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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마켓-34화 (34/277)

#034화

"그런 과분한 일이 생긴다면 진지하게 고민해 볼 것 같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각이 울렸다.

-1시간입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도민준! 도민준! 도민준!

-세상에! 사람 맞니?

스태프들이 만세를 부르는 걸 보며 나는 채린을 땅에 내려놓았다. 1시간이나 불편하게 내게 매달려 있던 그녀였는데, 발을 땅에 디뎠을 때 왠지 아쉬워하는 눈빛이 보인 건 내 착각이겠지?

"…."

"…."

아까까지는 그렇게 칼바람 불던 채린이었는데, 묘하게 누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때, PD가 손짓했다.

다음으로 어서 진행하라는 뜻이었다.

내가 자리로 돌아가자 다음 참가자가 나섰다. 그런데 몇 개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채린의 발이 땅에 닿고 말았다. 10분을 못 넘긴 거다.

-아깝다!

-우우우우우!

그래, 저게 정상이다.

애초에 미혼 남자가 누군가를 안고 이렇게 오래 버텨 본 경험이 얼마나 있겠나? 쓰지 않는 근육은 퇴화하기 마련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던 거다.

그다음도, 그다음 참가자도 30분을 넘기지 못하고 고배를 마셨다. 김우태만이 간신히 58분을 버텼는데, 내가 만든 1시간이란 기준은 보통 사람에겐 불가능한 기록이었고, 모든 차례가 지나자 나는 압도적으로 1위에 올랐다.

그렇게 두 명이 더 탈락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셋.

채린이 해맑게 외쳤다.

"이제 두 게임만 남겨 놓고 있는데요! 과연 이 시대 최강의 남자는 누가 될까요?"

힐끔, 힐끔.

모두가 나를 훔쳐보았다.

처음엔 비웃음만 가득하던 눈초리를 받았는데, 이젠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자 우승 후보로 비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채린의 변화가 요상했다.

찡긋!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보이는 게 아닌가?

"…."

오싹하다.

또 무슨 꿍꿍이길래 저러나.

"이번 게임은 오래달리기입니다! 릴레이 형식으로 이어지고 한 바퀴 돌 때마다 바통을 이어받는 방식인데요! 제가 바로 바통입니다!"

이렇게 넓은 필드를 대여한 이유가 있었다. 한 바퀴 돌면 500미터쯤 뛸 것 같았는데, 이걸 무한 반복하면 체력은 금세 동날 것이었다.

"여기서 탈락한 한 분을 제외한 두 분이 결승에 오르게 됩니다!"

채린이 말을 끝내자 PD가 잠시 녹화를 끊었다. 그리곤 우리를 불렀다.

"왜요? 다시 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PD가 말했다.

"원래 이틀로 뜨려고 했었는데, 지금 진행 상황 보니까 오늘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결승까지 다 녹화 따 버리는 게 어떨까?"

PD가 나를 보았다.

"어때? 할 수 있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이게 웬 떡이냐.

이틀 치를 하루로 퉁치면 나야 하루를 버는 거 아닌가?

PD는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분량이 안 나올 것 같았는데, 의외로 괜찮았나 보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다시 촬영이 재개되었다.

이어진 채린 안고 달리기.

그냥 서서 버티는 게 아니라 뛰면서 몸이 요동을 치고 혹시라도 앞으로 고꾸라지거나 넘어지면 채린도 다칠 수 있었기에 무척 조심해서 해야 하는 경기였다.

"안아 주세요!"

내 앞에선 채린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

아아, 이거 유행어로 미는 거냐?

보통 남자들이 보면 애간장이 녹을 만하다.

물론, 이미 본모습을 본 나한텐 전혀 안 통하지만.

"…."

나는 말없이 그녀를 안았다.

꺄아-하!

비명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릴 내며 그녀가 내 목에 팔을 하나 두르더니 말했다.

"출발!"

"…."

얘… 확실히 즐기고 있다.

나는 채린의 몸이 너무 심하게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속도를 조절하며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가벼운 채린이라도 바통을 들고 뛰는 거랑은 달랐으니까. 게다가 이 여자가 언제 날뛸지 모르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때,

"도민준."

역시나 시동을 거는 채린이다.

이번 게임은 카메라가 멀리서 풀샷을 주로 잡았고, 내 품에서 채린이 하는 말은 저쪽에 들리지 않았는데….

"걔가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

"다 봤거든? 너네, 친척 아니잖아."

예원이 얘기였다.

