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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마켓-31화 (31/277)

#031화

솨아아아아아.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지 안개처럼 수증기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화장실 문턱이 거대한 빙벽처럼 느껴진다. 기력이 다한 것이다.

'아, 저기까지만 가면 되는데….'

주륵, 주르륵.

움직일 때마다 쏟아진 피가 오피스텔 바닥을 적시며 의식이 멀어져 갔다. 분명 다리를 다친 건 아닌데, 일어설 수가 없었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나는 어금니가 부서질 것처럼 이를 악물며 조금씩 이동했다.

'제발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질질….

차디찬 화장실 바닥을 지나 마침내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샤워실은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부들거리는 손을 뻗었다.

이내 물줄기가 내 몸을 타고 흘렀다.

흐린 물이 주르륵 온몸을 감싸며 떨어지자,

"아아아아…."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아아…."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따스한 물이 내 피부에 스며들자마자 멀어지던 의식이 번쩍 번개를 맞은 것처럼 돌아왔고, 가슴과 등, 어깨에서 느껴지던 고통이 말 그대로 '씻겨' 내려갔다.

"와…. 대박…. 이게… 가능하다고?"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이미 생수로 회복을 경험했던 나였지만 지금 내 몸에 펼쳐진 기적은 그것관 전혀 다른 놀라움이었다. 게다가 늑대의 발톱에 찢어지고 뜯겼던 옷마저 원래의 형태를 갖춰 갔는데, 언제 피가 묻었는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복구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 하하…."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회복 효과는 정신에도 영향을 끼쳤는지 기분마저 청아해졌는데, 불안, 초조, 고통, 아픔 따위는 손톱만큼도 내게 범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걸 어떻게 표현할까?

'이건 진짜….'

요즘 애들 말로 쩔었다.

【복구가 끝났습니다.】

【샤워실의 시설과 온수는 외부로 반출할 수 없습니다.】

【샤워로는 지병을 낫게 할 순 없습니다.】

나는 샤워실에서 나와 거울 앞에 섰다.

"허…."

절로 헛웃음이 터졌다.

거울 속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모습의 내가 보였기 때문이다. 피떡이었던 손도, 잔뜩 찢어졌던 가슴도 언제 그랬냐는 듯 뽀송뽀송 깨끗했는데, 오히려 피부는 더 좋아진 듯 보였다.

그렇게 미친 듯이 싸우고, 죽을 만큼 다쳤었는데….

"진짜 어이가 없네."

아까의 일이 현실이었다는 걸 증명하는 유일한 것, 그것은 내 손에서 반짝 빛나는 반지 하나가 전부였다.

.

.

.

나는 몸에 이상이 없음을 재차 확인하며 재능마켓에서 나왔다. 정신력도 회복된다 했지만,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싸움이었고, 그게 유쾌할 린 없었다. 당장은 그곳을 벗어나 머릴 비워야 마음이 좀 진정될 것 같다.

'점점 더 현실 감각이 없어지는 기분이야.'

나는 뛰기 시작했다.

저녁엔 고깃집 알바를 가야 했지만, 그 전까진 시간이 꽤 있었다.

'갈수록 더 모르겠어.'

고블린도 겪었으니, 그래, 늑대까진 그렇다 치자. 그런데 샤워를 하면서 경험한 건? '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게 가능하다고?

'대체 내게 바라는 게 뭘까?'

나는 이 경이로운 경험에 오히려 의문이 들었다.

과거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희한한 일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점차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나는 이전에도 그랬고, 과거로 돌아온 지금도 딱히 특출난 것도 없는 평범한 사람 아닌가?

물론, 이제라도 잘살아 보겠다고 죽도록 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후욱, 후욱!"

생각을 집중하려고 전력으로 뛰다 보니 숨이 가빴다. 그런데 이러면서도 황당함은 마찬가지다. 아까 그렇게 다쳤는데 이렇게 뛰고 있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아… 몰라, 몰라!"

달리기를 멈췄다.

"까짓거 여기까지 왔는데…."

뭐가 됐든 끝까진 가 봐야 하지 않겠나?

그래도 오늘 일을 겪고 하나는 확실히 배웠다. 더욱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 이번 난입 미션은 상상조차 못 했던 거였다. 그런데 죽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아이템과 포인트, 샤워 시설 사용권까지 얻었지만, 실패했다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미룰 게 아니야.'

