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만약 내가 자세를 틀었거나 반동을 줄였다면 채린은 뒤로 나뒹굴며 떨어졌을 거다. 근데 그랬다간 방송 자체가 중단될 수도 있었으니 팔을 뒤로 뻗어 그녀의 몸을 받쳐 주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편해졌다는 게 아니었다. 다른 참가자들의 등에선 고고하게 앉아 숫자를 셌었지만, 지금 그녀는 야생마를 탄 아이처럼 두 팔과 다리로 내 몸을 꽉 잡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훅, 훅훅훅!"
-빠, 빠르다!
-벌써 20개야!
나는 원래 팔 굽혀 펴기 마스터다. 거기에 더해 최근엔 오늘을 위해 특훈까지 했었다. 그런 내가 채린 하나 매달려 있다고 해서 약해질 이유가 없었다.
-삼십 개!
"크흑! 크흐흐흐윽!"
채린은 내 등에 매달려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얼굴이 등에 부딪히기도 하고 코가 알싸하게 아프기도 했다. 하지만 떨어지긴 싫었는지 어떻게든 꽉 잡고 매달려 있었는데 그 모습이 결코 예뻐 보이진 않으리라.
-사십 개 넘었다!
-우와! 아까 팔씨름 이긴 게 우연이 아니었잖아?
-쟤 뭐야?
-엄청난데?
-사십오 개! 사십육 개!
모두가 숫자를 따라서 외칠 때, 내 등에서 필사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만…."
채린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간신히 얘기했다.
-오십!
모두가 외칠 때, 나는 우뚝 팔을 멈췄다.
"…으으으…."
내가 멈추자 채린이 등에서 내려와 비틀거리면서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쓸었다. 그러더니 나를 노려보았는데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너무 심했나?'
아니, 내가 뭐 때린 것도 아니고. 시키니까 한 것뿐이다.
-와아아아아아아!
채린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참가자들이 함성을 외쳤다.
-오십 개나 했어!
-대박!
-최고다! 도민준!
나는 채린의 시선을 무시하며 사람들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그리곤 잠시 촬영이 중단됐다. 채린의 매무새를 고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 돈 벌기 힘드네.'
그래도 하루만 버티면 되니, 이 얼마나 고소득 알바인가!
그때, 찌릿.
저쪽에서 강한 채린의 눈빛이 느껴졌다.
하지만 뭐.
'저런 시선쯤이야.'
40년을 솔로로 살았다는 건 그만큼 수많은 설움을 당해 봤다는 뜻이다. 내 인생에서 여자란 생물은 그저 고객님이거나 사장님이거나 완벽한 타인이었고, 공장에 다닐 때도 배달 일을 할 때도 언제나 여자들은 나를 남성이 아닌 '그 직업을 가진 아저씨'로 봤었는데, 이 정도야….
'우습지.'
솔직히 처음엔 나도 힘들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무뎌졌는데, 저 여자처럼 못되게 구는 사람이 많다 보니 본의 아니게 익숙해진 것이다. 특히 배달하며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게 되었고, 저 여자보다 더한 이들도 많았다.
사람의 본성이 가장 잘 드러날 때, 그때가 바로 나같이 깔보기 쉬운 이를 마주했을 때다.
'그런데 이렇게 돼서 어쩌나?'
나는 속으로 큭큭 웃었다.
화장을 고치는 채린의 등에서 분노와 억울함이 느껴졌다.
어쨌든 이제 두 경기만 더 하면 끝난다.
30분쯤 지나자 채린이 멀쩡한 표정으로 다가왔는데, 미세하게 떨리는 눈가는 숨길 수 없었다.
그녀가 작가에게서 받은 대본을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PD에게 말했다.
"시작할게요."
"괜찮겠어? 좀 더 쉬어도 되는데."
"아니요. 바로 할게요."
"좋아! 그럼 슛 들어가자고! 채린 씨 편할 때 바로 고 해!"
두 번째 경기는 여자 안고 오래 버티기다. 이상형 월드컵이라지만 체력전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냥 하면 재미가 없으니 이렇게 꼭 붙인 게임으로 구성해 놨다.
"자! 애석하게도 다섯 명의 참가자가 첫 번째 경기에서 탈락했는데요! 이제 남은 사람은 다섯 명!"
이 속도면 해 지기 전에 끝낼 수 있겠다.
"여기서도 두 명의 참가자가 탈락하게 됩니다! 두 번째 게임은 바로바로 저를 안고 오래 버티기입니다! 하지만 그냥 하면 심심하죠! 제가 계속 질문을 할 건데요! 대답하지 못하시면 페널티로 5초씩 깎입니다! 그러니까 대답에도 신경을 써야 하겠죠?"
