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마켓-20화 (20/277)

#020화

"괜찮으세요?"

한 손으론 짐을 받으며 그의 몸을 부축해 주었다. 전이었다면 나까지 중심을 잃고 쓰러졌을지도 몰랐지만, 체력+1과 그간 쌓은 체력은 멀쩡하게 버티게 해 준다.

"아앗, 고맙습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하하!"

조명 기기인가? 커다란 전구 같은 것이 든 상자를 보니 제법 무게가 나가 보인다.

"어디까지 가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 괜찮습니다! 초면에 민폐를 끼칠 순 없죠!"

그는 밝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곤 두 손으로 상자를 끄응 힘차게 들었지만, 또 한 번 휘청거렸다.

"보는 제가 더 불안한데요?"

"으, 팔에 힘이 빠졌나? 이상하네. 아깐 멀쩡했는데…."

무거운 걸 운반하다 보면 원래 그렇다. 나는 그에게서 상자를 넘겨받아 들곤 웃으며 말했다.

"어디로 가세요?"

"무대 뒤로 가면 되긴 하는데…. 하하, 이거 참 실례가 많네요. "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소매로 스윽 땀을 닦던 그는 나를 보며 물었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오디션 참가자 친척이에요."

"아! 그러셨구나! 학생?"

"네, 고1이요."

"와, 정말요? 근데, 그거 안 무거워요?"

"버틸 만해요."

솔직히 무겁다. 대략 30kg쯤 되는 것 같은데, 성인 남자라도 이걸 들고 오래 이동하면 기진맥진할 게 분명했다.

"혹시 무슨 운동 같은 거 했어요?"

"아니요. 이쪽으로 갈까요?"

"네!"

무대 뒤로 돌아들어 가서 그가 손짓한 곳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진짜 진짜 고마워요!"

-야! 장PD! 너 또 농땡이 피울래? 막내 주제에 빠져 가지고!

저쪽에서 누군가 외치자 그가 하핫! 웃으며 대꾸했다.

"노는 거 아니거든요?"

-곧 생방 시작이라고! 빨리, 빨리 움직여!

"옛썰!"

그가 나를 보며 미소 짓곤 저쪽으로 뛰어가며 말했다.

"고마웠어요! 언제 다시 보면 아는 척해요!"

그가 사라지자 나는 피식 웃곤 다시 예원이가 있을 대기실로 걸어갔다. 작은 도움이었지만 누군갈 도울 수 있다는 게 뿌듯하다.

'어렸을 때는 자주 그랬던 것 같은데….'

여물지 않은 아이들의 몸이라지만, 의지만 있으면 남을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점차 자라나며 여러 '벽'이 생겨나고, 그 벽은 아이들을 각박하게 만들어 간다. 나라고 그렇게 무의미하게 살고 싶었겠는가?

끼이이익.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예원이가 보였다. 저번처럼 참가자들 가족이나 친구로 보이는 사람들이 한가득 있었는데, 오늘도 예원인 혼자였다.

"민준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내가 들어서자마자 예원이가 손을 흔들었다.

녀석에게 다가서서 물었다.

"밥은?"

대답 없이 배시시 웃기만 하는 얼굴을 보니 거른 것 같다. 바짝 긴장한 모습이다.

"이제… 다섯 명 남은 건가?"

"으응, 오늘 두 명 더 떨어진대."

"살벌하네."

어차피 학교라는 것도 성적으로 사람을 가르지만, 이 오디션은 사회의 축소판 같았다. 타인을 이기지 못하면 추락한다.

"선곡은 잘했고?"

저번엔 선곡을 잘못해서 벌벌 떨었던 녀석이었다.

"그런 것 같아."

"다행이네. 꼭 붙어."

"노력 중이야. 근데 다들 굉장한 실력자들이라 오늘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네가 더 잘해."

"정말?"

"아마도?"

까르르 웃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긴장이 조금은 풀린 것 같다. 저렇게 웃는 예원이를 보면 가끔 아찔할 때가 있다. 왜 사람들이 열광하는지도 알 것 같고.

그러다 문득,

'생수라도 줄까?'

그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속으로 삼켰다. 앞으로도 계속 노래하며 살아가야 할 텐데 약물에 의존하게 되면 좋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내가 그걸 더 구할 수 없게 되면 둘 다 망하는 거니까.'

