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화
전화 투표와 인터넷 투표를 합산해서 방송이 끝나기 10분 전에 우승자를 뽑는다고 했다. 세 명의 심사 위원들의 점수는 50%가 반영된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이제 진짜 다 왔다.
오늘 생방송은 한 사람에 30분씩 할당되었는데, 예원이는 마지막으로 노래를 불러야 해서 아직 1시간은 더 여유가 있었다. 혹여 긴장을 풀어 줄까 싶어 나는 방청석 대신 여기에서 녀석과 함께해 줄 생각이었는데, 대기실에서 나는 예원이를 보며 조금 놀랐다.
"오늘은 차분하네?"
"으응…. 왠지 끝이라고 생각하니까 편해졌어."
대기실에도 TV가 있어서 방송을 볼 수 있었는데 광고가 끝나면 그간의 자료들을 편집한 영상이 나갈 예정이었다.
"민준아."
"응?"
"고마웠어. 네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나 아니어도 잘했을걸?"
농담처럼 웃자 녀석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도 힘이 되어 준 건 사실이잖아."
"고마우면 마지막까지 잘해."
예원이가 TV를 보다가 말했다.
"나, 광고 들어왔다?"
"진짜? 잘됐네! 무슨 광고인데?"
"과자. 딸기 맛."
"오…. 어울린다, 야."
"할까?"
"당연히 해야지!"
잘 모르지만 엄청난 기회 아닌가?
"사실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아침에 일어나면 이 인기도 실감 안 나고…. 다 꿈같은데, 아빠는 계속 반대만 하고."
"…아버지께서 반대하셨어?"
"응. 처음부터 싫어했어. 이쪽 세계가 여자애가 감당하기 힘들다고. 연예인들 자살하고 그러잖아. 그런 거 볼 때마다 안타까워하셨거든."
이런 얘긴 처음 들었다.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너는 어떤데?"
예원인 확실히 노래에 재능이 있었다. 특히 무대 위에서 사람들을 집중하게 하는 매력도 갖췄다. 이 두 가지를 겸비하는 게 쉬운 건 아닐 거다.
"그냥 막연히…."
녀석이 가볍게 웃었다.
"인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솔직히 이렇게까지 될 줄은 나도 몰랐어."
"너만 흔들리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응?"
"네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된다고. 넌 그때도, 지금도 너니까."
"…그런가?"
"그래. 그러니까 너 하고 싶은 거 해. 남들 눈치 보지 말고."
"너는? 내가 노래했으면 좋겠어?"
"하하, 내가 노래 부르지 말라면 안 할거고?"
"피이…."
"너 잘하잖아. 듣기 좋고."
"으응…."
녀석이 어색한 듯 눈을 피했다.
자연스럽게 TV로 시선이 모였다.
사회자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투표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요! 벌써 100만 표를 넘었습니다! 어마어마한데요! 그러면 오늘의 첫 번째 참가자를 만나 보시겠습니다! 1번! 한민의 노래가 심금을 울렸다면 주저 없이 투표하세요!
TV는 그간 오디션이 진행되면서 한민이란 참가자가 어떤 노래를 불러서 톱 3까지 왔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린 시절도 보여 주었다.
그걸 멍하니 보면서 나와 예원이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을 예원이가 깼다.
"우리 셋 중에서 한민 오빠가 노래는 제일 잘하는 것 같아."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음정이랑 박자가 저렇게 완벽할 순 없거든. 타고난 거야. 절대 음감. 다 가졌는데 고음까지 저 수준으로 올라가는 사람 별로 없어."
자칫 예원이가 자신감을 잃을 수 있었기에 나는 말을 돌렸다.
"1억으로 뭐 할 거야?"
"푸웃! 방금 뭐 들었어? 한민 오빠가 가장 잘한다니까? 팬덤도 엄청나고."
"생각하는 건 자유잖아."
녀석의 얼굴에서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아빠 드릴 거야."
"전부?"
"응. 그러면 딸이 조금은 자랑스러울지도 모르니까."
하긴 미성년자가 그 큰돈을 어디에 쓰나. 머릿속에 떠오른 거 다 사도 천만 원도 못 쓸 거다.
"효녀네."
"나 편해지라고 그러는 거야. 효녀가 아니라."