당장 활 쏘는 법을 연습해야 했다. 그게 아니라도 뭔가 무기가 될 만한 걸 몸에 소지해야 했다.

'안일했어. 식칼이라도 가방에 넣어 둬야 했었는데.'

그랬다면 싸움이 조금은 더 쉬웠을지도 몰랐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해, 더 벼랑 끝에 몰린 것처럼.'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

.

.

고깃집으로 왔다.

알바 시간보다 일찍 와서 곧장 고기 보관하는 곳으로 향했다.

"할 말 있냐?"

아저씨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그렇게 칼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칼 써서 뭐 하게? 정육점이라도 차리고 싶어?"

"그게… 당장 말씀드릴 순 없지만, 진짜 절박하거든요."

아저씨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절박은 개뿔."

그리곤 고개를 돌려 고기를 잡고 칼질을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아저씨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걸 배워야 해!'

아저씨의 손에 들린 저 작은 칼.

지금 내 눈엔 그 어떤 용사의 보검보다도 강해 보였다.

사실 재능마켓 물건을 곰곰이 되짚어보니, 내가 검술이나 활 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교본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아이템은 많은데, 정작 그걸 사용하는 방법을 모른다? 이건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거랑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건데, 나는 지금 당장 '진짜 칼' 쓰는 법을 배워야 했다.

"…."

나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아저씨를 주시했다. 그런 내 표정을 본 아저씨가 꾸깃 이마를 찡그리더니 물었다.

"진심이냐?"

"네."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진짜 제겐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

아저씨는 타월로 손을 슥슥 문지르더니 말했다.

"따라와라."

아저씨는 나를 이끌고 가게 뒤로 걸어갔다. 내가 닦아야 할 불판이 보였다.

담배를 하나 꺼내 문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물었다.

"너라면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찾아와서 부탁하면 들어주겠냐?"

"아니요…."

하긴, 이게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긴 하겠다.

"하지만 제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학생이 뭔 목숨을 칼질에 걸어? 공부나 해, 인마."

"공부는 하고 있어요."

"더 해. 네 나이엔 좋은 대학 가는 게 삶의 목표야. 나중에 다 후회한다. 머리 쓰는 일을 해. 몸 쓰는 일 말고."

아저씨의 회의적인 답에 조급해졌다.

나는 아저씨에게 필사적으로 다시 말했다.

"성적표라도 가져올까요? 진짜 뭐든 알려 주시면 최선을 다해서 배울게요. 알려만 주세요."

그냥 지켜보는 거론 한계가 있었다. 나는 더 빨리 성장해야 하고 그래야만 나를 지킬 수 있었다. 난입이 벌어졌다는 건 두 번째, 세 번째도 발생할 수 있다는 뜻 아니겠나?

내 애절한 표정에 아저씨가 기가 찬 듯 말했다.

"뭐 있겠어? 칼이야 계속 써야 느는 거지."

"그래도 아저씨가 고기 자르는 거 보면 너무 쉽게 하시거든요."

"모르겠으면 공부해."

"공부는 지금도 하고…."

"아니, 고기 공부를 하라고."

아저씨는 피식 웃으며 내 가슴을 손으로 툭 쳤다.

"알고 보는 거랑 모르고 보는 건 천지 차이니까. 그리고…."

아저씨의 마지막 말에 나는 우뚝 섰다.

"이해만 하면 사람이든 짐승이든 어차피 다 똑같아."

아….

뭔가 머리를 퍽 친 기분이다.

.

.

.

일요일 아침.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서 신문 배달을 마쳤다. 이제 이런 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원래 삶에서도 우직하게 일하는 거 하난 잘했던 것 같다.

오늘은 촬영장에 가는 날.

사실 이걸 해야 할까 500번쯤 고민했었다. 그러나 돈이 필요한 걸 부정할 수 없었다. 활 연습을 하려고 해도 돈, 무장하려고 해도 돈, 공부를 하려 해도 돈이 들었다.

'별수 없지.'

내가 이거저거 가릴 때가 아니다.

촬영장으로 가는 길.

어제부터 급한 대로 핸드폰으로 인체 해부도와 의학 자료, 동물의 몸 구성 같은 것들을 찾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자료는 부족했고, 허위 정보가 허다했으니 전문 서적이 필요했다.

문득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똑같다는 그 말.

'맞는 말이야. 빨리 정보를 얻어야 해.'

내 머릿속이 더 치열해질수록 내 표정은 덤덤해져 갔다.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겠지.'

