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화
【축하합니다! 코어가 성장했습니다!】
【첫 필드의 사냥으로 플레이어 정보가 활성화됩니다.】
【플레이어 정보는 언제든 불러올 수 있습니다.】
【30포인트를 얻었습니다.】
【레벨이 오르면 많은 것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투욱.
가슴부터 사선으로 잘린 좀비의 상체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런데 좀비는 아직 절명하지 않았는지 입을 뻐끔거렸다. 회 뜬 생선 머리가 일정 시간 살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기괴한 장면을 잊게 할 만큼 더 신비한 광경이 내 앞에 펼쳐졌다.
【도민준. 레벨 2. 재능마켓 소유자. 체력 1. 지력 1. 누적 포인트 30.】
"…!"
수호 부적이나 무엇이든 벨 수 있는 용사의 검, 장화와 우의를 갖고 있다는 정보도 보였고, 현재 보유 포인트나 이제까지 어떤 스탯을 올렸는지도 한눈에 보였다.
홀로그램처럼 반투명한 게 내 시선 앞에 떠올라 있었는데, 이건 꼭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가상 현실 게임이 이렇게 나오면 대박 치겠는데?'
황당하니까 별생각이 다 든다. 어쩌면 긴장감과 좀비를 죽인 죄책감을 잊으려 한 무의식의 발현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돌아가자.'
축 늘어지는 좀비를 보며 나는 몸을 돌렸다. 아직 사방에 얼음 기둥은 많았고, 저 안에 좀비처럼 뭔가가 들어 있다면 추위부터 가셔야 했다.
"후우, 후우."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니 추위가 거짓말처럼 없어졌다. 나는 우의와 장화를 벗었다.
"장난 아니네."
발가락을 움직이는데, 내 발 같지 않았다. 아깐 좀비 때문에 못 느꼈었는데, 위험에서 벗어나자 현실이 닥쳤다.
손으로 발을 주무르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해볼 만해. 좀비가 깨어날 때까지의 시간은 1분. 적응하면 놈이 나오기 전에 처리할 수 있겠어.'
오히려 문제는 추위였다.
'환경 자체가 워낙 압도적이니까 조마조마하지만, 그냥 허수아비 자른다고 생각하자. 단타로 치고, 빠지고 반복하면….'
나는 생각을 멈추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움직였다.
'백 개씩만 해서 체온을 높이자.'
바깥과 달리 추위가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내 몸에 남은 한기는 여전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장 잘하는 두 가지 운동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얼었던 몸이라 한 동작만 하면 근육이 뭉쳐 쥐가 날 수 있으니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열을 내려는 거다.
그리곤 잠시 뒤.
어느 정도 체온을 올리고, 생각을 마친 나는 장화와 우의를 걸친 뒤, 다시 설원 앞에 섰다.
'저… 네 개부터.'
하난 처리했으니, 보이는 것은 이제 넷이다.
'뛰자.'
방향을 정하곤 곧장 전력으로 질주했다. 먼 거리는 아니었고, 이미 나는 뜀박질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으니, 망설일 것도 없었다.
【얼어붙은 좀비의 영역에….】
"알아."
메시지를 더 들어 볼 것도 없이 자세를 잡았다.
이미 어느 정도 생각은 해 두었다. 아까, 까앙! 하면서 느꼈던 반탄력을 되새기며 신중을 기할 것이다. 고통과 아픔을 반복하면 그게 트라우마가 되어 몸이 굳을 수도 있으니까.
'이번엔 찔러 보자.'
아깐 휘둘렀지만, 다양한 공격 루트를 확보하는 게 좋단 판단이 들었다. 두 손으로 검 손잡이를 꽉 잡고, 내 가슴까지 치켜올린 다음 나는 얼음덩이를 향해 검을 차분하게 밀어 넣어 보았다.
그러자, 쑤우우욱!
"으으음…."
부르르르르!
좀비가 얼음 안에서 가슴이 관통당해 눈동자를 떨어 댔다. 아직 몸도 못 움직이는데 봉변을 당해 비명조차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걸 보니, 뭔가 기분이 찝찝했다. 아까보다도 시간도 단축되고, 새로운 전략이 먹혔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붙긴 했지만, 무언갈 죽인다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성공했다.
나는 좀비의 가슴을 관통한 검을 다시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끄응…."
무엇이든 벤다고 하지만, 물 안에서 휘젓는 것처럼 힘이 전혀 안 드는 건 아니어서인지 신음이 절로 나왔다.
서겅!
