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2,150 누적 포인트.】
나는 활을 들고, 유리 벽으로 걸어갔다. 그간 몇 번이나 보아 왔던 진열장이었는데, 오늘은 새로운 게 눈에 띄었다.
"어…? 이게 원래 있었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저 물건이 내게 도움이 될 거라는 거였다.
"활 통도 종류가 많네."
내가 얻은 건 활뿐이었다.
활이란 무기는 반드시 '살'이 있어야 하고, 그 화살을 보관할 통도 있어야 했다.
"허어…. 5만 포인트?"
【무한의 활 통
화살을 무한대로 뽑아 쓸 수 있는 귀한 물건.
착용자의 요구에 맞게 훨씬 강화된 화살도 무한대로 저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건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가진 포인트로 당장 쓸 수 있는 물건이 필요했다.
【강철 촉의 화살
1대당 5포인트. 갑옷도 뚫을 만큼 위력이 세다.】
이것도 비싸고….
【초심자의 나무 화살
1포인트에 10대.】
가장 저렴한 화살이 보였다. 1포인트라지만 이것도 계속 쓰다 보면 포인트가 줄줄 샐 거다.
【초심자의 활 통
50포인트. 내구력이 약하다. 20개의 화살을 담을 수 있다.】
'우선 이 두 가지를 구매하자.'
목숨 걸고 벌어 온 포인트.
피 같은 포인트였지만 아끼기만 해선 그 이상을 볼 수 없었다.
【70포인트를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눈을 질끈 감고 결심을 굳혔다.
【2,080 누적 포인트.】
진열대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내가 구매한 활 통과 화살 20개가 거짓말처럼 생성되었다.
"그보다… 이걸 밖에 들고 나가서 연습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다. 당장 집이나 학교, 알바 할 때도 못 들고 간다.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메시지가 울렸다.
【장비를 커스텀할 수 있습니다.】
"커스텀이라…."
말을 들어 보면 무기나 방어구의 외형을 변경할 수 있다는 뜻 같다. 한데, 뭐지?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았다.
이럴 때는 일단 질러 봐야겠지?
"얼만데?"
내 물음에 메시지가 울렸다.
【용사의 빛나는 활을 커스텀하시겠습니까? 커스텀에 필요한 포인트는 2,000~15,000입니다. 특별한 커스텀엔 추가 효과가 적용됩니다.】
"뭐가 이리 비싸…."
【선택할 수 있는 커스텀의 종류는 108가지입니다.】
멍하니 보고 있는데, 유리 벽에 홀로그램처럼 이미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더 과하잖아…."
활의 외형 변경은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할 수 있었는데, 용의 머리를 활에 조각해 놓은 것이라든가, 활에 화려한 색을 칠해 놓은 것 등 내가 원하는 것과는 반대로 화려한 것들이 많았다.
"아니, 이런 게 아니라, 최대한 평범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다가 문득 발견했다.
"아! 이거? 잠깐! 멈춰 봐!"
【양궁 커스텀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감출 수 있다. 활을 커스텀하면 화살과 활 통의 외형도 바꿀 수 있다. 커스텀 비용 2,000포인트.】
"양궁이라…. 이 정도면 괜찮을지도?"
이거면 밖에 들고 다녀도 떳떳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이제까지 모은 포인트를 다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왕 할 거라면 하루라도 빠른 게 좋지만, 이건 좀 신중해야 할 것 같은데?'
부패의 주인을 상대할 때는 생전 처음 써 보는 검을 휘두르다가 몇 번이나 위기에 처했었다. 그나마 활이라면 원거리에서 안전하게 타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최대한 빠르게 익히려고 했던 것이건만, 이렇게 섣불리 결정할 것은 아니었다.
"…."
나는 일단 선택을 미루고 활을 내려놓은 뒤,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리곤 '양궁'을 검색해 봤다.
"전용 장비가 꽤 많네. 가격도 비싸고…."
몇 번 더 쓸 수 있다지만, 화살 12개에 7만 원이 넘었다.
"양궁 카페란 곳도 있었구나."
그런 곳에 가면 확실하게 연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돈을 쓸 여유는 없었다.
"그냥 여기서 하면 되지 않나?"