-자! 그러면 이제 번호 1번! 한민군의 마지막 노래를 들어보겠습니다! 과연 오늘의 선곡이 적중할까요? 네버 엔딩 스토리!
카메라가 방청석을 비췄다.
-꺄아아아아아아!
-한민 오빠! 사랑해요!
-한민! 한민!
-영원히 사랑해! 한민!
열혈 팬이 벌써 엄청났다.
톱 3에 올라온 유일한 남자 참가자라서 여성 팬의 전폭적인 몰표를 받고 있었다.
'확실히 잘하네.'
한민의 노래를 들으며 대기실에도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는 긴장이 자욱하게 깔렸다. 나 같은 일반인이 들으면 노래라는 게 주관적일 수도 있겠지만, 실력자들은 미세한 차이도 느낄 것이다. 그 차이가 예원이도 압박하는 것 같았다.
그런 예원이를 보다가 나는 가방에서 물건을 하나 꺼냈다.
"…음?"
내 움직임에 시선을 돌렸던 예원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난번의 그거?"
"비슷한데 달라."
도화지를 구하고 얻은 보상.
【맛있는 꿀물
복용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효과는 1병에 24시간. 희석하거나 조금 마시면 일찍 깬다.】
집중력 드링크에 비해선 그리 압도적으로 좋다곤 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지만, 나는 꿀물을 예원이에게 건네면서 웃었다.
"고마워."
싱긋 웃으며 홀짝 꿀물을 마신 예원이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맛있어!"
"그래?"
나도 먹어 본 적 없어서 모르겠다. 녀석이 좋다면 그걸로 된 거고. 마지막이니까 이 정도 서비스는 괜찮겠지?
"와…. 이렇게 맛있는 꿀물은 태어나서 처음 먹어 봐."
얼마나 맛있으면 순식간에 원샷을 해 버렸다. 아쉬운 듯 병을 기울이고 혀를 날름거리는 게 귀엽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어. 이것도 엄마가 주셨어?"
"어…."
"좋겠다, 잘 챙겨 주시고."
병을 테이블에 올린 예원이가 기지개를 켰다.
"아응…. 나른하네."
조금 전까지 긴장하던 예원이는 온데간데없었다. 햇살을 받은 고양이처럼 흐물흐물해진 예원이는 한민의 무대를 더 보지도 않고 내게 말했다.
"다 끝나면 우리, 놀러 갈래?"
"어디?"
"모르겠어. 대공원 갈까?"
"그래."
"약속한 거다? 나중에 무르기 없기?"
예원이는 여자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럽고 예쁜 표정으로 의자에 기댔다.
'꿀물이 저런 효과인 건가?'
설명만 보면 분명 기분이 좋아지는 어쩌고였는데, 뭔가 다른 효과가 더해진 느낌이었다. 물론, 사람이 기분이 좋아지면 몸도 마음도 변해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지만, 뭐랄까? 그것과는 달리 그런 변화를 지켜보는 사람까지도 편안해졌달까? 참 묘하다.
【재능을 나누었습니다.】
【재능마켓에서 보상을 수령하세요.】
"…!"
혹시나 했는데, 이번에도 꿀물이 두 병이 되어 돌아오려나?
계산하고 한 것도 아니고, 예원이를 위해 한 병 정돈 기꺼이 줄 수 있었지만, 두 배로 준다면야 무조건 땡큐지!
'그러고 보면, 이거 이런 식으로 아이템을 늘릴 수도 있는 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면 아이템을 두 배로 불릴 수 있는 거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무작정 줘서도 안 되겠지만..
'나중에 확인해 보자.'
집중력 드링크와 꿀물이 있으니 몇 번은 시도해 볼 가치가 있어 보였다.
'생수도 되려나?'
이 또한 리스트에 넣어 둬야겠다.
어쨌든, 이 작은 병들이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도 있는 기회가 된다면 무모한 실험은 아닐 것이다.
-엄청난 무대였습니다! 한민!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만 명에 하나 나 올까 말까 한 타고난 천재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게 아니죠! 완벽합니다! 한민!
흥분한 사회자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대기실에는 더 처참한 표정의 사람이 늘었지만, 이제 두 번째 참가자가 나서야 했다.
