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화
나는 고딩이다, 고딩이야.
아찔해지는 정신과 묘한 죄책감을 가까스로 날려 버릴 때 구원자가 등장했다.
-예원 씨, 준비됐어요?
급히 열린 문 덕분에 어색함이 깨졌다.
"네!"
막내 PD가 들어와서 붉어진 예원이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오늘 순번이 끝이라 긴장 많이 되죠? 그래도 이제 다 왔으니까 힘내야 합니다! 정신 차려야 해요!"
"알아요, PD님. 저 진짜 괜찮아요."
우리 같은 고등학생에게 1억 원의 상금은 환상 같은 거다.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1등을 하고 싶다는 열망만큼은 지지 않는다.
"잘할게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웃는 예원이를 보며 막내 PD가 숨을 휴우, 몰아쉬며 끄덕였다. 그러더니 나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전에 말했던 그 방송 출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었고, 오늘은 예원이의 일생일대의 사건이니만큼 이쪽에 집중해야 했다.
"참, 이건 비밀인데 제가 개인적으로 예원 씨 팬인 거 알죠?"
"호호! 비밀을 이렇게 쉽게 말하고 다녀도 돼요?"
"저 원래 공과 사를 구별 못 하는 놈입니다! 하하!"
"아쉬워서 어떡해요."
"이 바닥에 있다 보면 또 마주치게 되어 있어요. 그때는 제가 밥 한번 살게요."
"제가 사 드려야죠. 이렇게 고생하셨는데요."
"그러면 한 번씩 두 번 보죠! 공평하게!"
막내 PD의 넉살에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이제 진짜 가야 할 시간이다.
나는 예원이를 보며 눈인사를 했다. 그리곤 방청석으로 향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지켜보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열기를 더해 가는 사상 최고의 스타 탄생 프로젝트! 이제 마지막 무대만 남겨 두고 있는데요!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국민 여동생 타이틀이 오늘 바뀔 것인가! 조마조마한 순간입니다!
내가 예원이를 오랫동안 지켜본 건 아니었지만 예원이는 오늘이 가장 편안해 보였다.
'꿀물 효과 좋네.'
지능이 오르거나 힘이 불끈 솟는 건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실히 보여 주는 아이템 아닌가?
'평정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한텐 보물이겠어.'
-와아아아아아아!
예원이가 무대로 나왔다.
나는 녀석을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우선 무얼 하려 해도 돈을 벌어야 하니 사업을 구상하는 편이 낫겠지?'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라도 조금씩 가닥을 잡아 가다 보면 길이 열릴 것이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살아가는 삶을 살 건 아니니까.'
혼자 비참하게 사는 삶이 어떤지는 내가 가장 잘 알지 않은가?
-진예원 참가자! 오늘 선곡은…!
드디어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전주가 흘러나왔다. 원곡을 예원이 맞춤으로 편곡해서 더 호소력 짙고 감성적인 도입부가 됐다.
'역시 잘하네.'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다 자란 딸아이를 보는 기분이 이런가?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 고생했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수고했어.'
노래를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었다.
'진예원.'
누가 뭐라고 해도 오늘 1등은 예원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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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열기는 언제나 빨리 식는다.
예원이는 최선을 다했지만, 한민의 압도적인 소녀 팬에 밀려 2등을 했다. 심사 위원 점수는 한민보다 높았지만, 문자 투표에서 2배가 넘게 차이가 나 버려서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예원이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부담을 내려놓은 듯 밝았다.
일요일 아침.
【오늘부터는 운동도 해 보려고.】
【운동은 왜?】
【채린 언니 보면서 나도 가꿔야겠다고 생각을 했었거든.】
【지금도 날씬하잖아.】
【그냥 마른 거 말고. 탄력 있게!】
【아, 그래.】
희소식도 있었다.
【아빠가 저녁에 말씀하시더라고. 고생했다고.】
【오! 이제 지지하시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반대는 안 하실 것 같아.】
어쩌면 그게 1등 상금보다 훨씬 값진 것일지도 몰랐다.
톡을 하다 보니 나는 오늘도 방송국 앞에 도착해 있었다. 예원이한테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혹시 우승이라도 하게 되면 그때 얘기해 줄 생각이었다.
'너무 빨리 왔나?'
PD에게 전활 걸어 보았다.
-2층으로 올라와서 맨 오른쪽 끝방으로 오세요!
오늘은 간단한 브리핑이 있는 날이라고 했다. 출연자들과 스태프들에게 인사도 할 겸 대본도 숙지해야 한단다.