지난 삶에선 포기했었다. 그냥저냥 밥벌이만 하면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후회된다. 그때 뭐라도 알아 뒀으면 지금 좀 더 편한 길을 갔을지도 모르는데.

뭐, 그렇다고 해도 돌이킬 수 없으니 부정적인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잘하면 되는 거고, 후회의 순기능은 그걸 다시 답습하지 않는다는 거였으니까.

'오늘, 반드시 따낸다. 500만 원!'

덕소역에서 내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의지가 새롭게 타올랐다. 500만 원만 있으면 미션도 완료하고 활 연습장도 갈 수 있으며 다양한 책과 현실 무기를 구매할 수 있을 거다.

'이제부턴 포인트도 주먹구구로 쓰지 말고 확실한 목표를 정해서 가자.'

나름 철저히 한다고 했지만 돌아보니 아쉬운 점이 많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버스에서 내렸다. 오늘은 재능마켓은 잠시 잊고, 전력을 다해 난관을 넘어야 했다.

'저긴가?'

오늘 촬영은 세트장이 아니라 야외 촬영장이었다. 본래는 애견 카페라고 했는데 이 넓은 게 정말 카페가 맞는지 의심이 들 만한 규모였다. 잔디가 깔린 운동장이 저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저 앞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내가 크게 인사하자, PD가 정신없이 어디론가 걸어가다가 나를 보고 반색했다.

"오! 일찍 왔네? 저기 가서 기다리고 있어!"

스태프가 무려 40명이 넘었다. 출연자까지 합치면 60명에 가까운 듯 보였는데, 방송 하나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동원되는 걸 보니 놀랍다.

마흔 살이나 살았었지만, 처음 보는 세상이었다. 신기해 기웃기웃 둘러보는데, 여기저기에 시설들이 만들어져 있는 걸 보니 저것들을 활용해 미션을 수행하는 것 같다.

"으음…."

스탠드로 가자 저번에 봤던 출연자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들과 인사한 후 빈자리에 앉았다.

앞쪽 두 사람이 얘기 중이다.

"시청률이 잘 나와야 하는데 말이지."

"유튜브 하신다고 하셨죠?"

벌써 친해진 모양이다.

"어, 이번에 눈도장 확실히 찍으면 구독자 몇만은 그냥 늘거든."

다들 사심이 있나 보다.

'구독자라.'

그쪽이 어떻게 흘러가는진 잘 모르겠지만 이들의 목표는 500만 원만이 아닌 건 확실했다.

'꽤 운동들 좀 했나 본데.'

실내에서 봤을 때보다 이렇게 야외에서 보니까 확연히 몸이 드러났다.

'얕본다 이건가?'

오늘 가장 어린 출연자는 나였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시선은 그리 오래 내게 머물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야 좋지.'

오히려 안심하는 상대가 되는 게 좋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싸움에 앞서 상대를 파악하는 건 기본이다. 나는 출연자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폈다.

'오늘, 내 목표는 무조건 500이다.'

나는 어제만 해도 굶주린 늑대와 죽기 살기로 싸웠던 놈이다. 못 할 게 뭐가 있겠나?

비장하게 각오를 다지는데,

"안녕하세요, 호호! 긴장들 풀어요."

작가가 다가오면서 사람들을 향해 웃었다. 지난주에 대본을 보긴 했지만, 촬영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설명하러 온 것이다.

"아시다시피 오늘은 두 명만 남고 다 탈락하게 될 거예요. 파일럿이다 보니 최선을 다해 주지 않으면 분량이 안 나올 수도 있어요. 얼굴 나오고 안 나오고는 각자의 몫인 거 알죠? 캐릭터에 맞게 말하고 행동해야 재미있다는 거! 명심하셔야 해요!"

"…."

내 캐릭터가 뭐였지?

아, 연하 고딩 남친이라고 했나? 프레쉬(?)한 느낌이랬나?

'거참, 그게 먹히나?'

나는 주변을 보았다.

참가자들이 힐끔힐끔 서로를 보았는데, 경쟁자라고 생각하는 몇몇에 시선이 모였다.

나는 예외인지 날 향한 시선은 없다.

'방심만큼 큰 무기도 없지.'

뭐, 이렇게 된 거.

이왕이면 찐따 고딩에서 하나를 더 추가하자.

'육체적인 능력이나 경험으로 나를 압도할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고딩이 힘을 숨김, 이 정도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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