이때, 저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채린아, 떨지 말고 실력대로만 하자. 알겠지?
-응, 엄마.
박채린은 예원이와 전혀 다른 매력을 가졌는데, 예원이가 시골집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첫사랑 느낌이라면 박채린은 세련된 도시 미인 느낌이었다. 자신의 장점을 잘 아는지 선곡도 주로 댄스를 가미한 빠른 곡을 했고, 치마도 짧게 입었다.
"…."
일어선 박채린이 이쪽을 봤다. 예원이를 견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예원이는 아랫목에 자리 잡은 강아지처럼 평온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게 아니꼬웠던 걸까?
"야! 진예원! 이 싸가지 없는 ×이!"
박채린의 앙칼진 목소리가 대기실을 울렸다.
"…?"
"…!"
모두가 놀라 얼어붙었다. 생방송을 앞둔 참가자가, 그것도 이미지를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이 무슨 짓인가?
"너, 나 무시했지? 아, ×발! 짜증 나! 보자 보자 하니까 별게 다 만만하게 보네! 나 박채린이야! 박채린이라고!"
삿대질을 하며 날뛰는 박채린을 보며 예원이는 눈만 깜빡거렸다.
"미,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우리 애가 스트레스가 심한가 봐요! 채린아, 어서 가자."
"진정하고! 야! 박채린! 정신 차려!"
부모님이 박채린을 둘러싸고 황급히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
"…."
누가 겪어도 황당한 사건이었기에 나는 예원이를 보며 괜찮냐고 물으려는데 예원이가 피식 웃었다.
"채린 언니, 큰일 났네."
"어?"
"저렇게 무대 올라가면 망치는데."
"너, 괜찮아?"
"응, 뭐. 오늘이 마지막이잖아."
꿀물이 사람을 보살로 만드는구나….
"저 언니 가끔 저랬어. 그래도 나쁜 언닌 아냐. 처음엔 나도 어이없었는데, 뭐 오늘은 담담하네. 그보다 걱정이네. 그래도 연습 많이 했는데, 실력 발휘 못 하겠다."
박채린이 나갔으니 이제 30분 후면 예원이 차례가 온다. 그런데 지금 예원이를 보면 그다지 걱정이 되질 않았다. 확실히 약빨이 무섭긴 무섭다.
-2번 참가자! 박채린! 오늘은 또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줄까요? 엄정화, 이효리의 뒤를 잇는 디바의 탄생을 여러분은 지켜보고 계십니다!
무대가 이어졌다.
다행히 꽈당 넘어지거나 하는 큰 실수는 없었지만, 보는 내내 묘하게 불편했다. 그건 박채린이 무대를 즐기지 않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박채린이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었는데, 속에 품은 어둠을 완전히 감추지 못해서인지 표정 속의 기분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말았다.
가면을 쓴 것 같달까?
결국 아까 한민의 무대와 다르게 심사 위원들도 혹평이 쏟아졌고, 박채린은 눈물까지 보이고 말았다. 아까 여기에선 그렇게 사납던 박채린이었건만….
'가짜로 우는 것 같은데?'
한데, 사람 참 무섭다.
아까 그 모습을 봐서인지 울음조차 거짓으로 보이니 놀라울 따름이다.
어쨌든 드디어 예원이의 차례가 왔다.
TV에서 예원이에게 얼굴을 돌리는데 손에 부드럽고 따듯한 게 잡혔다.
"…."
예원이가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내 손을 잡은 거다.
대기실엔 우리밖에 없었다.
"고마워."
"또 그 소리. 할 말이 그거밖에 없냐."
나는 어색해지기 싫어서 일부러 투덜거렸다. 그런데 예원이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아니, 이번엔 다른 거."
"어?"
"고마웠었다고."
예원이의 몸이 내게 바짝 다가왔다.
"덕분에 용기 낼 수 있었어."
피하려면 그럴 수 있었을 거다. 고블린의 칼이라면 몇 번이고 회피했을 수 있었다. 하지만 향기가 딸려 오는 예원이의 머리칼은 내가 거부할 수 없었다.
쪼옥.
녀석의 입술이 내 볼에 닿았다. 그리곤 녀석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맴돌았다.
"마이 히어로 씨."
꿀물이… 상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