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화
교장실.
초등학교 때 짓궂은 애들과 싸워서 몇 번 불려 갔던 일을 제외하면 처음 와 본다.
"아주 훌륭한 학생을 두셨습니다."
아주머니 한 분이 교장 선생님께 내 칭찬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주머니는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반겼다.
"학생!"
"아, 안녕하세요…."
얼결에 쭈뼛거리며 인사를 한 아주머니는 강도를 만났던 그분이셨다.
아주머니는 덥석 내 손을 잡아끌고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잘 지냈어요? 병원에 있는 내내 몸이 어찌나 근질거리던지 퇴원 수속 밟자마자 곧장 이리로 왔다니까."
"몸은 괜찮으세요? 아직 얼마 안 됐는데요."
"호호! 멀쩡해요! 그때 학생 아니었으면 더 큰 일 났을 텐데! 얼마나 천만다행인지! 고마워요, 고마워!"
아주머니는 굉장히 밝은 톤의 목소리로 나와 교장 선생님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요즘 이런 학생 없어요.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구석에서 담배나 피우고 하지, 누가 남을 도와요? 듣자니까 경찰서에서도 감사패를 준다고 하던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왔어요."
그 말에 교장 선생님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감사패요?"
"네, 그럼요! 얼마나 장한 일을 한 건데요! 아직 학교엔 연락이 없었나요?"
"아, 네. 저흰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허허! 이거, 우리 학교 교훈과 딱 걸맞은 인재가 나타났군요!"
그러면서 옆을 바라보셨다.
벽엔 '바르게 살자'라는 교훈이 떡 하니 걸려 있었다.
"담임 선생님께서도 모르고 계셨나요?"
"아, 제 불찰입니다. 앞으론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질책이 아닌 푸근한 질문에 담임 선생님이 고개를 숙여 답했다.
그러다 불쑥,
"민준이가 이번 쪽지 시험에서 반 일 등을 할 정도로 우수한 학생인데, 제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은근슬쩍 끼워 자랑하는 담임이었다.
아, 선생님. 그걸 굳이….
"오오오? 그래요?"
교장 선생님의 눈빛이 휑한 머리만큼 빛을 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지만 학교에선 성적이 아이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지 않나?
"형편이 어려워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는 거로도 모자라 공부까지 일 등이라니? 허허허허!"
교장 선생님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다른 아이들도 딱 너만큼만 했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하…. 네, 감사합니다."
아, 이 자리.
민망함을 넘어 빨리 벗어나고만 싶다.
술 취한 사람처럼 연신 웃어 대는 교장 선생님 표정이 한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
.
.
어쨌든 이날, 이 소소한 사건으로 인하여 선생님들 사이에서 나는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던 내가 갑자기 관심을 한 몸에 받으니 얼떨떨했지만, 싫은 것도 아니어서 절로 웃음이 났다.
하교 후 강남역으로 향했다.
이제 전력으로 뛰면 아슬아슬하게 알바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민준이! 오늘도 멋있네!"
사장 아주머니가 활짝 웃어 주었는데 따로 할 말이 있는지 가게 뒤로 걸어가는 나를 따라오셨다.
"불판 닦는 거 힘들지?"
"아뇨. 이제 익숙한걸요."
실제로도 나는 1시간에 12~15개를 소화하고 있었다. 이번 주가 지나면 그 이상을 처리할지도 모르겠다.
"민준이가 어찌나 일을 잘해 주는지.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서빙도 함께 보는 건 어때?"
"서빙요?"
"응, 바쁠 때 두어 시간만. 한가할 때 불판 닦으면 되고. 대신 시급 더 올려 줄게!"
"그래 주시면 저야말로 감사하죠!"
"호호! 뭘, 내가 고맙지. 두 시간 쓰자고 사람 또 구하려면 골치거든. 며칠 하다가 그만두기 일쑤고. 요즘 애들 영악해서 두 시간 하자고 알바 하러 오지도 않아."
그간 지켜보니 이 고깃집은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만석이다. 그만큼 정신없다는 건데 사장 아주머니는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 내일부터 부탁할게."
"네! 감사합니다!"
"호호! 내가 더 고맙다니까 그러네."
오늘은 좋은 일만 생기는 것 같다. 시급도 올랐고, 새로운 일도 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미션이 끝나도 계속 돈은 벌어야겠어.'
