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화
미션을 위한 금액과 정확히 일치했다.
따지고 보면 알바를 계속해 오고 있었으니 길어야 2달이면 미션 금액은 맞출 수 있었지만, 활을 배우면서 돈이 더 필요해지지 않았던가?
"뭐 하는 건데요?"
냉정하게 돌아서지 못하다니. 쳇, 별수 없다. 지금은 돈 만 원도 소중했다.
"파일럿이라 일단 시작해 보고 인기 많으면 정규로 할 건데, 처음이니까 남자 10명이 나와서 이런저런 게임을 하면서 경합하고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여자 한 명이 최종 선택을 하는 시스템이야. 가장 매력적인 남친을 찾아라! 가 슬로건이고."
"그런 거면 잘생긴 게 최고잖아요."
"아니야. 그랬으면 내가 너한테 추천하지도 않지. 체력이나 힘이 상당히 필요한 게임들로 구성되어 있거든. 운동부 애들도 섭외 중이라 일반인은 못 버텨 낼걸?"
내가 발길을 멈추자 그가 신이 나서 말했다.
"촬영은 이틀만 하면 돼. 어때? 할 만하지? 참가만 해도 20만 원 줄 거고. 어때? 콜?"
"언제 하는데요?"
"다음 주 일요일이 첫 촬영이고, 나머진 나중에 나올 거야."
흐음… 이틀만 잘하면 500만 원이란 건데.
"알겠습니다. 생각해 볼게요."
"그럼 번호만 줘. 우리 작가가 전화할 거야."
"네."
사실 재능마켓을 얻은 후로 무작정 강해지는 것에만 몰두했지, 구체적으로 성인이 되면 뭘 할진 정하지 않았었다. 뭐, 어떻게든 이런저런 경험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무엇보다 500만 원이 탐났다.
PD와 헤어져서 참가자 대기실로 갔다. 패자 부활전이 있는 날이라서 그런지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는데, 예원이는 오늘도 혼자였다.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네. 이쯤 되면 부모님이 올 법도 하지 않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데, 왜 계속 혼자 있는지 모르겠다.
"민준아!"
"표정 좋네."
"그래? 다행이다. 오늘은 예쁘게 나와야 하거든."
"왜?"
"노래 컨셉이 그래서."
예원이는 긴장을 풀려는지 쉴 새 없이 조잘대며 오늘 어떻게 방송이 진행되는지 알려 줬다.
패자 부활로 올라온 두 명을 포함해서 다섯이 진검승부를 벌인다. 여기서 또 두 명이 떨어지면 최종 무대로 갈 세 명이 남는다. 저번에 톱 3에 들었다고 설렁설렁하다가 오늘 떨어지면 말짱 헛거란 뜻이다.
"밖에 장난 아니더라."
"그래? 난 아침부터 여기 들어와 있어서 잘 몰라."
"몇 시에 왔는데?"
"7시."
"헐… 그때부터 있었다고?"
"응, 매번 그랬는걸? 리허설 하고 메이크업하고 그러다 보면 시간 잘 가."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래?"
"응."
"고생하네…."
몰랐다.
2시간 정도 방송하려고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대기하고 있다니.
"오늘도 힘내."
"응! 최선을 다할게!"
몇 번 와 봤다고 이제 방청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것도 익숙해졌다. 전엔 마냥 예원이만 응원하느라 가슴을 졸였다면 이제 순수하게 방송 자체를 관조하는 여유도 생긴 것 같다.
'역시 잘하네.'
예원이는 오늘도 무사히 톱 3 안에 들었다.
톡으로 간단하게 축하해 주면서 고깃집으로 갔는데, 토요일엔 조금 늦을 수 있다고 말해 두었기에 홀 서빙 없이 곧장 불판부터 닦았다.
벅벅벅!
조금 전까지 그렇게 화려한 무대를 보고 온 것이 무색하게 나는 열심히 불판을 닦기 시작했다.
'500만 원 받으면 우리 엄마 코트 하나 사 줄까?'
아니지, 그것보단 사재로 정밀 검사를 받게 해 줘야 했다. 언제 암이 생길지 모르는 거다. 뭐, 김칫국부터 마시는 거겠지만 나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본래 이런 상상이 내일을 살게 하는 거다.
【세척 스킬이 적용 중입니다. 불판에 광택이 깃듭니다.】
불판을 닦다 보니 근력도 조금이나마 오르는 것 같았다. +1은 아니지만, 근육을 쓰니 힘이 느는 건 당연할지도.