-와아아아아!
-재밌겠다!
-그냥 버티는 것도 힘든데 인터뷰라니!
스태프들이 바람을 잡으며 분위기가 고조되자 채린이 뒤를 돌며 나를 노려봤다.
"…."
응? 뭐?
"도민준 님! 나와 주세요!"
두고 보자, 라는 눈으로 나를 부른 채린을 보며 무표정하게 나섰다. 아까의 일을 갚아 줄 생각인 것 같은데 뭘 하든 난 관심 없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돌발 미션: 최고를 증명하라. 보상: 500P.】
'엇?'
미션이라니? 이런 곳에서?
심지어 걸린 포인트도 높다. 고블린 1마리 죽어야 50포인트 간신히 얻는 건데, 500포인트?
"제 발이 조금이라도 땅에 닿으면 실패하는 거예요. 그러면 바로 시작할게요."
채린이 나를 보며 묘하게 웃었다.
그리곤 말했다.
"안아 주세요."
지켜보는 남자들이 숨을 흐흡, 멈출 정도로 고혹적인 말과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꿍꿍이가 있다, 이거지.'
그게 뭐든.
이제 내게 중요한 건 500포인트다.
'500만 원도 중요하지만, 500포인트면 생수가 50병이야. 혀를 깨물고라도 이긴다!'
번쩍!
채린을 두 팔로 안았다.
한쪽 팔은 그녀의 등에, 다른 한쪽 팔은 그녀의 다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곤 이내 깨달았다.
'아아, 이거냐?'
본래 사람을 안거나 업을 때는 안긴 사람의 협조도 중요하다. 그래서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환자를 옮기는 게 몇 배나 힘든 것이다.
"…."
씨익.
사악하게 웃는 그녀를 보니, 기도 안 찬다.
-오오오오!
-시작했다!
사람들은 못 느꼈겠지만, 채린은 지금 목석처럼 몸에 힘을 주고 있었다. 버둥대지 않아도 그것만으로 내겐 부담으로 작용했는데, 폭 안겨도 힘들 판국에 석고상처럼 뻣뻣하게 뻗대고 있으니 제대로 훼방을 놓겠다는 심보가 느껴져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머!"
꿈틀거린 내 눈썹을 본 건가?
채린이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팔씨름부터 팔 굽혀 펴기까지 팔로 하는 건 다 잘하시는 것 같았는데, 이건 부담이 되는 것 같은데요? 민준 님, 괜찮으세요?"
몸을 굳힌 채 입만 살살 놀리는 그녈 보니 짜증이 확 솟구친다.
아오, 이걸 확! 던져 버려?
'아니지. 500만 원에 500포인트야. 프로답게 가자. 이건 미션이고, 얜 장애물이야.'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팔이 심하게 떨리는 것 같은데요?"
"채린 씨를 안고 있어서 그런 겁니다."
"호호호! 이해는 해요!"
"…."
이해 못 한 거 같은데?
분노에 치가 떨린다고.
기분이 나빠진 나완 별개로 왠지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씽긋 웃으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민준 님은 평소에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나요? 아, 공부만 생각할 때던가요?"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그럽니다."
"공부 잘하시나 봐요?"
"기본은 합니다."
"운동은요? 무슨 운동 하세요?"
쉴 틈 없이 질문이 날아든다.
온 힘을 집중해야 할 판에 이렇게 말을 걸수록 집중력이 깨진다는 걸 알고 더 저러는 거다. 저 예쁜 얼굴로 좀비처럼 나를 물어뜯겠단 못된 심보.
그래, 얼마든지 해 보라지.
"여자 친구는요? 한창 관심 많을 때잖아요."
"없습니다."
채린의 눈매가 짓궂게 변했다.
"한 번도 없었어요?"
"네. 여자를 안아 본 것도 오늘이 처음입니다."
나는 지극히 사무적으로 말했다.
근데 솔직히 이건 뼈아픈 진실이다. 최근에 예원이와 가까이 지내고 있었지만, 이전의 삶에선 그 어떤 기회조차 없었다.
"…."
"…?"
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곧장 받아칠 줄 알았는데, 채린이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거리며 빤히 쳐다보았다.
'뭐 하냐.'
이때였다.
-10분 지났습니다!
-와, 벌써?
-10분 버티는 건 생각보다 쉬운 건가?
-아니야! 민준이 쟤가 보통이 아닌 거라고! 아까도 봤잖아!
소란에 채린이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그녀를 내려보며 말했다.
