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화
작가의 말이 한동안 이어졌다.
아무래도 출연자들이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디테일한 부분을 신경 쓰는 것 같았다.
'내가 보유한 포인트가 4,250.'
한 귀로 말을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일회용품이 아니라 언제나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아이템을 구해야 돼.'
전에 썼던 수호 부적 같은 것도 탐이 났지만 그렇게 계속 포인트를 소모해선 끝이 없을 것이다.
-30분 전입니다!
저쪽에서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릴 무렵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쪽을 향했다.
"채린이다!"
"와, 예쁘다!"
"채린! 채린!"
벌떡벌떡 일어선 참가자들이 그녀를 보며 환호했다. 지금부터 경쟁은 시작된 거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이건 좀 그런데.'
반가울 리 없었다.
이럴 땐 돈이 웬수다.
그래도 어쩌나. 500이 걸렸는데. 억지로 자본주의 미소라도 걸어야지. 쳇.
흐뭇한 미소로 걸어오던 채린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
근데, 뭐지? 이 싸한 느낌.
하지만 금세 채린은 홱 고개를 돌려 스태프 쪽으로 이동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작가가 반겨주었다.
"오느라 고생했어요! 언제봐도 채린 씬 참 예쁘네!"
"예쁘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직 그녀의 진면목을 못 봤는지 촬영장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내 분주함은 촬영장을 메우고,
-출연자들! 이쪽으로 오세요!
촬영이 시작되었다.
여자 한 명을 쟁취하기 위한 열 명의 남자들이 게임을 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시합으로,
-미리 고지했다시피 첫 번째 시합은 팔씨름입니다! 여기선 탈락자가 결정되진 않으니까 너무 긴장들 하지 마시구요!
일단 그녀가 가운데 서고, 우리가 병풍처럼 뒤로 자리했다.
예전이었다면 사회자가 나와서 진행했겠지만, 정규가 아닌 파일럿 프로그램이었고, 요즘 유행하는 '출연자 중심 예능' 형태라서 채린이 직접 모든 걸 다 해야만 했기에 그녀의 역할이 크다.
-오케이! 채린 씨! 편할 때 시작하세요!
"네! 후우…."
그녀도 방송 경험이 많진 않은지 긴장한 태가 역력했다. 크게 심호흡하더니 한쪽 팔을 번쩍 들고 외쳤다.
"안녕하세요! 채린이에요!"
-와아아!
-예뻐요!
코트를 벗은 그녀는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는데, 쭈욱 뻗은 하얀 다리가 유독 빛났다. 젊은 남자라면 반할 만한 외모다.
'이쁘긴 개뿔.'
물론, 어디에나 예외는 있었다.
아, 자본주의 미소. 잊지 말자.
"최고의 남친을 찾아라! 오늘 제가 여러분의 이상형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호호! 이 자리엔 최고의 남친! 열 분이 나와 계신데요!"
-와아아아아아!
작가들이 카메라 뒤로 앉아서 환호했다.
"다양한 매력을 지닌 열 분 중에서 과연 누가 일 등을 하게 될지! 저도 무척 궁금하네요! 우선! 두 분을 먼저 모시겠습니다!"
팔씨름을 하며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미 대진표도 다 나와 있었다.
나는 세 번째.
PD가 체급과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짰다.
"상금이 무려 500만 원이나 걸린 이상형 월드컵! 그 첫 번째 선수는!"
채린이 귀엽게 웃으며 이름을 불렀다.
"김우태 님!"
-와아아아아아!
-멋있다!
-든든하다!
김우태.
키 192cm에 110kg이지만 지방이 아닌 온몸이 근육으로 덮인 괴물! 나중에 이게 방송으로 나갈 때는 10명의 참가자 중에서 가장 피지컬이 좋은 남자로 소개될 것이었다.
'저런 사람이 한 명 더 있지.'
나는 옆을 봤다.
김우태와 맞붙을 사람 또한 거구였다.
'국가 대표 유도 선수라고 했던가?'
이 둘이 요주의 인물이었다.
둘의 경기를 잘 봐 두면 다음 경기에 도움이 되리라.
그런데 이때,
"다음은 도민준 님!"
"…?"
"…!"
응? 나?
나만 놀란 거 아니다.
순간적으로 모든 스태프와 출연자들이 얼어붙었다.
'지금 내 이름 부른 거 맞지?'
모두가 놀란 것관 반대로 채린은 예쁘게 웃으며 태연히 카메라를 보고 말했다.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와 최연소 참가자의 싸움! 벌써부터 궁금한데요!"
왜? 안 되나요? 라는 눈빛으로 PD를 응시하는 채린을 보며 나는 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래, 저런 여자였지.'
