올리니 그런 것이다.
"준비되면 말씀하세요!"
채린이 호각을 들고 말했다.
"전 언제든 좋습니다! 하하하하!"
김우태가 외칠 때, 나도 채린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속으로 주문처럼 말했다.
'이건 반칙이 아니지.'
삐이이이이익!
호각이 울리는 동시에 머릿속으로 메시지가 터졌다.
【투지의 링이 사용되었습니다.】
【1분간 힘이 2배로 증폭합니다.】
'이것도 목숨 걸고 따낸 내 일부니까.'
몸을 훌쩍 띄워서 첫 번째 철봉을 잡는 순간 반동을 주며 한 번 구르고 다음 철봉으로 빠르게 날았다.
그러자,
-우와 뭐야!
-저게 말이 돼…!
사람들도 놀랐고,
"…!"
나 역시도 무척 놀라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화산처럼 터지는 힘이 폭주해서 머릿속까지 치밀어 올라 버렸달까? 두개골을 뚫고 뇌를 직접 맞은 것처럼 담당할 수 없는 기분에 나는 철봉 두 개를 건너뛰며 몸을 날렸는데, 세 번째 철봉을 손으로 잡아도 부담은 전혀 없었고 이 모든 것은 한 호흡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 어어어어?"
김우태가 첫 번째 철봉에서 매달린 채 나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저게 뭐야? 저게 말이 돼?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사이 나는 다섯 번째 철봉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훅! 후욱-훅!
원숭이도 이렇겐 못 할 거다. 걔들은 가벼워서 나무타기를 빠르게 하는 것이지, 내 몸무게론 그런 순발력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넘치는 힘은 그걸 가능케 하고 있었고,
"미, 미친!"
김우태는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철봉은 10칸.
예상대로라면 서로 다섯 칸씩 줄여 가면 중간에서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일곱 칸을 순식간에 혼자 건너 날아왔고, 이제 남은 거리는 두 칸뿐이었다.
"이런 괴물 같은 자식이…!"
김우태도 지지 않으려는 듯 한 칸 앞으로 오면서 다리를 번쩍 들었다. 내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으니 걷어찰 생각인 거다.
"흐압!"
철봉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은 역시 다리다. 팔을 쓸 수도 있겠지만, 한 손으로 매달려 있는 것 자체가 더 위험했고 거구일수록 더 힘이 든다.
하지만 그건 나완 상관없는 이야기.
지금 내 온몸에 들끓는 이 힘은 차다 차다 넘치는 기분이었다.
'이건… 끊기 힘들겠는데?'
처음 써 봤는데, 벌써 중독될 것 같다. 그리곤 깨달았다. 앞으로 내가 가장 먼저 취해야 할 스탯은 힘이라는 것을. 투지의 링이 있는 한 나는 2배로 증폭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투지의 링 지속 시간이 55초 남았습니다.】
"…."
나는 빠르게 앞으로 다가온 김우태를 보았다. 그는 하체를 들어 방어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한 발을 뻗을지, 아니면 두 발을 다 쓸지, 다리로 막을지, 반대로 공격할지 다양한 변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게 그런 것 따윈 아무 의미가 없다. 철봉을 건널 때마다 시계추처럼 움직이던 내 몸의 반동은 이미 최대치였고, 뒤꿈치가 뒤쪽 철봉에 닿을 것처럼 솟구쳤다가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이익? …으으으으으아아아앗! 와라아아아아! 도민주운!"
김우태도 그런 나를 보며 악을 썼다. 허리에 힘을 잔뜩 주고 하체를 더 끌어 올려서 두 발을 앞으로 방패처럼 막았다.
쌔애애애애액-!
내 두 발이 그의 발에 닿았을 때.
퍼억-!
-꺄아아아아아악!
-저, 저거!
-위험해!
김우태는 너무도 쉽게, 실 끊어진 연처럼 뒤로 날아갔다. 본인도 황당한지 크악! 비명을 지르다가도 바닥에 닿기 전에 낙법을 시도했는데, 힘을 다 줄이지 못하고 데굴데굴 뒤로 한참을 굴러 겨우 멈췄다.
-허억….
-뭐가 어떻게 된….
나는 철봉을 다 건너서 김우태가 처음 시작한 자리로 섰다.
"우태 님!"
이건 나도 걱정됐다.
고블린이나 좀비가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을 상대로 아이템을 써 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나마 그의 피지컬이 워낙 좋아서 버텨 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에 시도해 본 거다.
"…파하!"
죽은 듯 쓰러졌던 김우태가 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숨을 크게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이런 미친놈!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김우태는 누워서 후련한 듯 웃어 재꼈는데 졌다는 패배감보다는 어이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저런 거구가 언제 저렇게 날아 보겠나?
-우, 우와아아아아아!
-도민준! 승!
"꺄아! 멋져요!"
채린이 팔짝팔짝 뛰며 달려왔다.
흠칫.
하지만 나는 좀 전에 보았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아까 김우태가 날아가던 그때,
'웃고 있었어….'
확실히 알았다.
저 여자, 절대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것을.
.
.
.
【미션을 완료했습니다.】
【500P를 누적했습니다.】
【누적 포인트 4,750.】
무려 500포인트를 벌었다.
"늦어도 다음 주 초까진 입금될 거야. 오늘 정말 고생 많았다."
