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화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그저 정육 일을 하시는 분이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남달랐다. 그 분위기는 나도 최근까지 알 수 없었던 거였다.
무언가를 죽여 본 사람만 가지는 그것!
"일 봐라."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하단 건지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주 조금은 남는 게 있었고, 나는 깊이 숙여 인사했다.
가게 뒤로 돌아와서 불판을 닦을 준비를 하는데, 방문자가 있었다.
"너… 정체가 뭐야?"
도화지였다.
"몰라요? 고딩?"
"아니, 그거 말고!"
도화지는 내 옆에 와서 쪼그려 앉더니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까 걔들, 우리 학교 일진들이야. 그렇게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애들이 아니었다고."
"그래서요."
"…넌 인생 참 쉽게 산다."
"그런 적 없는데요?"
내가 피식 웃자 그런 나를 도화지가 빤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돌렸다.
"무슨 운동 같은 거 해?"
"봤잖아요, 활 쏘는 거."
그녀의 이마가 일그러졌다.
"활 쏘는 거 배우면 너처럼 싸움도 잘해?"
"그럴 리가."
"너 진짜 이상한 애다."
"사람은 다 그래요, 평범한 척하는 거지."
"어쨌든… 오늘 일은 고마웠어. 나중에 신세 갚을게."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빚졌어요?"
"아니…."
원래 그 무리에서 함께 어울렸었다고 한다. 그게 다 부질없어져서 나왔는데, 그 뒤로 괴롭힘이 시작되었고.
"할머니가 아프셔서 내가 일해야 먹고살아."
"부모님은요?"
"아빤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엄만 얼굴도 몰라."
"미안해요."
"네가 왜 미안해. 우리 아빠가 미안해야지."
그녀가 일어났다.
"걔들도 그렇게 깨졌으니까 당분간은 몸 사리겠지. 그렇게 독한 애들도 아니거든. 다신 얼씬거리지 않을 거야."
"그래 보여요."
"얘가 완전 애늙은이네?"
"…."
대꾸하지 않자 도화지는 몸을 돌렸다.
"할머니 많이 편찮으신 거예요?"
"나이가 많으셔서 그래."
내 말에 도화지는 얼굴을 돌리며 처연하게 말했다.
"당뇨도 있으시고, 정신도 오락가락하시고."
"음…."
나는 고무장갑을 벗었다.
"야, 설마 나 안아 주려고 하는 거면 하지 마! 부끄러우니까!"
"내가 왜요?"
그녀를 지나쳐서 내 가방을 놔둔 곳으로 갔다. 그리곤 그 안에서 꿀물 한 병을 꺼냈다.
"이게… 뭐야?"
"할머니 드리세요. 누나가 먹지 말고."
병엔 효과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하루라도 편하지 않으실까?
"내가 이런 걸 왜 먹어!"
"좋은 거예요. 귀한 거니까 꼭 드려야 해요."
내 진지한 말투 때문일까?
"아, 알았어…. 고마워…."
도화지가 병을 주머니에 넣는 걸 보며 나는 다시 불판을 닦으러 갔다.
드링크도 그렇고, 꿀물도 그렇고, 어쩌다 보니 아이템을 내가 쓰지 않고 자꾸 주변에 돌리는 것 같다.
하긴, 그러면 뭐 어떤가? 기분이 좋으면 됐지.
그보다….
'틈틈이 아저씨를 봐 둬야겠어. 그 칼 솜씨를 배워 두면….'
또다시 내가 칼을 써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분명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직감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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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지는 예뻤다.
좋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성격도 밝아서 구김이 없었다. 언제나 빛이 났고, 그 빛은 다른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처음엔 아이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다.
없는 형편이었는데도 우르르 모여 다니면 적어도 먹을 건 걱정 없었다.
떡볶이도 먹고, 컵라면도 사 먹고.
그런데 최근에 그 돈들이 다 다른 아이들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걸 알았다.
"어휴, 또 이런다."
집으로 들어온 도화지는 어질러진 집 안을 보면서도 화내지 않았다.
"아니야. 혼내는 거 아니야. 괜찮아. 그러지 마."
벽에 어깨를 기대고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보며 도화지는 가방을 내려놓고 정리를 시작했다. 내일이면 또 어질러질 거였지만 정성을 다해 치웠다.
방바닥을 닦은 걸레를 빨아서 방으로 돌아온 도화지가 우뚝 섰다.
"어?"