200미터쯤 달렸을 때, 채린이 두 팔로 내 목을 끌어안고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도 듣지 않았어? 내가 걔랑 유닛 할지도 모른다고."

"그래서요?"

"너, 걔 좋아해?"

"…."

"여긴 왜 나왔는데?"

"…."

나는 대답 대신 속도를 높였다.

얘랑 엮여서 좋을 게 없다는 걸 뼈저리게 체감 중 아니던가.

다다다다다다닥!

미친 듯이 달리자 채린이 흔들림에 입을 못 열었다.

-와아아아아아!

-빠르다!

-도민준! 도민준!

나는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서 다음 사람에게 채린을 넘겼다.

'후….'

채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청순한 표정으로 다른 남자에게 안겨 저 멀리 사라졌다.

'위험해. 정상이 아니야.'

잊지 말자.

쟤가 어떤 ×이었는지….

'예원이한테도 엮이지 말라고 해야겠어.'

저 여자가 내게 호감이 생겼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건 여자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느낀다.

그럼 왜?

글쎄, 잘 모르겠지만 아마 예원이를 질투하는 것 같은데, 내가 예원이랑 친하니까 그게 아니꼬운 걸까?

'처음엔 내가 밟히는 걸 보고 싶었겠지.'

그런데 그게 뜻대로 안 되고 심지어는 내가 두각을 보이자 심통이 난 걸지도. 어쨌든 결론은 이상한 여자라는 건 변함 없었다.

-힘내! 강하율!

-강하율! 강하율!

-할 수 있다! 거의 다 왔어요!

스태프들이 안쓰러운 목소리로 응원했다.

하지만 강하율이란 참가자는 한 바퀴만으로도 무척 지쳐 보였는데 여기까지 간신히 올라오긴 했지만, 사람을 안고 달리는 건 그에게 맞지 않은 종목인 것 같았다.

어찌어찌 겨우 버텨 세 번째 참가자에게 바통이 넘어갔다.

'아… 또 내 차례네.'

차라리 고블린이면 때려잡겠는데. 점점 다가오는 내 순서를 보며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윽… 한 바퀴는 더 돌아야 하나?'

강하율과 다르게 건장한 김우태는 채린을 안고 씩씩하게 달렸다.

"음하하하하하! 채린 씨! 괜찮으십니까?"

강하율과 반대로 이 종목은 그에게 너무나도 쉬운 것 같았다. 결국, 그게 재앙으로 내게 다가왔고, 심술궂은 바통이 내게 안기며 말했다.

"으으, 돼지 새끼. 짜증 나. 왜 자꾸 더듬는 거야?"

"…."

이제 나한텐 다 오픈했다 이거지?

나는 그녀는 안고 묵묵히 달렸다.

이번만 넘기면 강하율이란 사람이 탈락할 것이고, 게임은 끝날 거다.

참자. 참아.

조금만 더!

자본주의 미소! 아자!

"너, 방송에 욕심 있지? 그러니까 자꾸 기웃거리는 거잖아."

세 바퀴를 돌아서 그런가? 흔들림에 적응한 바통이 태연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닌데요."

"아니긴? 다 그래서 여기 나온 건데."

채린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우리 삼촌이 YY 대표야. 알지?"

"모릅니다."

알고 싶지도 않아요.

"모르긴, 풉. 잘 들어! 내 말만 잘 들으면 여기저기 꽂아 주는 건 문제도 아니야. 걔하고 붙어 있어 봐야 이런 게 가능하기나 할 것 같아? 너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면 깜짝 놀랄걸? 그깟 기지배 따윈 비교도 안 된다고!"

"…."

아, 왜 이렇게 머냐.

신문 800부 돌리는 것보다 더 힘들다.

"야! 듣고 있어?"

채린이 내 등을 꼬집었다.

"힘들어서 그럽니다."

괜히 잘못했다간 전처럼 미쳐 날뛸 수도 있단 생각에 입을 열었다.

"하긴, 많이 힘들긴 하겠다. 그래도 내가 가벼우니 할만하지 않아?"

채린이 찡긋 눈짓을 하며 계속 쫑알댔다.

"잘 생각해. 이 바닥, 뒷배 없이 크기 어려워. 나랑 친해지면 지름길로 가는 거야. 우리 엄마가 의사야. 아빠는 사업하시고. 어떻게든 밀어준다는 얘기거든. 내가 뜰 때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

관심 없다니까.

아, 방법을 바꿔야겠다.

"헉, 헉…."

나는 들숨 날숨을 들으라는 듯 크게 쉬었다.

힘든 거 아니다.