재능마켓은 살얼음판이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이템을 남발할 순 없었다.

'결국엔 자기 실력으로 해야 하는 거야.'

아이템보단 녀석의 긴장을 풀어 줄 따듯한 몇 마디가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몇 번째야?"

"노래 순서?"

"어."

"첫 번째. 전에 내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거든. 그래서 선택권이 있었는데, 앞에 한다고 했어."

"용감하네?"

"쫄보라 그렇지. 남들 하는 거 다 보면 자신감이 추락하거든."

"어느 쪽이든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 해도 너는 칭찬받아도 돼."

"헤에, 그래?"

"그래."

서로 마주 보고 웃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어? 아까 그 사람이네?'

그가 참가자들을 보며 외쳤다.

"10분 전입니다! 진예원 씨!"

"네!"

예원이가 일어났다.

"준비됐어요?"

그가 우릴 향해 걸어오면서 나를 보았다.

"어, 아까 그 학생? 하하! 예원 씨 친척이었구나!"

"아, 네."

"에? 장 PD님, 민준이 아세요?"

"아까 잠깐, 이 친구 도움 좀 받았지. 하하! 근데, 미안.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우선 이동부터 하자구요!"

"아, 네!"

그렇게 정신없이 무대 뒤로 가서 준비하는 예원이를 보며 응원해 준 뒤 나는 방청석으로 돌아와 앉았다.

이제 남은 참가자는 다섯.

노래 한 곡당 길어야 4분이기에 2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생방송을 이어 가려면 오늘부터는 노래가 아닌 다른 것들로 시간을 때워야 했다.

-열기를 더해 가는 K스타 오디션! 이제 국민 오디션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요!

사회자가 무대로 올라왔다.

그리고 저 말은 진짜다. K스타 오디션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오늘 살아남아서 톱 3까지 가면 스타가 되는 길을 예약해 둔 거나 다름없었다.

-대망의 첫 번째 참가자! 만나 보시기 전에! 영상부터 보시겠습니다!

그가 돌아서며 무대의 화면을 가리키자 방청석 조명이 꺼졌다. 그리곤 어디선가 예원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진예원입니다.

'…?'

이어 켜진 화면에는 초등학교 운동장이 보였다.

삼삼오오 노는 아이들의 표정은 해맑고 귀여웠는데, 여자아이들은 고무줄놀이, 남자아이들은 축구를 하고 있었다. 방청석의 모두가 마치 어린 시절 추억이라도 떠올리듯 영상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는데,

돌연 우르르르릉!

천둥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분위기가 반전됐다.

화면도 더 음침하게 변했고, 고무줄놀이를 하던 여자애들도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곤 어두운 그림자와 함께 딱 봐도 '악당'으로 보이는 몇 명의 덩치 큰 아이들이 등장했다.

-으아! 집에 가자!

-나도 같이 가!

그 녀석들이 나타나자 축구 하던 남자애들이 사방으로 도망쳤는데, 덩치 큰 녀석들의 타깃은 곧장 고무줄놀이하던 여자애에게로 돌아갔다.

'괴롭히는 놈들인가?'

아이들이 노는 것을 훼방 놓던 덩치 큰 녀석들은 결국 고무줄마저 다 끊어 놨는데, 몇몇 여자애들이 용기 내 외쳤다.

-하지 마!

-너희 싫어!

하지만 악당들은 순순히 갈 생각이 없는 듯 오히려 빈정대며 놀려 대기 시작했다.

-헤지 마~ 헤지 마~

-할 건데? 하면 어쩔 건데?

그런데 그때였다.

짜잔!

하고 나타난 하얀 가면의 꼬마가 여자아이들을 지키려는 듯 난입했다.

-넌 하얀 가면?

-으윽! 놈이 나타났다!

-이 훼방꾼이!

어떻게 보면 참으로 흔하디흔한 이야기였다.

하얀 가면은 악당들을 물리치고 아이들을 지켜 냈다. 뻔하지만 아름다운 결말. 이런 건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다.

이때, 예원이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깔렸다.

-아버지는 군인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 자주 이사를 다녔어요.

'아, 그랬나.'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친구를 사귀기도 쉽지 않았는데, 꼭 어디에나 못살게 구는 아이들이 있더라고요.