어머니를 도와드리는 것도 좋고,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대학 등록금을 내 힘으로 마련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6시부터 10시까지 4시간이면 8만 원. 한 달이면 얼추 240만 원이니까.'
신문 배달과 고깃집 일로 무려 500만 원 가까운 돈을 한 달에 벌 수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소화하지 못할 살인적인 스케줄을 뛰고 있으니 가능한 거겠지만, 만져 본 적 없는 거금을 벌고 있는 나 자신이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늦을 것 같으면 전철 타고… 피곤하면 재능마켓에서 자자.'
불판을 빨리 닦았더니 시간이 남아 서빙도 같이 보게 되며 시급이 오르고, 신문 배달도 남들 400부 돌릴 때 800부를 돌리니 가능한 일이었다. 재능마켓의 도움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이렇게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을 체감하고 나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일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그것의 차이는 결국 나 스스로의 선택이지 않을까?
'방학 때는 일을 하나 더 할 수 있겠지?'
그러다 보니 없던 욕심도 생겼다.
대학 4년을 다니려면 얼마가 필요할까? 등록금에, 생활비에, 뭐에 한 1억 들려나? 대학 자체를 포기하고 살았으니 계산해 본 적도 없었지만, 이젠 달랐다.
어마어마하게 큰돈이 들긴 하겠지만 지금처럼 일할 수 있다면 대학에 가기 전까지는 목돈을 모아 도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양궁장도 가 볼 수 있을 거고.'
넓은 곳에서 시원하게 활을 쏴 보고 싶단 생각에 더 힘이 불끈 솟구쳤다.
"아자!"
고무장갑을 끼고 앉아 불판을 닦기 시작했다. 기름때가 잔뜩 낀 불판을 닦는 일은 쉽지도 않을뿐더러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꿈을 향해 간다는 것.
예전에는 생각도 못 했던 것들이 원동력이 되어서 말이다.
그때였다.
【세척 스킬이 생겼습니다.】
【세척 스킬은 일정 조건을 충족할 시 세공 스킬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뭐, 뭐야?"
어이가 없어 불판을 닦던 손이 멈췄다.
【이제 물건을 세척할 때 체력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또한 당신이 세척한 물건은 광택 효과를 조금 지닙니다.】
'미친… 하다 하다 별….'
화가 나서 욕이 튀어나온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광택 효과라고?'
재밌지 않나?
나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박박박!
혹시나 해서 전력으로 닦은 첫 번째 불판.
"히야…."
【낡은 고기 불판에 광택 효과가 깃들었습니다.】
"어이가 없네…. 하하!"
세월의 흔적이야 어쩔 수 없고, 흠집이 있긴 했지만, 내가 닦은 불판은 새것처럼 광을 내며 빛났다.
"가즈아!"
신이 날 수밖에!
바바바바바바박!
나는 순식간에 불판을 닦아 냈다. 본래 이 작업만 4시간은 걸려야 했지만, 일을 마쳤을 때는 고작 1시간 48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후아!"
산더미처럼 쌓인 불판은 그 자태마저 아름다웠다. 물론 남들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동종 업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한눈에 알아보지 않을까? 이토록 공들여 불판을 닦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건 진짜 대박인데?"
불판 닦는 건 분명 많은 힘이 든다. 그런데 세척 스킬 덕분에 체력소모가 없으니, 첫 번째 불판과 마지막 불판을 닦을 때도 똑같은 힘을 줄 수 있었다.
"어멋! 이게 뭐야!"
사장 아주머니가 나왔다가 깜짝 놀랐다.
"너, 이걸 언제 다 한 거야? 고작 몇 시간 지났다고…."
대충 한 건 아니지? 라는 말이 나올 뻔하다가 아주머니는 불판 상태를 보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말도 안 돼…."
왁스 같은 제품을 쓰지 않고선 이런 광이 날 수 없었다.
"요술이라도 부린 거니?"
"하하! 제가 좀 힘이 좋잖아요!"
"아니 내가 여기서만 장사를 몇십 년짼데…."
너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는 듯 혀를 내두르던 아주머니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면 그냥 오늘부터 서빙도 좀 도와줄래? 너무 힘들려나?"
"아니요! 멀쩡합니다!"
나는 이렇게 홀에 입성했다.
남들에겐 별거 아닌 작은 사건이겠지만, 나는 이 고깃집에서 전천후로 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 콜라 하나요!
-이모! 소주 한 병 주세요!
-삼겹 추가요!