잠시 잊고 있었다.
-계속 진행합시다!
앞에서 스태프가 손짓했다.
우선 둬 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
상관없는 거냐?
"두 분! 앞으로 나와 주시겠어요?"
채린은 웃겨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
저거… 확실히 노렸다.
생각해 보면 채린이 나를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대기실에서 내가 예원이랑 있는 걸 봤을 테니까.
나는 PD를 봤다.
'미안해! 그래도 연습 게임이니까 괜찮을 거야!'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저 여자 성깔을 맞춰 주는 건가.'
PD도 채린에 대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도 해야만 했을 사정이란 게 있겠지.
'뭐, 물러설 이유야 없지.'
저 여자 농간에 500만 원을 포기 순 없잖은가.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그녀가 저쪽을 보며 아주아주 예쁘게 웃었다.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김우태가 말했다.
"김우태입니다. 22살이고요. 반드시 채린 씨의 마음을 얻고 싶습니다."
"호호호! 근육이 장난이 아닌데요! 평소 운동을 즐기시나요?"
"어렸을 때부터 이런저런 운동을 해 왔습니다. 지금은 대학을 다니면서 피트니스 센터에서 트레이너를 하고 있고요. 가끔 여러 격투 종목에 출전하기도 합니다."
"와! 멋져요! 팔씨름 많이 해 보셨나요? 남자들은 많이 하던데요."
"하하, 당연하죠! 살면서 누구한테 져 본 적 없었습니다."
"오오오!"
채린이 대단하다는 듯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며 감탄했다.
"…."
나는 그걸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작가들이 나를 보며 안됐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보다도 더 비참해 보였다. 누가 봐도 나는 약자였고 승리는 김우태에게 돌아갈 것이 확실했다.
"아후! 궁금해 죽겠어요! 그러면 바로 시작할까요?"
채린의 급진행에 PD가 저쪽에서 손으로 X 표시를 했다. 그리곤 채린에게 나를 보라며 손짓했다.
'내 소개조차 건너뛰는군.'
저 여자.
1초라도 빨리 내가 박살 나는 걸 보고 싶은 모양이다.
"호호호! 내 정신 좀 봐!"
채린이 내게 다가왔다.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도민준입니다. 고1이고요."
"아, 그러시구나. 연하 취향인 분들도 많으실 테니까 각자의 판단에 맡기고!"
더 궁금한 것 따윈 없다는 듯 휙! 돌아선 채린이 화사하게 웃으며 진행을 이었다.
"첫 번째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여자는 나를 지켜 줄 수 있는 강인한 남자에게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죠! 저 또한 그런데요! 내가 위기에 빠졌을 때 짠! 하고 나타나서 구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남자! 과연 누가 승리할까요?"
그녀가 뒤로 물러나며 공간이 마련됐다.
"…."
"…."
김우태와 마주 서니 그가 멋쩍은 듯 웃으며 내게 말했다.
"이건 예상 밖인데…."
미안한 표정 속에 비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어부지리로 첫 번째 경기에서 이겼다는 기쁨을 숨길 수 없는 것 같다.
"살살 할게."
그가 팔꿈치를 판에 댔다. 그러면서 씨익 웃었는데 나는 그런 김우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과거의 나였다면 이 판에서 절대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다들 내가 웃음거리가 되길 바라는 것 같은데.'
그 누구도 내가 이길 거란 생각은 못 할 것이다. 특히, 저 얄미운 채린은 즐기기까지 하고 있었으니 말해 뭐 해. 다른 남자들이 보면 예쁘게 눈웃음치고 있는 걸로 보이겠지만 내 눈엔 훤히 보였다.
어후,
꼬리 백 개 달린 여우도 너한텐 지겠다.
'하지만 이렇게 된 거.'
나는 팔꿈치를 대고 김우태의 손을 잡았다.
"자! 그러면 셋에 시작합니다!"
채린이 크게 외칠 때, 나는 무심한 눈으로 김우태를 바라보았다. 맞잡은 손에서 힘이 느껴진다. 체급에서 오는 거대한 벽은 물리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다. 5살 어린아이와 어른이 팔씨름을 하면 누가 이기겠는가?
"하나, 둘!"
그러나 여기 모인 모두가 모르는 게 있었으니….
"세엣!"
쾅!
시작하자마자 넘어가는 팔.
"…?"
"…!"
"허억…."
"뭐, 뭐야?"
나는 재능마켓 소유자.
나는 지난 시간, 압도적인 훈련량을 바탕으로 근력과 완력도 모자라 체력까지 올렸다. 또한 신문을 배달한다는 건 단순히 뛰는 운동이 아니다. 신문 하나하나를 뽑아서 던져야 하고 그게 하루에 800부다.
