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마켓-19화 (19/277)

#019화

부우우웅.

내 옆으로 공간이 열렸다.

그 너머엔 오피스텔 계단이 보였다.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경계라고 해야 할까? 저기로 나가면 바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다. 아, 엄밀히 따지면 오피스텔을 가장한 재능마켓 자체도 비현실은 맞지만, 적어도 여기보단 나았다.

"레어…."

이런 색의 아이템은 처음 봤다.

부패의 주인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 긴장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거다.

두근두근.

허리를 숙여 빛나는 조각을 잡아 가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그것을 움켜쥐는 순간!

【용사의 빛나는 활을 얻었습니다.】

【필드 아이템은 자동 귀속됩니다.】

【필드 아이템은 재능마켓에서 구매할 수 없습니다.】

이런 걸 완제품이라고 하나?

소재나 소모품이 아니라 완성된 아이템!

'활이라니…?'

그것이 붉은빛이 묵직한 활의 형태로 변했고, 그걸 홀린 듯 손에 쥐어 보았을 때 정보 창이 떴다.

【용사의 빛나는 활(레어)(귀속)

흔하디흔한 활이 부패의 주인에 의해 숙성되어 특별한 성능을 지니게 되었다.

고유 효과: 시위가 영구적으로 끊어지지 않는다.

착용 효과: 일정 확률로 빙속성 효과를 화살에 부여한다.

추가 효과: 활을 장비했을 때 추위 내성이 조금 올라간다.】

"와아…."

그러고 보니 활을 든 후부턴 손이 시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레어' 아닌가? 문제는 이걸 들고 다니면 미친놈 소릴 듣겠지만….

'긴 하루였어….'

주변을 보며 회한에 젖던 나는 공간이 열린 곳을 향해 걸어갔다. 이건 포털이라고 부르면 편할 것 같다. 다른 단어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완전히 몸을 밀어 넣자 포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나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오피스텔 2층 계단 앞에 서 있었다.

"…."

【재능마켓 체류 시간이 1,000시간 남았습니다.】

그래, 나는 이걸 얻기 위해 필드에 들어갔었더랬다.

【누적 포인트 2,150.】

쓴 것 이상의 포인트도 벌어 왔다.

쓰지 않은 생수도 잔뜩이었고, 레어 활도 얻었다.

"후우…."

많은 일이 있어서 그런가?

완전히 지쳐 버렸다.

하지만 나는 돌아섰다.

맘 같아선 여기서 곧장 널브러지고 싶지만, 귀하게 얻은 체류 시간을 그렇게 쓰면 안 될 것이다. 활과 회복 효과의 생수 같은 것들을 가방에서 꺼내 놓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

문을 열기 전, 잠깐 뒤를 돌아봤다.

아까 내가 겪은 게 진짜인가?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저기 보이는 활은 진짜였다.

피식, 왜 웃음이 날까?

아마도 이건 나만의 비밀, 그 비밀에서 아주 값진 것을 따냈다는 쟁취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콰앙!

문이 닫히고, 나는 집으로 곧장 돌아가서 씻지도 못하고 잠들었다.

좀비가 물어뜯는 악몽이라도 꾸는 거 아닐까? 아주 잠깐 걱정했지만, 피곤이 이겨 버린 것 같다. 어쩌면 꿈보다 황당하고 무서운 현실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고.

.

.

.

어제 어떤 일을 치렀더라도 새로운 하루는 밝는다. 고되었지만, 멈출 수는 없는 시간. 나는 언제나처럼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배달하고, 학교에 갔다.

오늘이 화요일.

쪽지 시험까지는 오늘을 포함해서 고작 3일의 여유밖에 없었다.

'아니지. 나는 1,000시간이 더 있는 거지.'

재능마켓 체류 시간은 내가 목숨 걸고 따낸 거다. 그 덕분에 다른 애들은 피가 마르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한결 여유롭게 수업을 들었다.

학원도, 과외도 안 듣는 내가 갑자기 성적이 오르면 의심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뭘 밝혀내진 못할 거다. 내게 일어난 일들을 나조차 설명하지 못하니까.

'공부가 제일 쉬웠어.'

자고로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말들은 다 그럴 만하니까 그런 거다. 목숨 걸고 거인 좀비랑 싸우는 것보단 이편이 훨씬 안전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었으니 오죽할까. 활을 얻긴 했지만, 현실에선 서울대 간판이 더 먹어 줄 거다.