【코어가 성장했습니다.】
순조롭게 돈도 잘 벌고 공부도 하면서 매일 값진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니, 왜 진즉에 이렇게 살지 않았나 후회가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뒤로 고개를 돌렸다.
"…."
도화지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요?"
"오늘 토요일인데, 끝나고 뭐 해?"
"집에 가야죠."
애초에 10시 넘어서 뭘 하겠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거 아닌가? 우린 아직 고딩이라고! 참, 도화지는 고2라고 했다.
"저녁 알바 하는 거 보면 집이 엄한 것 같진 않은데. 왜 그렇게 재미없게 살아? 놀 땐 놀아야지!"
"저, 지금도 충분히 재미있는데요?"
어설프면 자꾸 엮일 것 같으니 확실히 선을 그어야 했다.
"그리고 노래방에 갈 만큼 여유 있는 형편도 아니에요."
"하? 클럽도 아니고 고작 노래방인데 무슨?"
"1시간도 아까워요."
"대단하시네! 정말. 쳇! 나중에 후회하지 마!"
도화지는 툴툴거리며 매장으로 들어갔다.
"후회는 무슨."
나도 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젠 그런 시간보다 더 중요한 우선순위가 있었고, 휴식은 예원이 보러 방송국에 다녀온 거로도 충분했다.
바바바바박!
다시 불판 닦기에 몰두했다.
이 단순 작업을 하다 보면 시간 참 잘 간다.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기도 좋고, 더러운 불판이 내 손길로 깨끗해지는 것도 속이 시원했다.
도화지가 다녀간 후로 2시간쯤 지나자 사장 아주머니가 오셨다.
"어쩌면 이렇게 꼼꼼하니? 어제 네가 닦은 불판 오늘 매장에 깔았는데 손님들 반응이 너무 좋더라."
"그래요? 잘됐네요."
"민준 학생은 못하는 게 없네."
얼마 전까지 잘하는 게 하나도 없었던 내가 이젠 이런 소리까지 듣다니. 감개무량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
.
.
고깃집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재능마켓을 향했다.
【누적포인트 2,050.】
이제 생수를 사서 먹어야 하기에 포인트가 계속 소모되는 중이다. 체류 시간도 300시간 남았고, 하루 10시간씩 써도 한 달밖에 못 쓴다.
'미션을 완수해도 필라테스를 하려면 체류 시간이 남아 있어야 돼.'
그렇다는 건 하루 5시간 이상을 써선 곤란하다는 뜻이었다.
'잠을 줄어야겠네.'
해야 할 공부나 활 연습을 미룰 순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계획을 다시 짜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금요일이 되었을 때, 드디어 신문 배달 월급을 받았는데 소장님이 넉넉하게 챙겨 줘서 238만 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쥐었다.
【미션 완수까지 262만 원 남았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한 달은 더 필요했다.
【미션 완수까지 499.886km 남았습니다.】
1,000km 달리기 미션도 딱 절반 왔다.
재능마켓에서 시간을 많이 쓸 수 없게 돼서 피로를 쉽게 풀 수가 없었다. 생수를 마셔도 잠을 자면서 회복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절반이나 왔어.'
이런 장기 미션을 두 개나 받아 버려서 난감했지만 하다 보면 된다는 진리는 여기서도 통하고 있었다. 게다가 강제로 하긴 했지만, 운동도, 새벽 배달도, 고깃집 일도 하면 할수록 재미가 붙었다.
이제 고작 한 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시간 동안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는 걸 깊이 체감하고 있는 것이다.
"와아…."
월급도 받았겠다, 오늘은 고깃집 가기 전에 다른 곳에 들렀다.
양궁 관련한 용품을 파는 곳이었는데 평소라면 스윽 보고 지나쳤을 만한 곳이었지만 오늘은 가슴이 뛰었다.
"찾으시는 물건 있으세요?"
직원인지 사장인지 모르겠지만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오며 물었다.
"아, 인터넷으로만 보니까 잘 몰라서 왔어요."
"종목 해요?"
"네?"
"그냥 취미인가요?"
"아, 네. 취미로…."
"호호! 신기하네요. 종목 하는 친구들 아니면 학생들은 거의 안 오는데. 활은 어떤 건데요?"
"그냥 평범한 거요."
아직 커스텀하기 전이라 들고 다닐 순 없었다.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것처럼 생겼으니까.
"정식으로 배운 적은 있고요?"
"아뇨."
"막 시작한 거예요?"
"네."
"그렇구나…."