내 주변에서 '맞아, 맞아! 꼭 그렇다니까?' 맞장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노랠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화면이 꺼졌다.

그리곤 무대에 안개가 깔리고 예원이의 모습이 보였다.

-마이 히어로.

예원이가 웃으며 방청석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첫사랑에게.

"…."

집중력 드링크 따위, 지금 예원이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이다.

"와…."

"끝내준다…."

"숨을 못 쉬겠어."

주변 반응도 대단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예원이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 역시 절로 중얼거렸다.

"잘하네…."

간주가 끝나고 2절로 들어가며 예원이는 한층 더 목소리에 감정을 실었다.

'마이 히어로.'

원곡은 아버지에 대한 노래였던 것 같았는데, 예원이 버전은 풋풋했던 첫사랑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이윽고 녀석의 노래가 끝났고,

-와아아아아아아아!

-최고다!

-진예원! 진예원!

-언니! 사랑해요!

엄청난 함성이 뒤따랐다.

-대국민 문자 투표! 지금 시작합니다! 1번, 진예원 참가자의 노래가 심금을 울렸다면 지금 바로 투표하세요!

예원이가 무대 뒤로 사라지고, 다시 화면이 불을 밝혔다. 거기엔 예원이가 지난 몇 주간 혹독하게 연습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머리를 질끈 묶고 발성 연습하는 장면에선 내 마음도 욱신욱신할 정도로 안타까웠다.

'그간 고생 많았구나.'

나도 스마트폰을 꺼내서 1번에 투표했다. 만약 오늘 여기서 탈락한다고 해도 예원이는 이 방송을 본 사람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을 것 같다.

.

.

.

집으로 돌아왔다.

자고 일어나니, 핸드폰엔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있었다.

【고마워. 덕분에 또 살아남았네! 혹시 다음 주에도 와 줄 수 있어?】

시간을 확인한 나는 답장 대신 피식 웃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이른 새벽, 집을 나섰다.

신문을 배달하며 동네를 돌다 보면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치게 된다. 주로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나 새벽 배송을 하는 이들을 보는데, 이렇게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고주망태가 되어 늦은 귀가를 하는 이들도 만난다. 물론 저들도 다 각자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요는 모두가 매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거다.

'힘내자!'

이제 나는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다. 이 걸음 하나하나로 미션을 수행하고 나를 발전시키며 체력도 늘어나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더 치열하게!'

내가 이달의 목표로 한 신문이 무려 하루 800부다. 이 살인적인 숫자를 감당하려면 잠시도 쉴 틈은 없었다. 그나마 주말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니 여유가 있었지만, 그럴수록 나 자신을 더욱 몰아붙이고 싶었다.

-오늘도 수고했다! 집에 가서 한숨 더 자!

소장님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씨익 웃었다. 그리곤 발걸음을 빨리했다. 목적지는 집이 아니었다.

봉천동에서 강남역까지 전철로는 20분 남짓 걸리지만, 직선거리는 8km쯤 된다. 중간중간 신호가 걸려서 강제로 쉬어야 하지만, 이제 미션이 끝날 때까지는 웬만하면 뛰어다닐 생각이었다.

'넉넉하게 잡아서 왕복 20km. 열흘이면 200km.'

신문 배달하면서 뛰는 것까지 포함하면 매일 41.195km 이상을 뛰는 셈이었다. 마라톤 완주 거리에 맞먹는 거리이건만, 이렇게 해내는 나 자신이 기특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덧 문 앞.

"후…."

이렇게 나는 또다시 재능마켓 앞에 와 있었다.

사실 오늘 내 가슴을 가장 두근거리게 하는 건 미션도, 공부도 아니었다.

"…."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채 오피스텔 문을 열었다.

【재능마켓에 입장했습니다. 재능마켓은 하루 한 번 이용할 수 있습니다. 체류 가능 시간 681시간 33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신발은 벗지 않았다. 그리곤 곧장 안으로 들어가 계단 옆의 물건을 잡았다.

묵직한 활의 몸통이 잡혔다.

그러자,

"후…."

한순간 현실감이 화악! 물러났다.

대한민국, 아니 지구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거다.

'이걸… 어떻게 쓰지?'

내 첫 번째 장비.

【용사의 빛나는 활(레어)을 장착했습니다.】

내 오늘의 목표.

무조건 이것의 사용법을 익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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