세금 좀 떼도 485만 원.
'부자다, 부자….'
일회성으로 번 거금이었다.
마흔 살 때도 한두 달은 바짝 일해야 벌던 돈. 그걸 지금 단번에 고1인 내가 직접 번 거다.
"혹시 다른 일 있으면 또 연락해도 돼?"
"그럼요!"
나는 흔쾌히 답하며 촬영장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야! 너! 야! 도민준! 야아아아아아아!
채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 전력 질주로 따돌렸다. 버스도 안 타고, 지하철역까지 뛰었다.
【미션 완수까지 195.272km 남았습니다.】
아직도 투지의 링을 썼을 때의 그 쾌감이 가시질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흥분해 있다간 곤란하다.
빠르게 머릴 식히기 위해 현실을 계산했다.
'500만 원을 하루에 벌었어.'
주식이나 코인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마음인가 보다.
'그렇다고 허투루 쓸 순 없지. 이런 일이 매일 있는 건 아니니까.'
각종 알바를 한 돈까지 합치면 이제 다음 주 초엔 500만 원 미션을 하고도 돈이 남는다.
'달리기만 끝내면 필라테스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 힘겹고 고통스러운 필라테스를 이렇게 간절히 바라고 있는 내가 기막혔지만, 어쩌나? 먹어 본 게 더 무섭고, 가져 본 걸 더 바라게 되는 게 사람인데.
"후…."
전철을 기다리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운동회에 다녀온 것 같네.'
고작 하루였지만 김우태의 얼굴이 생생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가 준 명함이 잡혔다.
'잠실이면 멀진 않아.'
봉천동 집에선 멀지만, 강남역 재능마켓에선 가깝다.
'체육관이라….'
고깃집 아저씨한테 칼 쓰는 법을 배우고 있다곤 하지만 나는 아직 익혀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활도 능숙해져야 하는데 그렇다고 근접 전투를 무시할 수도 없다.
'근육 키우자고 헬스장 다니는 건 의미 없지만, 종합 격투기라면… 얘기가 다르지.'
불과 얼마 전에도 늑대와 싸우다 죽을 뻔했었다. 그때 내가 타격 기술이나 아까 김우태가 했던 낙법 같은 실전 기술을 체득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심하게 다치진 않았을지도 몰랐다.
'할 게 많네, 많아.'
전철이 다가오는 걸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웃었다.
'그래도 재밌어!'
무기력하기만 했던 40년.
죽지 못해 살던 그 세월보다 이쪽이 훨씬 낫지 아니한가?
40년을 산 도민준.
고등학교 1학년 도민준.
무엇이 진짜 나인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교복 입고 살다 보니까 참 무섭도록 적응이 빠르다. 아직 말투나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진 못했지만, 이 또한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잘했어.'
나는 나를 칭찬할 수 있는 지금이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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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500만 원을 벌었으니 계획을 새로 수립해야 했다. 예전이었다면 공과금이 밀리면 일을 좀 더 하거나 주로 먹을 걸 긴축하는 삶을 살았었던 나였지만, 이제는 달랐다.
'하루에 20~30km씩만 뛰면 돼.'
다음 주에 상금이 입금되면 미션 하나는 자연스럽게 완료된다. 남은 190km 달리기도 맞춰서 끝내 버리면 좋았는데, 전처럼 무리하지 않아도 이제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미션도 곧 종착지에 다다랐다.
'뭐 그래도 싫진 않은 시간이었어.'
마라톤이 약 41km다. 프로 러너도 아닌 내가 그에 준하는 달리기를 매일 해 왔다면 누가 믿기나 할까? 어마어마한 운동량에 지칠 때가 없었다면 거짓이겠지만, 이것도 하다 보니 할 만했다.
'진작 조깅이라도 할 걸 그랬어.'
이렇게 뛰어 본 적이 언제던가?
죽자고 뛰고 나면 땀 쭉 빼고 샤워하는 기분마냥 시원하고 상쾌했는데, 어느 날은 몸이 더 가뿐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왜 이걸 몰랐을까? 후회도 든다. 돈도 안 드는 일인데, 뭐 그렇게 사는 게 바빴는지.
월요일.
학교가 끝나자마자 강남역으로 뛰어왔다.
【미션 완수까지 181.830km 남았습니다.】
늑대를 겪어서 그런지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집에서 챙겨 온 식칼 하나를 품에 넣고 오피스텔 문을 열었다.
끼이이이익.
문 여는 소리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재능마켓에 입장하셨습니다.】
알림이 울리며 쿵! 문이 닫혔다.
이어지는 알림이 없는 걸 보며,
"후우…."
안도의 한숨이 절로 터졌다.
그래도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진입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특별한 이벤트는 없는 모양이다.
드르르르르르륵.
언제나처럼 벽이 열리며 재능마켓 진열장이 나타났다.
"…."
나는 그 앞에 서며 진열장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오늘은 목표를 정할 것이다.
내가 가진 강력한 무기는 활.
힘을 높여 주는 반지가 하나 있고, 간단한 회복을 도와주는 생수를 다량 살 수 있다. 미션이 끝나야 하지만, 샤워실로 회복, 복구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런 것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물건이 딱일 텐데….
"…."
그렇게 한참을 보는데,
"이건…?"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