할머니가 가방을 엎어놨다.
그런데 할머니 손에 갈색 병이 들려 있다.
"할머니!"
급히 달려가서 병을 빼앗았다. 병은 이미 싹 비워진 상태다.
"어휴, 어련히 줬을까. 급하게 먹다 체하면 어쩌려고!"
할머니 등을 토닥이는 도화지였다.
꺼억-!
트림을 하는 할머니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그렇게 맛있어?"
혀로 입술을 훔치는 할머니 모습이 귀여워 푸흡 웃어 버리는 그녀였다.
그녀에게 할머니는 엄마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이럴 수 있었다. 똥을 치우고, 토사물을 닦아도 그녀는 할머니가 계속 옆에 있길 바랐다.
그런데….
"어? 졸려? 할머니? 잠깐만! 이불 깔아 줄게!"
갑자기 눈을 감고 새근새근 조는 할머니를 보며 그녀는 급히 개 놓은 이불을 끌어당겼다. 할머니를 눕히고 기진맥진한 그녀가 할머니 베개를 함께 베고 몸을 웅크리며 누웠다.
'아으, 씻어야 하는데….'
이미 11시가 넘었으니 졸릴 만도 하다.
껌뻑 감긴 눈꺼풀은 다시 뜨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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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침까지 푹 잔 적이 있었나?
"아음…."
몸을 뒤척이다가,
벌떡!
"할머니?"
방 하나, 주방 겸 거실 하나.
"할머니!"
도화지는 허전함을 느끼고 급히 거실로 뛰어나갔다.
"어… 어어어어? 할머니?"
"우리 강아지 일어났어? 더 자도 되는데."
할머니가 이렇게 또렷하게 말하는 게 얼마 만인가. 심지어 이 냄새는?
'말도 안 돼….'
보글보글 끓고 있는 할머니의 된장찌개. 5년 전쯤 먹어 본 게 마지막이었다.
"씻어, 밥 먹게."
할머니가 도화지의 엉덩이를 손으로 두드려 주었다.
"하, 할머니…."
도화지는 죽는 거 아니지? 라는 말을 목구멍에서 간신히 삼켰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그런다지 않나?
"눈곱 봐! 흘흘…. 먹고 씻을래?"
"으응…."
1분 1초가 아까워서 그녀는 의자에 앉았다. 작은 식탁 위엔 이미 감자볶음과 계란찜이 있었다. 할머니가 가장 잘하던 반찬이다.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꿈을 꾸나? 이거 꿈이야?'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르겠다.
"내, 내가 할게!"
할머니가 냄비를 옮기려는 모습에 그녀가 화들짝 일어났다.
"괜찮아. 할미 아직 안 죽었어."
저 뜨거운 냄비를 맨손으로 옮기신다. 근데 그건 5년 전에도 그랬다.
"…."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그릇까지 앞에 두니까 꼬로로록, 배가 고팠다.
"흐흐흐흑!"
"밥 먹다 말고 왜 울어?"
"아니, 그냥…."
도화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너무 맛있어서…."
다시는 오지 않을 아침을 맛본 것만으로도 그녀는 행복했으니까.
"싱겁긴. 꼭꼭 씹어 먹어! 체해!"
"으, 으으응."
어젠 그녀가 할머니 등을 두드려 주었는데 오랜만에 아이로 돌아온 도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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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발 미션을 완료했습니다. 500p를 받았습니다.】
【누적 포인트 2,550.】
【재능을 나눴습니다. 보상을 수령하세요.】
"응…?"
이런 아침부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미션이 끝났다니 기분은 좋다.
'하나가 또 두 개가 됐네.'
확인하지 않아도 보상이 꿀물이란 건 예상이 되었다.
'이럴 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굴려 봐?'
내겐 꿀물 3병이 있다. 내가 필요해서 써야 할 때는 거둬야겠지만, 그 전까진 사방에 뿌려서 '배양'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수도 되려나?'
이건 내일 시험해 보자.
마침 촬영이 있으니까 다른 이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고 건넬 수 있을 거다.
'포인트를 쓰지 않고 소모품을 늘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갑자기 만두가 떠올랐다.
그 맛있는 만두도 누군가에게 주면 두 배가 되어 돌아오려나? 만약 그렇다면 세계 제일의 만둣집을 차릴 수도 있겠다.
뭐,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겠지만.
"상상만 해도 재밌네."