일부러 힘든 척하는 거다.

생수 가득한 가방을 앞뒤로 메고 매일 뛰어다녔던 나한테 이런 바통은 별 부담이 안 되지만, 이대론 못 버틸지도 모르겠다. 체력이 아닌 정신력이 고갈돼서.

"알았어, 알았어. 힘드니까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오케이?"

찡긋.

웃으며 손으로 내 어깨를 툭툭 치는 채린을 보며 나는 입을 꾸욱 닫았다.

참아야 한다.

500만 원이 걸렸다. 이건 단순히 체력 싸움이 아니다. 괜히 여기서 틀어졌다가는 최종 선택에서 나가리다.

-와아아아아아아!

-도민준! 도민준!

-쟤 진짜 괴물이네!

-대단하다!

-멋있다!

내가 두 바퀴를 돌자, 다음 주자가 똥 씹은 얼굴로 채린을 마주했다.

'끝났네.'

그래, 정말 끝났다.

이어진 강하율은 100미터도 못 가고 무릎을 꿇었다.

-20분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결승전을 앞두고 녹화가 끊어졌다.

채린은 저쪽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었고 PD는 그런 채린의 옆에서 뭐라 뭐라 떠들었다.

혼자 앉아 물을 마시던 내게 김우태가 다가와 앉았다.

"너, 의외다. 진짜배기였구나?"

유일한 고등학생 참가자가 결승에 올랐으니 이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냥 열심히 했어요."

김우태가 손을 뻗어 내 팔뚝을 잡았다.

"이게 그냥 열심히 한 근육이라고? 난 못 속이지."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했어? 복싱? 손을 보면 그건 아니고. 주짓수? 귀나 목이 유도나 레슬링은 아닌 것 같은데. 손톱도 멀쩡하고. 태권도 했나?"

나는 김우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말에서 뼈를 봤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세요?"

"다 해 봤으니까. 내가 단수 다 합치면 24단이 넘어."

"진짜요?"

"하하, 안 믿기지?"

그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야, 근데 너 진짜 뭐 했냐? 내가 네 살 때부터 아버지 따라서 운동 다녔는데 너 같은 근육은 처음 본다. 헬스장 근육은 아니잖아."

필라테스 근육입니다… 라고 말하긴 좀 그런데.

"말하기 곤란한 거야?"

"네, 뭐… 초면이기도 하고."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곤 명함 한 장을 꺼냈다.

"나중에 시간 나면 올래? 그러면 구면이잖냐."

"체육관…?"

"아버지가 체육관이랑 헬스장이랑 다 하시거든."

"아…."

"네 나이에 그런 몸만들기 참 어렵거든. 아버지도 보시면 재미있어하실 거다."

"무슨 체육관인데요?"

"종합 격투기."

"가면 그거 배울 수 있는 거예요?"

"돈만 내면 됩니다, 고객님."

헐, 지금 나한테 홍보하는 거?

그래도 구미는 당기는데….

"…비싸요?"

"나랑 친하면 대폭 할인되겠지?"

오늘따라 친해지잔 사람 많네.

그래도 채린 쪽보단 이쪽이 훨씬 낫지!

"그냥 준 거 아니니까 검색해 봐. 우리 체육관이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

그가 씨익 웃었다.

"너 같은 유망주는 언제나 환영이고. 체력, 근성, 다 합격이다. 그리고… 저 사람들은 내가 봐줬네, 뭐네 하는데."

그가 내게 상체를 밀며 목소릴 낮췄다.

"팔씨름, 난 진짜로 했다."

그가 벌떡 일어났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우리 아버지보다 낫거든? 어쨌든 영업은 여기까지. 이제 진짜 승부를 봐야지?"

김우태가 내민 손을 잡으며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볼 땐 편하게 형이라 불러. 가자."

-5분 전입니다!

"흐으, 살 떨리게 이쁘네."

채린을 보며 하는 말을 듣고 나는 픽 웃어 버렸다. 첫인상은 별로였는데, 알고 보니 솔직한 사람이었다.

"전화번호 물어보면 안 주겠지?"

줘도 받지 마세요.

"저런 천사가 어디서 나왔을까?"

"…."

사람 보는 눈 좋으시다면서요….

"저…."

"응?"

채린을 뚫어지게 보던 그가 나를 향해 고갤 돌렸다.

"제가 이겨도 되는 거죠? 이거 뇌물 아니죠?"

명함을 들며 말하는 나를 보며 김우태는 폭탄이 터진 것처럼 웃어 재꼈다.

"뭐, 뭐? 하하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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