"언제까지나 괜찮습니다."
"푸웃!"
채린이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몸에 힘을 풀었다. 자동차 바퀴의 타이어처럼 딱딱하던 몸이 갑자기 말캉하게 변해 버리는 게 마법처럼 느껴졌다.
"좋아하는 아이돌 있나요?"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 없습니다."
"왜요?"
"제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우리 이야기는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스태프나 참가자들 모두 우리 얘기를 멍하니 듣고 있었는데, 나 역시 속으론 아무리 미워도 겉으론 1등을 해야 해서 최대한 비위를 맞춰 주었다.
"민준 씨는 나중에 뭐 하고 싶으세요? 의사? 변호사? 공무원?"
"아직 못 정했습니다."
우리 시선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내가 채린을 안고 있었고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인터뷰를 하니 당연한 거겠지만.
"존경하는 사람은요?"
"세상 모든 부모님을 존경합니다."
"왜요?"
"그럴 만한 삶을 사셨으니까요."
"민준 씨가 그걸 어떻게 안다고요?"
"…."
알지.
그리고 그보다 더한 것도 알고….
시간은 무색하게 흘러갔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장애물을 안고 있다는 걸 다들 잊은 모양인데?
이때, 시간을 재던 작가가 외쳤다.
-삼십 분 지났습니다!
-오오오?
-벌써?
-분량 다 나온 거 아니야?
-우리, 저 게임 연습할 때 얼마나 버텼었지?
-10분에서 30분요.
-그럼 이미 한계잖아?
PD가 나를 보며 웃었다.
-그런데 너무 멀쩡해 보이는데?
-채린 씨가 너무 가벼운가?
"…."
그래, 나는 멀쩡하다.
이렇게라면 5시간도 버티겠다.
채린의 질문이 이어졌다.
"민준 님은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설명하기 어려우면 연예인으로 말해도 돼요."
연예인이라. 더 모르겠는데….
"저희 어머니 같은 분이면 좋습니다."
"아니, 구체적으로요. 키라든가? 외모라든가?"
"음… 키는 160 정도. 김치볶음밥을 잘했으면 좋겠고…."
"…혹시 여기 나오기 전에 30년 전쯤 유행하던 노래라도 듣고 왔어요?"
"왜요?"
"아, 아저씨 같잖아요!"
채린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졌다.
"고1이란 거 뻥이죠?"
"그런 걸 뭐하러 뻥칩니까? 채린 씨는 방송에서 나이 속이시나 봐요?"
"누가요!"
하얀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더 뭐라 윽박지르고 싶은데, 방송이라 꾸욱 참는 게 보였다.
-사십 분 지났습니다!
그러다 들썩.
내가 그녀를 다시 고쳐 안으며 얼굴이 더 밀착되었다.
채린의 얼굴이 순간 화악 더 지펴지더니, 다시 질문했다.
"운동… 많이 한 것 같은데, 그쪽으로도 꿈이 있나요?"
"생각 중입니다. 하지만 일단은 공부가 우선이고요."
"의외네요."
새초롬히 대답하는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에 불을 켜고 물었다.
"아, 그럼 여자를 볼 때 외모를 먼저 보나요? 아니면 몸매? 솔직하게 말하셔야 해요!"
"…."
아니, 이 여자야.
내가 분명 어머니가 좋다고 하지 않았니.
"성격 봅니다."
"…."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는 건지 채린은 조금씩 질문 텀이 길어졌다. 이때가 50분을 넘길 때였다. 근 1시간을 그녀를 안고 버틴 거다.
-와, 씨, 부럽다.
-저게 인간이야?
-두 시간도 하겠는데?
사람들은 슬슬 경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이건 스쿼트를 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는데, 거기에 코어까지 딱 버텨 주니 내가 무너질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고역이라면 채린의 쓸데없는 질문?
이윽고 PD가 저쪽에서 사인을 했다.
채린이 그걸 읽고 아쉽다는 듯 말했다.
"제 예상보다 참가자의 체력이 너무 좋은 것 같은데요! 이번 게임에선 1시간이 넘으면 무조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할 수 있도록 규칙을 바꾸겠습니다! 자! 그러면 마지막 질문!"
-우오오오!
-그러면 무조건 1시간만 버티면 된다는 건가?
-으아, 1시간이 쉽겠냐고!
나를 올려보는 채린의 눈동자가 뭔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방송이 나가면 민준 님, 인기 많아질 것 같은데요. 누군가 고백한다면 받아 주실 건가요?"
"…."
고백이라니….
내 인생에 그런 건 떠올려 본 적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