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화
나는 씨익 웃었다.
한동안 미션이 없어 정체된 게 답답했었는데, 이게 웬 떡인가?
-허? 저 ×끼가 웃네?
-미친 건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내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당연할 것이다. 근데 그건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다.
'뭐든 좋으니까! 수락!'
【돌발 미션을 수락하셨습니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시오.
때로는 한 번의 선행이 대상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시간제한 없음.
보상: 500p.】
무려 500포인트나 준다고?
그냥 떡이 아니라 꿀떡이었네?
500포인트면 생수 50병의 가치다. 고블린 10마리를 잡아야 하는 난이도고.
'저놈들만 해치우면 되는 건가?'
우드득.
목을 좌우로 꺾으며 녀석들을 향해 걸어갔다.
지난번엔 못 봤던 남자들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좀 친다, 이거야?"
"하나도 안 쪼네?"
"복싱이라도 하냐?"
"따라와."
녀석들이 골목 안쪽 주차장으로 향했다. 도화지가 인질로 잡혀 있었다.
-가라니까! 왜 왔어! 바보야!
도화지는 나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아…."
고깃집에선 그렇게 밝던 누나가 얘들 앞에선 왜 이런다냐.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이런 건 내 성미에 안 맞는다.
『잘 부탁해, 하얀 가면!』
갑자기 예원이 목소리가 들린 것 같다.
그래서 웃겼다.
'영웅심은 아니야. 난 원래 이런 놈이었어.'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하지만 그때는 깡만 있었고, 이젠 힘이 생겼다.
"이 새×가! 또 실실 쪼개네?"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이잖아?"
"하…! 우리가 그렇게 우습냐?"
내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은 일곱. 그중에서도 이 셋이 가장 나댄다. 도화지를 잡고 있는 여자 셋은 끼어들지 않을 거니까….
스윽, 주변을 둘러보았다.
담장 때문에 바깥에선 보이지 않는다.
'여럿이 둘러서기엔 좁아.'
그렇다는 건 한 번에 상대해야 할 적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의미!
나는 어깨를 펴고 서서 말했다.
"애석하게도 내가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 주의라서 말인데."
내 목소리에 녀석들이 흠칫했다.
불리한 상황에서 너무도 태연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면 한 번에 다 오지 그랬어?"
내 말에 키가 가장 큰 남자가 담배를 꺼내더니 불을 붙였다. 그러곤 말했다.
"여기가 네 구역이라며?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
"크큭, 맞아 봐야 정신이 번쩍 들지! 야, 영준이가 우리 학교 2학년 대가리거든?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빌지 그래?"
아, 저 키 큰 놈이 영준이? 보스라는 뜻이겠지?
'일이 더 쉽겠네.'
겁을 주려고 한 말이겠지만 놈들은 실수했다.
대가리라고?
그래, 원래 대가리가 떨어지면 팔다리는 무력화된다.
"바쁘니까 할 거면 빨리하자."
알바 가야 한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키가 작고 뚱뚱한 녀석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태클이군.'
녀석은 어깨로부터 밀고 들어오는 걸 보니 나를 넘어뜨릴 요량인 것 같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상대가 나라는 게 문제지!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
근래 여러 운동을 병행해 왔다. 가방에 생수를 꽉꽉 채워 담고 봉천동에서 강남까지 뛰거나, 오피스텔 안에선 그 가방을 앞뒤로 메고 팔 굽혀 펴기를 했다.
한데, 이게 끝이 아니다. 모래주머니처럼 주렁주렁 멘 두 개의 가방은 모든 운동을 할 때 항상 함께였는데, 스탯이 오르지 않아도 운동 자체가 내 근력을 폭발적으로 성장시켰다.
거기에 코어.
코어가 자랄수록 몸의 균형과 감각이 더 살아났는데, 저놈이 달려들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이런 차분함과 판단력을 가질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금!'
어깨에는 체중을 싣는다. 달려오는 힘까지 받아서 더 많은 운동 에너지를 폭발시킬 수 있다.
하지만 벽에 부딪히면? 차에 박으면?
당연히 나가떨어지는 건 어깨다.
퍼억!
-아아아아아악!
놈이 달려오던 속도보다도 빠르게 뒤로 널브러졌다. 내가 오른발로 걷어찬 거다. 만약 내 다리 힘이 녀석보다 약했다면 날아가는 건 이쪽이었겠지만, 내 다리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700km 넘게 뛴 다리다. 뿐인가? 스쿼트도 10,000개나 하셨다.