재미있다는 듯 나를 보던 여자는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장갑류는 손을 보호해 주고요. 초보자들은 시위가 흔들리지 않게 클립류도 많이 써요. 활을 고정시키는 것들도 있고…. 그런데 활 규격을 알아야 보조 기구를 맞추는데…."
"오늘은 화살만 사 가려고요."
재능마켓에서 구매한 화살촉은 '살상용'이라서 몇 번 쓰니 끝이 무뎌졌다. 연습용이 필요한 거다.
"이건 어때요? 초보자들이 많이 쓰는 건데."
"너무 비싼데요…."
10대에 8만 원이라는 가격표가 보였다.
"더 싼 건 없나요?"
"뭐든 싸면 싼 이유가 있는 거예요. 불량률도 높고 무게 중심도 안 맞는 경우가 많아요. 처음에 배울 때는 특히 살을 좋은 거 써야 해요."
"그래도…."
어색하게 웃자 그녀는 10대에 62,000원짜리를 보여 주었다.
"이 아래로 낮추면 실력이 늘긴커녕 더 헤맬 거에요."
"알겠습니다. 이거로 할게요."
화살을 사며 잠시 고민해야 했다. 포인트로 화살을 사는 게 이득인지 아니면 돈으로 구매하는 게 나은지.
'불판 하루치가 이거 10개네.'
내 노동력이 그렇게 싼 건지 아니면 화살이 비싼 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화살을 챙기니 마음이 넉넉했다.
계산대로 이동해 기다리는데 비치된 홍보물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이거 정말이에요?"
사설 양궁장 50% 할인권이었다.
"당연하죠. 호호! 저희 삼촌이 운영하는 곳인데 우리 가게 이름 말하면 시간 더 줘요."
"와아…. 한 장 가져가도 될까요?"
그녀는 세 장을 덥석,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주말은 피하는 게 좋아요. 동호회 사람들이 많아서 정신없거든요."
"감사합니다!"
화살을 챙겨서 가게를 나왔다.
'당장 평일에 시간을 빼긴 힘들겠지만, 조만간 기회가 올 수도 있겠지?'
두근두근.
누군가에겐 별거 아닌 이 할인권 세 장에 왜 이다지도 득템한 기분인지. 나는 들뜬 마음을 감추고, 할인권을 가방에 고이 넣어 두며 이동했다.
간단한 몇 가지 쇼핑을 더 하고, 고깃집으로 가는 길.
'이거 다 하고 나면 또 어떤 미션이 나올까?'
절반은 더 해야 했지만, 다음을 생각해 보았다. 이 세계에서 나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을 상상하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빨리 필라테스 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야만 한다.
"아자!"
주먹을 불끈 쥐고 고깃집까지 뛰려고 하는데,
'음?'
어둑어둑해진 번화가 안쪽 골목길이 보였다..
'저 사람은?'
그냥 지나쳐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아는 얼굴이라는 게 문제였다.
'도화지?'
골목 안엔 예닐곱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있었고, 남자 여자 반반 섞여 있었는데 다들 교복 차림이었다.
'담배도 피우나?'
안쪽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랑 상관없잖아.'
쓰읍, 입맛을 다시며 다시 뛰려고 했다.
그런데….
"흐으음…."
도화지의 행동이 이상하다.
남자들은 바깥쪽에서 망을 보는 것 같고, 도화지 앞의 세 여자는 위협적인 자세였다. 그래 봐야 어른들이 보기엔 껄렁한 양아치들로 보였겠지만, 저런 애들을 앞에 둔 학생이 느끼는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
지나치려던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저 무리와 한패였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
가까이 걸어갈수록 분위기는 더 확실히 보였다.
도화지와 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들려오는 말소리.
-그래서? 상납 안 하겠다고?
-그게 아니라 며칠만 더 기다려 달라는 거잖아.
-그러면 그 며칠은 뭘로 때울 건데?
-때우다니? 그게 무슨 소린데?
-햐, 순진한 척 연기 오지네? 돈이 없으면 몸이라도 팔아야 하는 거 아니야?
아아, 더 들어 볼 가치도 없는 양아치들이구만.
"그만하지."
녀석들을 향해 말했다.
"…에엥? 뭐야?"
"넌 뭔데?"
골목 입구를 지키던 남자들이 나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일반적이라면 녀석들이 점거 중이니 누구라도 멀리 돌아갔을 텐데 당당히 걸어 들어오는 게 어이없는 거다.
"그냥…."
내 등장에 안쪽 여자들의 고개도 돌아갔다.
"지나가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