'서울대라….'

생각하고 나니, 헛웃음이 났다.

서울대란 말을 입에 올릴 정도로 내가 거만해진 건가? 그걸 넘어 오만한가?

'아니지, 못 할 건 또 뭔데?'

스쿼트에 성공했을 때나 고블린을 죽였을 때보다 더 큰 자신감이 생겼다. 아직도 좀비들을 죽였던 감각이 손끝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지만, 자고 일어나니 반쯤은 무뎌졌다. 이렇게 몇 밤 더 지나면 희미한 기억만 남을 거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나는 예원이의 얼굴을 보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몇 번이나 불렀다고."

"그랬어? 미안. 요즘 정신이 없네."

재능마켓 일도 비현실이었지만 예원이와 이렇게 마주 보고 얘기하는 것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건 마찬가지다.

-쟤네 진짜 사귀나?

-또 붙어 있네?

-예원이가 뭐가 부족해서!

질투 어린 시선들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원이는 웃으며 내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안 써."

거인 좀비랑 싸웠던 나다. 저런 말쯤은 심장에 박히긴커녕 피부도 뚫지 못한다. 돌이켜 보면 그 경험들로써 싸움의 기술이 늘었다기보단 정신적으로 더 성장한 것 같다.

"이번 주에도 와 줄 거지?"

"주말에?"

"으응…."

"네가 원하면."

내 말에 예원이가 대답 대신 얼굴을 붉히며 끄덕거렸다. 그러더니 입술을 모아 '고마워.'라고 소리 없이 말하며 돌아섰다.

'귀엽네.'

예원이가 내게 왜 호의를 베푸는진 모르겠다. 그 스토커? 떼어 줬다고 이러는 건 아닌 것 같고…. 오히려 그때 그 일로 재능마켓을 얻었으니, 내가 고마워해야 할 판이었다. 이걸 말할 수 없다는 게 문제겠지만.

.

.

.

【미션 완수까지 800.389km 남았습니다.】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빠르게 현실에 적응해 갔다. 돈도 벌고, 열심히 뛰면서 미션 거리도 줄여 갔다. 학교가 끝나면 고깃집에 가서 불판도 닦았는데, 처음엔 서툴렀지만 하면 할수록 속도는 빨라졌다.

알바가 끝나면 재능마켓으로 가서 100시간씩 공부하며 잠도 자고, 시간을 보냈다. 목숨 걸고 따낸 시간이라서 그런지 더욱 귀해진 이 순간을 나는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만큼 더욱 값지게 만들고 싶었다.

이윽고 금요일.

'시험'이라는 걸 앞두고 이렇게 긴장해 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다른 아이들도 열심이었지만, 나는 그 무게부터가 달랐다.

애초에 공부를 포기했던 나.

하지만 다시 진지하게 임하면서 미래에 대한 꿈을 품게 되었고, 그 첫 번째 가능성의 무대가 바로 오늘이 될 것이다.

-자리부터 바꾸고! 커닝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핸드폰 꺼내는 놈은 바로 빵점 처리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선생님이 아이들을 채근했다.

"…."

쪽지 시험도 시험인 만큼 예원이도 나와 있었는데, 자릴 바꾸며 예원이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싱긋 웃어 주는 예원이.

예원인 충분히 꿈을 이뤄 가고 있어서인지 시험에 크게 부담을 느끼진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후우…."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집중력 드링크라도 마셔 볼까? 생각도 했지만, 놀랍게도 나는 몇 번의 사선을 넘어서인지 스스로 차분해지는 방법을 터득했다.

국어, 영어, 수학.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이를 갈게 되는 이 세 과목을 앞두고, 나는 가볍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답안지 밀려 쓰지 말고! 집중하자! 집중!

드디어 앞에서부터 시험지가 넘어오기 시작했고,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실전처럼 하는 거야! 모두 힘내자!

얼마 후면 중간고사다.

사실 이 쪽지 시험이 전부가 아니었지만 전초전이라고도 할 수 있었고, 첫 단추가 중요할 것이다.

드디어 눈앞에 시험지가 펼쳐졌다.

'아아….'

나는 시험지를 보며 씨익 웃었다.

전엔 시험지를 받으면 눈앞이 캄캄했는데, 이젠 보인다. 재능마켓에서 치열하게 투쟁했던 그 시간들이 내 눈을 뜨게 한 거다.

'어렵지 않아. 풀 수 있어!'

사각, 사각.