강남에 가는 길에서 웃음이 났다. 누군가와 공유할 수 없는 얘기였지만 이미 즐겁다.
【미션 완수까지 199.003km 남았습니다.】
드디어 200km가 깨졌다.
그간 꾸준히 달렸고, 매일 신문을 배달하면서도 남은 거리를 줄여 왔다. 돈 모으기 미션은 다음 달 월급이면 알아서 될 것이다.
'하루 20km씩 줄이고 있으니까 앞으로 열흘!'
한 걸음, 한 걸음.
티끌 모아 태산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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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토요일.
예원이의 방송도 끝났고, 학교에도 가지 않으니 일찍부터 재능마켓으로 향하고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재능마켓부터 뛰고 고깃집 알바에 갈 생각이다.
'익숙해졌어.'
이젠 강남까지 뛰어왔는데도 지치지 않았다. 심지어 생수가 가득한 무거운 가방을 멨는데도 말이다.
'더 무거운 걸 찾아봐야겠는데?'
아령이 있으면 좋겠지만, 돈 주고 사야 하는 건 패스.
일단은 이거로 버텨 보자.
"흐으… 빨리 돈 벌고 싶다."
나는 요즘 하루라도 빨리 양궁장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어제 쏴 본 활의 감각이 계속해서 잔상처럼 머리에 남아 있었다. 이래서 당구나 게임에 빠지면 계속 생각나나 보다.
"으차!"
단숨에 5층까지 계단을 뛰어올랐다.
511호 앞.
여전히 필라테스를 가장한 재능마켓이다.
'오늘은 팔 굽혀 펴기를 마스터해 봐?'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등에 올라타 있다고 가정한 종목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안에 들어가자마자 문이 세게 닫혔다.
콰앙!
【재능마켓에 입장하셨습니다.】
【미션을 완수하기 전엔 재능마켓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무슨 미션…?"
내가 모르는 미션이 있었어?
황당해서 눈을 크게 뜰 때 소름이 쫘악 돋았다. 저 안쪽에서 뭔가 움직이는 걸 본 것이다.
【난입!
굶주린 맹수가 냄새를 맡았다.
성공 조건: 맹수 사망.
실패 조건: 플레이어 사망.
보상: 1,700P.
확률적으로 굶주린 맹수가 드롭하는 아이템을 얻을 수도 있다.】
'난입이라고?'
익숙한 공간에 낯선 것이 도사리는 공포는 상상을 초월한다.
크르르르르르…!
필라테스 기구 아래에서 이쪽을 보며 웅크리고 있는 무언가.
얼핏 다리가 보인다.
아니, 송곳니가 보였다.
꼬리가 있고, 주둥이가 튀어나와 있는 그것은,
'개? 아니야, 저건….'
늑대였다.
"젠장!"
나는 다급히 가방과 하드 케이스를 내려놓고 주변을 보았다. 무기로 쓸 만한 게 없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내게 무기 선택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냥 싸우라는 거다.
'활을?'
아니다. 겨냥할 시간조차 없다.
하지만 내 손은 빠르게 케이스를 열어 활을 두 손으로 잡았다.
"후우, 후우…."
놈이 달려들면 이거로 후려치기라도 해야 할 거다.
'방심했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인데.'
화장실에서 튀어나오거나 2층 공간으로 가거나, 이렇게 나만의 틀에 가두면 얼마나 위험한지를 간과한 내 잘못이었다!
설마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목이라도 물리면 끝장이야. 진짜 죽는다….'
얼마나 굶었는지 늑대는 삐쩍 말랐지만, 눈빛은 예리했고 이빨은 무시무시했다. 불량배 예닐곱보다 저 한 마리가 더 압도적인 건, 놈도 나를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녀석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더 가면 안 돼.'
안쪽은 넓었다. 그나마 여기 있어야 놈이 공격할 수 있는 방위가 한정된다. 살면서 늑대를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분명한 건 놈이 나보다 빠르고 민첩하며 높고 멀리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까득.
어금니가 갈렸다.
'여기서 승부를 가린다.'
한 달 전이었다면 나는 오줌을 지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몇 번의 싸움을 통해 경험을 얻었고 그간 쌓은 피지컬은 자신감을 품게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저 맹수 앞에서 자만은 금물이었다. 놈의 송곳니와 발톱은 일진 놀이에 빠진 녀석에게 잡힌 칼 따위보다 훨씬 날카로울 것이니까.
이때,
'온다!'
점차 늑대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