내가 재능마켓에 대해 다 아는 건 아니었지만 이곳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곳이다. 활 좀 쏜다고 해서 문제가 될까?
"그래도 이건 하나 사야겠다."
활과 화살 몇 개를 담을 수 있는 하드 케이스가 58,000원이었다. 이 정도 투자는 하자.
"곧 월급도 들어오니까."
활 케이스, 활 통, 화살.
이 정도만 맞추면 당장 연습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남들이 사용할 수 없는 나만의 시간을 쓸 수 있었다. 정상적으로 지금부터 내가 활을 배운다고 해서 능숙해지는 건 몇 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겠지만, 재능마켓에서라면 얘기가 달랐다.
"당장 커스텀까지 할 필욘 없어. 밖에서 쏠 건 아니니까. 지금은 연습부터 해 보자."
활 통에 화살을 넣으며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과녁으로 쓸 건 꽤 많아.'
오피스텔 안을 스윽 둘러보았다. 그 용도를 알 순 없지만, 각종 필라테스 운동 기구가 많았다.
'저걸 목표로 쏴 볼까?'
다소 부서진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전에 고블린과 싸울 때 총을 그렇게 쏴 댔는데도 멀쩡한 걸 보면 화살로는 흠집도 안 날 거다.
'문제는 거리네. 여기선 멀리까지 쏠 수 없을 텐데.'
오피스텔의 최대 길이는 길어 봐야 7~8미터였다.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정확히 쏘는 것부터 해 보자.'
나는 활이란 물건을 처음 쏴 보는 초보 중의 초보다. 전이라면 무턱대고 시위를 당겼겠지만, 지력+1은 유튜브를 켜게 했다.
"아…. 생각보다 복잡하구나."
언젠가 올림픽 같은 게 TV에서 중계될 때 우리나라 국가 대표들이 10점을 턱턱 맞히는 걸 본 기억이 있다.
그래서일까? 쉽게 생각했던 것은 큰 오산이었다.
'그나마 여기엔 바람이 불지 않으니까.'
활은 바람과의 싸움이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나중엔 밖에서 연습을 해 봐야 할 것 같지만, 지금은 자세부터 잡는 게 우선이었다.
"끄응…."
영상으로 본 걸 따라 해 보았다.
"꽤 힘드네."
하지만 활이란 물건이 이렇게 까다로운지 처음 알았다.
힘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동작으로 처음 쓰는 근육을 자극해서 그런 것 같았다.
"후우… 다시."
화살을 끼우지 않고 시위만 당기는데도 꽤 어려웠다. 그냥 검을 휘두르는 게 더 나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포기할 순 없었다.
활 통과 활까지 사지 않았나?
'처음부터 되는 건 없어.'
팔 굽혀 펴기도, 스쿼트도 처음의 한 번이 있었기에 만 번을 해낸 거다.
"후욱!"
다시 시위를 당기고, 자세를 잡아 보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 때문에 화살을 끼운다고 해도 제대로 날아가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든다.
"상당한 연습이 필요하겠어."
장비가 아무리 좋으면 뭘 하나?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는 목숨 연명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을 것이다.
'차근, 차근….'
게다가 최근, 내 머릿속에서 경고등처럼 울리는 생각은 나를 더 채찍질하게 했는데, '어쩌면 다음엔 무기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고블린과 싸울 때는 총을, 부패의 주인과 싸울 때는 검을 썼었다. 만약 그 무기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여기 살아서 서 있지 못할 것이다.
'몇만 포인트짜리 무기를 계속 무상으로 빌려주는 건 말이 안 돼. 곧 끝날 시점이 올 거야.'
나는 이날부터 활을 진지하게 연습했다. 그러면서도 오가는 도중에 틈틈이 활 쏘는 법을 인터넷으로 공부했다. 연애를 책으로 배우면 안 된다는 말이 있었지만 내 경우엔 인터넷으로 습득한 정보를 바로 재능마켓에서 해 볼 수 있었으니 실력이 빠르게 증진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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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늘도 나는 인터넷으로 활에 대해 검색하며 등교하고 있었다. 활이란 무기는 알면 알수록 매력적이었고, 그 역사 또한 엄청났다.