겨우 저런 놈에게 밀릴 운동량이 아니란 말이다.
"…?"
"…!"
놀란 녀석들이 자릴 잡기 전에 나는 다리를 회수하며 즉시 앞으로 달려 나갔다.
"히이히익?"
역시 애들은 애들이다.
한 놈이 나가떨어졌어도 아직 여섯이나 남았는데, 다섯 놈이 얼어붙었다.
'뻔하지, 이런 녀석들.'
영준이란 녀석 하나를 제외하면, 내 속도에 반응도 하지 못했다.
"…."
나는 다른 녀석들은 제쳐 두고 녀석의 코앞으로 나아가 냅다 주먹을 내질렀다.
영준이는 그런 나를 보며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내 주먹을 잡으려고 했다.
훗, 잡으려고?
이게 너의 첫 번째 실수.
퍼억-!
"으읍? 무슨 놈의 힘이…."
녀석의 상체가 뒤로 후욱 밀렸다.
애초에 녀석을 타격하려고 내지른 주먹이 아니었다. 나는 아까 첫 번째 놈이 내게 하려던 동작을 그대로 따라 했던 것이다. 주먹을 거두며 어깨로 영준이의 가슴팍에 파고든 거다.
"어? 어어어어?"
어릴 적엔 뭣 모르고 달려들었다. 중학교 땐 악과 깡으로 대항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싸움 기술을 배운 적이 없다는 거다. 하지만 수없이 맞아 봤고, 무리를 지어 다니는 놈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안다.
"커헉!"
지금과 같이 섞여 뒹굴면?
"니가 머리라고?"
깔린 놈은 죽는 거다.
"야… 자, 잠깐…!"
꽈앙!
놈의 얼굴에 내 이마가 직격했다.
"끄, 끄아아아… 악!"
이런 개싸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다.
얼굴에 한 방 받았으니 이제 일어나야 했다. 내 뒤를 노리는 놈들이 많다.
하지만 그냥 일어나면 후환을 남겨 두는 거다.
자근.
일어나며 영준이의 가슴을 밝는 것과 동시에 도약했다. 그러면서 밟는 발에 힘이 실렸으니 영준이의 가슴팍이 으깨진다.
"아아아아아아악…!"
자, 머린 잘랐고.
"내가 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여섯을 보며 나는 킥, 웃었다. 이놈들, 내 생각보다 더 샌님들이다. 가해에만 익숙한 녀석들은 이렇게 피해자가 되었을 때 대응하지 못한다.
"아, 아니…."
"우리는…."
"야, 어떻게 좀 해 봐."
"영준이도 원 킬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하라고?"
"저놈 찐이잖아!"
나는 싸울 의지조차 없는 놈들을 가로질러서 도화지 앞으로 걸어갔다. 도화지에게 말을 걸려는 게 아니다. 그 옆에 있는 여자, 아까 도화지의 머리채를 잡았던 여자다.
"인성고등학교?"
가슴팍 학교 문장을 보며 물었다.
"…."
"내가 눈에 띄지 말라고 했었지?"
"그, 그게…."
"마지막 경고야. 또 이러면 다음번엔 내가 너희 학교로 찾아간다."
나는 팔을 뻗어 녀석의 넥타이를 잡아끌었다.
"으으으…."
"진짜 죽을 각오 한 거 아니면…."
녀석의 얼굴을 바짝 끌어 말을 이었다.
"시작도 하지 마."
넥타이를 놓자 녀석이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개×끼야…. 거기 서….
영준이가 손으로 코를 감싸며 일어났다. 코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그런데 놈의 손에 작은 칼이 들려 있다.
"…."
나는 그걸 보며 쯧, 혀를 찼다.
그리곤 아까 던져둔 내 가방 옆 하드 케이스로 걸어갔다. 무심하고 자연스럽게 케이스를 열어 내용물을 꺼내 든다.
"저게 뭐야?"
"저런 미친!"
"활이잖아?"
"히이익?"
나는 기겁하는 놈들을 무시하며 화살 한 대를 꺼내 시위에 걸었다. 그리곤 영준이를 보며 말했다.
"자신 있어? 정말 죽을 수도 있다?"
"이런 씨×…."
이미 녀석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자존심 때문에 칼을 쥐었지만 그걸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르는 놈이다.
"경고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평생 뒤통수 조심하면서 살아가야 할 수도 있어."