홀을 돌며 이것저것 나르고 손님을 상대하다가 마칠 시간이 되니 한산해져서 이제야 한숨 돌린다.
"후우…."
서빙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눈치가 빨라야 하고 친절함을 잃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민준아!"
"네?"
아주머니가 불렀다.
"밥 먹고 갈래?"
"저야 좋죠."
"알았어! 아줌마가 김치찌개 맛있게 끓여 줄게! 저기 안에 가서 찌개 한다고 고기 넉넉하게 썰어 달라고 해."
"저기요?"
"응!"
나는 오늘 투입되었지만, 야간 홀 알바가 6명이 더 있다. 다 내 또래 아이들이었는데, 그중 몇 명이 익숙하게 한쪽 테이블을 치우고 우리가 식사할 준비를 했다.
나는 아주머니가 시킨 일을 하러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긴 처음 와 본다.
"아…."
고기를 보관하고 손질하는 곳인 것 같다.
움찔!
들어가자마자 나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대머리 아저씨가 손에 칼을 들고 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넌 누구?"
"불판 알바입니다! 아주머니께서 찌개 하신다고 고기 받아 오라셔서요."
"아, 그랬냐? 처음 보는 얼굴이라 놀랬잖아. 잠깐 기다려라. 금방 썰어 줄 테니까."
장인은 어디에나 있다.
두툼한 고깃덩어리를 꺼내서 칼로 슥슥 손질하는 그의 모습을 나는 넋 놓고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렇게 잘 잘리지?'
재능마켓에 들어가기 전이었다면 관심이 없었을 거다. 그런데 부패의 주인과 싸우며 나도 '칼질'을 좀 해 보니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대단해….'
아저씨 손에서 춤을 추는 건 칼뿐만이 아니었다. 고기 역시 아저씨 손바닥 안이었는데, 꼼짝없이 잡혔다고 할까? 저 손길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만약 저 고깃덩어리라면? 저 칼을 피할 수 있을까? 설마 저거 아이템은 아니겠지?
'하, 나도 단단히 미쳤네.'
찌개 고기 받으러 와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그런 나를 아저씨가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자, 갖다줘."
냄비에 꽉 찰 만큼 고기를 담아 내어주시는 아저씨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더 바라보았지만 내가 머릴 꾸벅 숙이고 나서자 칼을 흔들며 다른 고기를 쥐었다.
20분쯤 지나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았다. 손님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유유자적하게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어서 우리가 바쁘진 않았다.
"민준인 같이 밥 먹는 거 처음이지?"
"네."
"앞으론 종종 같이해. 이제 홀 식구인데."
가게 뒤쪽 외부에서 불판만 닦고 있다 보니 나 홀로 생활만 해 왔는데 이렇게 다 모여 밥을 먹는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 식비가 굳는다.
나를 포함해서 남자 알바가 넷, 여자애들이 셋이다.
녀석들이 힐끔거리며 나를 관찰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내 관심은 아까 그 고기 썰던 아저씨였다. 식탁이 차려지자 아저씨도 나와서 말없이 밥을 먹고 있었는데 두꺼운 손목과 수많은 상처로 덮인 손등이 예사롭지 않았다.
'칼을 다루면서 생긴 건가?'
아까 '세척' 스킬을 얻으며 깨달았다. 꼭 재능마켓이 아니라도 이제 어떤 일을 파고 또 파면 스킬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거다. 당장은 활에 몰두하겠지만 그렇다고 '칼'도 완전히 놓고 싶진 않다. 재능마켓에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대비해 둬야 했다.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아저씨를 계속 지켜보았다.
'그러고 보니 머리에도 상처가 있으시네. 그것 때문에 다 민 건가?'
확실히 뭔가 있는 아저씨였다.
"자자! 다 먹었으면 차 끊기기 전에 퇴근들 해!"
새벽엔 아주머니 혼자서도 홀 정돈 거뜬하니 알바들은 퇴장할 시간이었다.
"어디 딴 데로 새지 말고! 특히 너! 도화지! 곧장 가!"
도화지?
아주머니의 시선을 따라 고갤 돌려보니 여자애가 혀를 삐죽 내밀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가게를 나서는데, 도화지와 동선이 겹쳤다.
그녀는 앞서가다 돌아서선 대뜸 말했다.
"야, 신입. 너, 몇 학년이야? 이 근처 교복이 아니네?"
"1학년이요."
"흐음, 노래방 안 갈래?"
"…."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