펜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속도는 점차 빨라져 갔다.

-으악! 완전 망했다!

-3번에 4번이 맞아? 1번 아니고?

-으아아앙! 어떻게 해!

한 과목이 끝날 때마다 아이들은 정답을 맞춰 보며 희비가 엇갈렸다. 하지만 내게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은 이미 서로서로 알고 있었는데, 나는 그 카테고리에 없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했어. 운이 좋게도 공부한 범위가 많이 나왔기도 했고.'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나름 만족할 만한 시간이었다.

'이제 다시 미션이다.'

쪽지 시험도 끝났겠다 1,000km 달리기부터 집중해야 할 때가 왔다. 이걸 끝내야 필라테스 미션을 수행할 수 있다. 지력이나 체력+1에 바짝 목말라 있었기에 더 가혹하게 나를 몰아붙여야 할 때가 온 거다.

'돈도 아낄 겸, 강남까지 뛰어갈까?'

이런 생각까지 한다니, 내가 미쳐 버린 걸까?

'두 시간이면 될 것 같은데, 못 할 것도 없잖아? 잠은 알바 끝나고 거기서 자면 되니까.'

사람 인생은 시간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갈린다. 그런데 나는 재능마켓을 이용할 수 있으니 일반적인 이들관 달리 살 수 있었다.

'우선순위에 따라 외부와 재능마켓을 적절하게 조절하자.'

이번에 '부패의 주인'과 싸우고 나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본래는 일정한 루틴을 짜서 몇 달 후에 500만 원 벌기와 1,000km 달리기를 완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낙천적으로 살아선 갑자기 죽어 버릴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생겼다.

뿐인가? 1,000시간을 다 쓰면?

어떤 고난이 펼쳐질지 까마득하다.

'지금은 뛰는 게 먼저야.'

나는 이날 강남역까지 뛰었다.

숨이 차서 몇 번이고 멈췄지만,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생수 몇 모금을 마시니 해결됐다. 그리곤 고깃집에 가서 불판을 닦고 재능마켓에 들어서자마자 잤다.

6시간쯤 푹 자고 일어나서 공부했다. 쪽지 시험이 끝났다고 서울대에 가는 건 아니다. 계속 몰아쳐야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뒤 또 잤다. 체력을 다 회복한 뒤 밖으로 나와서 한강을 목적지로 해서 달린 다음, 3시간을 뛸 수 있는 코스를 숙지했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와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 잤다. 남들의 하루를 나는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거다.

【미션 완수까지 700.112km 남았습니다.】

마침내 700km가 남았다. 이렇게라면 한 달 안에 1,000km 달리기 미션은 끝낼 수 있으리라.

'정신력과 체력 회복을 위해선 체류 시간을 다시 따야 한다는 게 문제겠지만.'

나는 어느샌가부터 뛰는 게 진심으로 좋아졌다. 뛰면서 체력이 부쩍 늘어나는 것도 느껴졌고, 달린다는 게 이렇게 시원한 것인지도 처음 알았다.

그랬다. 좋았다.

왜 사람들이 운동에 중독되는지 알 것 같다. 그러면서도 짬짬이 공부도 했는데, 그냥 뛰면 심심하니까 영어 단어를 외우면서 뛰었다. 수학 공식 같은 건 어려워도 단어는 얼마든지 익힐 수 있었다.

'사람은 뭐든 할 수 있어.'

그걸 내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다. 목표를 크게 잡으면 더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

.

.

토요일 오후.

예원이를 보러 방송국에 왔다.

얼마 전에도 왔던 것 같은데,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건 내가 하루를 몇 배나 길게 살고 있기 때문일 거다.

'쉰다고 생각하자.'

나는 요즘 고기 불판도 1시간에 12개는 닦을 수 있게 되었다. 이건 더 노력하면 15개까지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문 배달에 고깃집 알바까지 하니 500만 원도 까마득해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가끔은 쉬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겠나?

-생방송 45분 전입니다!

관계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오디션 프로그램 중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었기에 더 완벽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는지 긴장이 자욱하게 흘렀는데, 문득.

'또 혼자 있겠지?'

대기실에 외롭게 있을 예원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쪽으로 향하는데 저 앞에서 누군가 위태롭게 걸어오고 있었다. 산더미처럼 짐을 두 손으로 안아 들고 있었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는데,

'저러다 쏟아지겠는데?'

이런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이크…!"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그를 보며 나는 순간적으로 튀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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