"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스태프들이 모여 있었다. 작가 세 명과 조연출, 막내 PD도 있었다. 아, 여기선 막내가 아닌가?
"어서 와! 민준 씨!"
여전히 텐션이 높은 사람이었다.
"인사들 해. 내가 얘기했던 도민준 씨야. 우리 출연자들 중에서 최연소! 어때? 마스크 괜찮지? 요즘은 찐따미가 먹힌다니까?"
"…."
뭐지, 먹이는 건가?
찐따미는 또 뭐야?
하지만 내 표정이 더 재미난 듯 작가들이 나를 보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뜯어봤다.
"자자, 모두 우리 막내 잘해 주도록 하고! 몇 사람 더 오면 시작할 거니까 대본 보고 있으면 돼."
"네."
자리에 앉아 두툼한 대본을 보았다. 대사가 정해져 있진 않았지만 어떤 순서대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지는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민준이 너는 한 여자만 바라볼 것 같은 '훈남 찐다' 캐릭터로 가는 거야."
"…연기해야 하는 거였어요?"
"하하하! 연기는 무슨? 그냥 하던 대로 해. 그게 네 캐릭터니까. 근데 교복 입고 올 거야?"
"안 되나요?"
"아니, 오히려 그게 나을 수도 있지. 누나들이 환장하게 해 봐."
첫 촬영은 다음 주 일요일이라고 했다. 장소는 남양주. 다행히 지하철이 근처까지 간다.
"연습 경기는 팔씨름이고, 여기서 첫 번째 호감 투표가 진행될 거야."
게임은 단순했다.
팔씨름, 여자 등에 업고 팔 굽혀 펴기, 여자 업고 달리기, 두 팔로 여자 안고 오래 버티기….
'헐, 이래서 힘이 좋아야 한다고 했구나.'
근데, 이런 걸 누가 보기는 하나?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여성 출연자는 어떤 분이세요?"
"곧 올 거야! 보면 알걸? 미리 섭외하느라 엄청 힘들었다고!"
번뜩번뜩.
남자 출연자들의 눈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5분쯤 지났을까?
"실례합니다."
목소리가 들려오고,
"어서 와요! 채린 씨!"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시간 딱 맞춰서 왔네! 하하! 다들 인사해요. 어제 방송 봤지? 슈퍼스타 박채린 씨입니다!"
하…. 쟤가 왜 여기서 나와?
.
.
.
때려치워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했다.
하필 왜, 저 여자란 말인가?
그런데 그깟 방송, 1등만 하면 500만 원, 못해도 일당이 무려 20만 원이다. 저 여자 때문에 내가 안 할 이유가 없다.
미팅이 끝나고, 고깃집에 가서 알바를 한 뒤 재능마켓 오피스텔로 왔다.
"이제 여기가 제일 편하네."
【2,050 누적 포인트. 체류 가능 시간 282시간 44분.】
어제 방송 끝나고 보상도 수령할 겸 와서 공부 좀 했더니 체류 시간이 부쩍 줄었다.
가방엔 어제 챙겨 둔 꿀물 2병이 들어 있었다.
'오늘부터는….'
재능마켓에서 활과 공부는 잠시 멈추고, 더 급한 일을 처리해야 했다.
'팔씨름은 연습이니까 패스하고, 다른 종목들을 연습하자. 500만 원이야, 500만 원! 집중해!'
여자들은 몸무게가 얼마나 나갈까? 40kg? 50kg?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예원이한테 물어보면 실례려나?
'업고 달리기는 여기서 할 수 없으니까 그건 나가서 하자. 가방에 무거운 거 잔뜩 넣고 뛰면 되겠지.'
요즘 운동하면서 느낀 건데, 사람의 근육은 쓰는 부분만 단련된다는 거다.
'돈도 벌면 좋고, 언제 또 필요할지도 모르니 뭐든 해 두면 좋아.'
잊고 지냈지만, 나는 언제든 목숨을 건 싸움판에 던져질 수도 있다. 무엇이든 익혀 두면 써먹을 때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일요일이 가고,
【체류 가능 시간 269….】
월요일과,
【체류 가능 시간 241….】
화요일도 규칙적이며 반복적으로 지나갔다. 이제 토요일에 방송국에 가지 않아도 되어서 루틴이 조금 변해야 했지만, 일요일 촬영이 있으니 주간 총연습량은 비슷했다.