뿐인가? 무거운 불판을 요리조리 굴려 가면서 매일매일 닦아 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채린이 눈을 크게 뜨고 결과를 지켜보며 우물쭈물했다.
"우, 우태 님! 힘 안 주고 있었어요?"
김우태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와 잡은 손을 풀고 섰다. 그런 나를 김우태가 보며 말했다.
"아, 아니, 그게… 분명히…."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저 김우태 님이 방심했나?
-어떻게 된 거지?
다른 참가자들도 황당해할 때 PD가 박수를 쳤다. 그에 맞춰 작가들도 환호하기 시작했다.
휘익!
-멋있다!
바람잡이들처럼 분위기를 띄우려는 것이었다.
-잘했다! 도민준!
-도민준! 도민준!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뭘 하든 어서 빨리 끝내고 집에 갔으면 좋겠다.
"…."
그런 나를 채린이 바라보며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
.
.
연습 경기인 팔씨름이 끝났다.
이제 본격적으로 경합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경기에서 다섯 명이 탈락한다.
"이번 경기에선 승자 다섯 명만 남고 다섯 명은 아쉽지만, 작별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까처럼 연습이라고 대충 하시면 안 돼요!"
그녀의 말에 괜한 김우태가 움찔했다.
채린은 뒤를 돌아보며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사각에서 나를 표독하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걸로 확실해졌다. 쟨 나를 어떻게든 골탕 먹일 생각이다.
"그러면 바로 시작할게요! 이번 게임은 저를 업고 팔 굽혀 펴기를 하는 거랍니다!"
-으아, 그게 말이 돼?
-그냥도 힘든데 채린을 업고 하라고?
-죽었다….
이미 대본을 봤지만 참가자들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한두 마디씩 쏟아 냈다.
'팔 굽혀 펴기….'
나는 이걸 그 강남 오피스텔에 갇혀 1만 번을 해낸 남자다. 변수는 이제 채린을 업고 해야 한다는 건데.
"김우태 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김우태가 나오자 채린이 그를 보며 속삭였다.
"이번엔 잘하셔야 해요."
"당연하죠!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김우태가 엎드리자 채린이 그 위에 올라앉았다.
"하나! 둘! 셋! 넷!"
체력이 떨어지기 전에 하나라도 더 하려 했는지 김우태가 성급히 시작했는데, 채린이 그의 등에서 꺄아! 꺄아! 소릴 지르는 모습이 관전 포인트였다.
-미쳤다!
-30개가 넘었어!
-역시! 강한 남자였어!
김우태 47개.
이건 대단한 기록임엔 확실했다. 뒤이어 나온 참가자가 12개밖에 못 했으니 김우태의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가 이어졌지만, 누구도 김우태의 기록을 깨지 못했다.
'보아하니 서른 개면 안정권인가?'
하위 다섯이 떨어진다. 이 추세면 30개 정도 했을 때 5위권은 확실히 안착할 것이다.
"이제 다음 참가자! 도민준 님! 나오세요!"
-생각보다 어려운 경기네.
-보통 사람은 열 개도 힘들겠어.
사람들이 나를 보며 웅성댔다.
아까의 팔씨름은 요행이나 운, 혹은 김우태가 방심했다고 여기는 게 대부분이었다.
"흠."
채린의 앞에서 나는 그녀를 잠깐 지켜보았는데, 이번에도 인터뷰 따윈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계속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일단 엎드렸다.
"아으…. 싫은데…."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내 등에 앉으며 채린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댄 거다.
"빨리 끝내, 1초도 닿기 싫으니까."
"…."
누군가는 그녀를 한번 업어 보는 게 소원일지도 모르겠다.
뭐, 그 누군가에 내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시작하세요!"
내가 가만히 있자 채린이 버럭 외쳤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팔을 굽혔다.
팔 굽혀 펴기는 이렇게 상체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완벽히 내려왔다가 일어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대부분 팔꿈치 관절만 까딱까딱 굽혔다 폈다 반복하는데, 아까 김우태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완벽한 팔 굽혀 펴기를 구사했다.
-와, 제대로 하는데?
-아니야. 못 버티고 내려간 거 아닐까?
-아, 그런가?
-저거 봐. 못 올라오고 있잖아.
곁에서 보면 내가 힘에 부쳐서 얼어 나지 못하고 악착같이 견디는 거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과는 바로 나왔고,
부웅-!
내가 팔을 펴는 순간 채린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라 버렸다.
"…!?"
"…헙!"
모두가 입을 떡 벌렸을 때, 채린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