인간은 나약했다.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의 인간은 더더욱 보잘것없었다. 그래서 각종 무기를 개발했는데 창이나 칼은 사용하려면 필수적으로 사냥감에 접근해야 하기에 아차, 하다간 이쪽이 공격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인간은 원거리 무기를 생각해 냈다.
'제대로 타격할 수만 있다면 활만큼 좋은 무기도 없어. 심지어 소리도 적어. 은밀하게 상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할 수 있다는 거야.'
여기서 문제는, 그만큼 활은 오랜 기간 숙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활지에서는 바람을, 악천후 시에는 날씨를, 장애물이 많은 산간에선 나뭇가지 하나만 스쳐도 방향이 엇나간다.
'나중에 더 좋은 무기가 나오면 갈아탈 수도 있겠지만 익혀 둬서 나쁠 건 없어. 살아남으려면 다 잘해야 해.'
체류 시간을 막대하게 소모하더라도 활을 익히고 싶다는 열망이 더욱 강해져 갔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도착한 교실.
오늘 예원인 학교에 오지 않았다.
-토요일에 대박이었지!
-어! 이러다가 예원이가 우승하는 거 아니야?
예원이는 톱 3까지 들었다. 그래서일까? 학교는 온통 예원이 얘기뿐이었다.
'잘하긴 했어.'
노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내가 봐도 그날의 예원이는 대단했었다.
-그런데 그 하얀 가면은 누굴까? 혹시 예원이 첫사랑?
-에이! 그럴 리가? 그냥 다 거짓말일걸? 대본대로 하는 거야.
-그렇겠지?
예원이의 노래만큼이나 그 사연 또한 화제였는데, '마이 히어로'라는 노래 제목과 아주 잘 어울렸다는 평가가 다수였다.
다들 그렇게 예원이 얘기로 정신이 없을 때, 나는 계속해서 활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다.
'양궁 연습장이 꽤 많네? 이런 건 돈을 얼마나 내야 할까?'
좁디좁은 오피스텔에서 연습하는 것엔 반드시 한계가 있을 것이다. 개활지에서 먼 거리의 목표까지 시원하게 활을 쏴 보고 싶다는 갈증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우선은 500만 원부터 모으고 생각하자. 야금야금 쓰다가는 못 모아.'
이미 58,000원이라는 거금을 하드케이스 사는 데 썼으니 당분간은 긴축해야 했다.
월급이 신문 800부 배달로 약 200만 원, 고기 불판 닦이로 100만 원 정도 되니까 미션만 통과하고 나면 여유가 생길 거다.
'이번 달 포함해서 두 달이야. 조금만 버티자.'
머릿속으로 온통 활 생각만 하고 있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생각에 빠져 있다가 움찔!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갤 들으니 담임선생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민준."
"네?"
반 아이들도 이게 무슨 분위기지? 라는 표정으로 나와 선생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번 쪽지 시험에서 네가 우리 반 일 등이다."
"…네에?"
어이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입만 떡 벌렸는데, 붙임성 좋은 박인성이 우왓! 하며 벌떡 일어났을 정도로 이 사건은 애들에게 충격이었다.
선생님이 얼굴을 푸근하게 풀며 나를 보고 흐뭇하게 웃으시며 말했다.
"녀석, 열심히 했구나. 앞으로도 기대하마."
"감사합니다…."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하며 나는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설마 내가 일 등까지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국, 영, 수 세 과목으로 한정했으니, 이런 결과가 나왔겠지만 이 정도라니!
'일 등이라고? 내가…? 하!'
남들 다 잘 때 신문 배달을 하고 재능마켓에 들어가서 죽을 만큼 공부했던 그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정말 노력하면 되는구나!'
운도 작용했겠지만, 내 노력이 허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 한없이 뿌듯했다.
'아니지, 재능마켓을 쓰는데 이 정돈 해야지. 당연한 거야!'
일 등이라곤 하지만 그건 우리 반 한정이다. 내가 잡은 목표까지 생각한다면 더 치열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이벤트는 이게 끝이 아니었나 보다.
1교시가 끝날 무렵 방송이 나왔다.
-1학년 도민준 학생, 교장실로 오세요.
'교장… 실?'
우리 학교 보스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