달라진 점이라면 예원이가 매일 학교에 나온다는 거?
【체류 가능 시간 220….】
수요일 오후.
점심을 먹고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예원이가 옆에 와서 앉았다.
사라락.
바람에 날리는 예원이의 머리칼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조심해야지. 이러다가 소문난다."
"나라지, 뭐…."
무의식적으로 학교에선 둘만 있는 시간을 피하고 있었다. 예원이는 1등을 하지 않아도 이미 우주대스타다. 파파라치까지 교문 밖에서 서성인다는 소문마저 있었다.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응. 족집게네?"
"누가 봐도 네 얼굴 보면 알걸?"
"소속사에서…."
"소속사가 있었어?"
"그 오디션 나가서 톱 3 안에 들면 자동으로 2년간 정해져. 심사 위원이었던 분, 거기 회사."
"아…."
예원이가 다리를 쭉 뻗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팀을 꾸리는데 해 보지 않겠냐고…."
"아이돌처럼?"
"으응. 근데 그룹은 아니고 듀오야."
"다비치처럼?"
"맞아."
"좋은 기회 아니야? 진짜 가수로 데뷔하는 건데?"
"근데… 상대가 채린 언니라서…."
"…."
여기서 걔가 또 나와?
허허, 어쩜 이리저리 껴 있는 거냐?
"그때, 언니 성격 봤지?"
프로젝트 유닛 듀오로 딱 2년만 활동하고 각자 갈 길 가면 된단다. 하지만 그 2년을 박채린과 버티는 게 난관이었다. 전엔 꿀물 덕분에 대인배처럼 굴었지만, 함께 활동하면 매 순간 참아 내기 버거울 수도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내가 뭘 알겠냐….
"솔로 음반은?"
"나는 아직 기약 없어. 한민 오빠부터 준비한대. 그래서 듀오 얘기 나온 거고."
"그렇게 띄워 주더니 방송 끝나니까 찬바람 부네?"
"원래 이 바닥이 그렇대."
일 등만 살아남는 더러운 세상. 대한민국 곳곳에 거미줄처럼 뻗어서 걷어 낼 수가 없다.
"평생도 아니고 2년이라면…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역시 그렇지?"
"다들 힘들게 살잖아. 좋은 사람들하고만 모여 사는 건 불가능해. 버틸 때는 버텨야지."
이 학교도 그렇다. 군대 가면 더 심할 거고, 사회에 가면 장난 아닐 거다.
예원이가 나를 보며 웃었다.
"네가 하라면 할게."
"야야, 네 인생의 선택을 그렇게 쉽게 남한테 떠넘기지 마."
"잘못되면 네가 나 책임지겠지! 뭐!"
"얘가 뭐라는 거야?"
"호호호!"
예원이가 웃으며 저쪽으로 뛰어갔다.
일 등을 못 했어도 저렇게 밝게 웃으니 보긴 좋다. 어쩌면 일 등이 아닌 게 예원이 인생에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이제 고1이지 않은가? 작은 고민도 힘들어하는 녀석이 안쓰럽기도 하다.
'차근차근 가. 넘어진다.'
이건 예원이가 아니라 나한테도 하는 말이었다. 재능마켓에서 뭐가 나올지 모르지만 요즘 너무 가혹하게 살아가는 것도 맞다.
'그나저나 박채린은 계속 엮이네.'
박채린이 예쁜 여자이긴 했지만, 그 성깔을 봐 버렸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데 이래저래 부딪히고 있다. 누가 장난이라도 치나?
'상관없겠지. 내 할 일이나 하자.'
어깨를 으쓱하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학교에선 공부 말고 다른 걸 떠올리는 것도 사치였다. 할 일이 많아져서 공부할 틈을 낼 수 없었기에 학교에서 열심히 해야 했다.
수요일도 가고, 목요일이 지났다.
배달과 알바, 공부와 재능마켓은 계속된다.
금요일 저녁.
나는 고깃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길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들을 만났다.
'도화지?'
도화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 주변으로 열 명 가까운 사람들이 껄렁하게 앉아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왔다! 저놈이야!
나를 발견하며 소리치는 목소리들 틈으로 도화지가 비명처럼 외쳤다.
-민준아! 도망쳐!
-이×이? 죽을래?
도화지 옆의 여자가 도화지의 머리채를 잡았다.
도망?
'내가 왜?'
【돌발 미션이 출현했습니다.】
【돌발 미션은 수행하지 않아도 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오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