씨익 웃으며 시위를 당겼다.
그리곤 빠르게 놓는다.
속사!
"…꺄아아악!"
여자들이 비명을 지를 때, 화살은 영준이 머리 위로 날아가 큰 나무에 꽂혔다. 촉이 나무 깊이 파고들었다.
파악!
'잘 맞았네!'
첫 실전이었는데 명중했다.
빗맞았으면 얼굴이 화끈거렸을 거다.
"…."
나는 활을 케이스에 넣고, 가방을 들었다.
뒤로 후다닥 따라오는 도화지가 느껴졌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활을 연습하길 잘했어. 확실히 원거리 무기라서 방어에 대한 부담이 적어.'
움직이는 대상을 맞히는 건 다른 문제겠지만 숙련한다면 효과가 끝내줄 것 같다.
'급소에 관해서 공부해야겠어. 가장 효율적인 타격점을 익혀야 해.'
번화가로 나왔다.
저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누군가에겐 지옥이 펼쳐져 있겠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살아간다.
'미션 완료가 안 뜨네. 뭐가 부족한 건가?'
어쩐지.
500포인트짜리가 이렇게 쉬울 리가 없지.
나는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가게를 둘러보니 오늘은 사장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알바가 사장님 댁에 일이 생겼다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오늘 늦을 거라고, 어쩌면 못 올 수도 있단다.
고갤 끄덕이고, 불판이 있는 가게 뒤로 돌아갔다.
"아, 안녕하세요."
그런데 거기엔 아저씨가 있었다.
고기 손질하시는 그분 말이다.
아, 왠지 이 아저씨는 말 걸기 어렵다.
그대로 꾸벅 인사를 하곤 작업 준비를 위해 가방을 내렸다. 내가 고무장갑을 끼고 준비하는 걸 힐끔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던 아저씨가 대뜸 물었다.
"싸웠냐?"
"…어떻게 아셨어요?"
"거기, 피 묻었다."
"아…."
목 아래의 옷깃에 영준이 피가 튄 모양이다. 엄마가 보면 걱정하시겠지? 불판 닦기 전에 빨아 둬야겠다.
아저씨는 나를 보더니 담배를 끄고 말했다.
"네 나이 때는 그게 좋아 보여도 나중엔 후회밖에 없어. 발 들이지 마라. 그거 중독된다."
"뭐가요?"
"사람 때리는 거."
나는 순간 되물었다.
"…사람이 아니면요?"
"뭔 소리야. 설마 길고양이라도 죽인 거냐?"
나는 풋 웃어 버렸다.
고블린이나 좀비를 어떻게 설명하나?
나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를 지키지 않으면 죽어요. 그래서 싸워야 한다면요?"
아저씨가 나를 노려보았다.
"…."
나도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
10초? 15초?
남자와 이렇게 오래 눈을 맞춰 본 적은 처음인 것 같다. 그런데 뭐랄까? 이대로 눈을 돌리고 싶진 않았다. 내 진심을 알아줬으면 좋겠달까?
'나도 모르게 형이라고 부를 뻔….'
정체를 감추려면 더 조심해야 했다.
"음…."
아저씨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따라와라."
그리곤 대뜸 나를 이끌었다.
어디로 가냐고 묻진 않았다. 묵직한 분위기에 조심스레 발길을 따랐다.
좁은 복도를 따라 간 곳은.
'여긴….'
아저씨가 늘 고기를 작업하는 곳이었다.
"들어와."
안쪽 공간이 그리 넓진 않았다.
'피 냄새….'
그리고 그것에 더한 동물의 '살' 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는데, 아저씨는 벌컥 냉장고를 열더니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꺼냈다.
"…!"
딱 봐도 엄청나게 무거울 것 같은 고기. 하지만 아저씬 그걸 한 손으로 능숙하게 잡아 옮겼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손의 힘만으로.
터엉!
아저씨는 고길 조리대에 내려놓더니 칼을 잡았다.
"죽고 사는 문제가 끝나면, 결국 남는 건 이런 보잘것없는 것뿐이야."
아저씨가 능숙하게 고기를 잡고 도려냈다.
"하지만 이게 근본이지. 살과 뼈, 그리고 피와 지방."
아저씨의 투박하고 작은 칼은 마치 내가 썼던 용사의 검처럼 너무도 쉽게 고길 잘랐다.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이해하면 된다."
어깨너머라지만, 내가 '결'과 '관절'에 대해 배운 첫 수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