다시 밖으로 나온 검과 얼음 안에서 가슴이 완전히 잘린 좀비가 보였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30포인트를 얻었습니다. 누적 60포인트.】
이번엔 레벨이 오르진 않았다.
대신 경험치라는 단어가 새로 나온 걸 보면 일정 경험치를 확보해야 하고, 그러면 레벨이 올라간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어렵지 않아.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처음부터 휘두르지 말고 찔렀으면 일이 쉬웠겠다 싶다. 어쨌든 이 또한 다 경험이니 아쉬워할 건 없었다.
나는 다음 타깃으로 뛰었다.
아까보다 쉽게 일을 처리해서 그런지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서걱!
이번엔 한 번에 얼음과 함께 벴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30포인트를 얻었습니다. 누적 90포인트.】
앞선 경험을 토대로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네 번째 좀비에게는 살짝 도약해서 내려오면서 검을 휘둘러 볼 만큼 여유가 생겼는데,
【축하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30포인트를 얻었습니다. 누적 120포인트.】
갑자기 메시지가 울렸다.
아까는 한 마리, 이번엔 세 마리를 잡으니까 레벨이 올랐다. 레벨이 오를수록 경험치가 더 요구되는 것 같다. 뭐, 아직은 레벨이 올라서 뭐가 좋은지 모르겠지만, 뭐든 높아서 나쁠 건 없다.
무엇보다 포인트가 팍팍 쌓이고 있었으니, '꿩 먹고, 알 먹고'가 이런 거 아니겠나?
'잠깐 돌아가서 몸을 녹이자.'
나는 마지막 한 마리를 두고 돌아섰다. 이왕이면 끝을 내고 싶었지만, 더 있다가는 저체온증에 걸리겠다.
그런데, 그때.
"어?"
막 벤 얼음덩이 파편에서 뭔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그리고 이건 한번 본 적 있는 현상이었다.
"아이템?"
고블린을 죽이고, 필라테스 티켓을 얻었을 때 보았던 장면!
스스스스스.
조금씩 먼지처럼 사라지는 좀비 시체를 보다가 완전히 없어진 뒤, 몸을 숙여 반짝이는 걸 집었다.
【화끈 드링크를 얻었습니다. 복용하면 30분간 추위를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정말?"
【필드에서 얻은 소모품은 획득 시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건 대박이었다.
밖에 가지고 나갈 수도 있다는 거 아닌가? 효과만 입증할 수 있다면 히말라야 같은 곳을 등반하는 이들에게 유용한 물건이 되지 않을까?
'아니, 이런 게 있음 진작 하나 줬을 것이지.'
돌연 배신감도 들었지만, 여기 불친절한 거야 어디 한두 번인가? 게다가 없는 것보단 지금이라도 얻었다는 게 중요하다.
'아이템은 확률인 건가?'
아까 잡은 좀비에게선 못 봤었다.
혹시나 놓친 게 있었을까 하는 마음에 나는 성큼성큼 길을 되짚어 가보았다.
'없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나올 수도 있지만, 안 나올 수도 있다는 거다. 심지어 이제 고작 하나 나왔으니 아껴야 한다.
'우선 돌아가자.'
나는 극한에 몰리기 전 베이스캠프로 돌아와 몸을 녹였다.
'부패의 주인인가 뭔가가 남았어. 지금 내가 잡는 게 좀비는 아닐 거야. 그렇다면 그게 등장하기 전엔 최대한 아껴서 쓰는 게 좋아.'
무엇보다 이 안에선 재능마켓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포인트를 벌어도 그 포인트를 쓰려면 살아서 나가야 한다는 거다. 어차피 시간제한이 없었으니 나는 최대한 몸을 회복한 뒤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다섯 번째 얼음덩어리는 가장 먼 곳에 있었다.
추위를 이기려면 뛰는 게 낫다.
"훅! 훅! 훅!"
입김이 나오자마자 얼어붙는 추위를 뚫고 도착한 나는 이제 능숙하게 검을 휘둘렀다.
【30포인트를 얻었습니다.】
이제 좀비가 깨어나기 전에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한데, 다음이 문제였다.
'어디로 가야 하지?'
이런 설원에서는 자칫 방향을 잃으면 고립될 수 있다. 게다가 발자국도 시간이 지나면 눈에 묻혀 버린다. 하늘을 봐도 해나 별처럼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었다.
'이 얼음덩이를 중심으로 다녀야 해.'
시간이 무제한이라지만 그렇게 낙관적으로 있다간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우선 뛰기 시작했다. 무작정 뛰는 것은 아니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뛰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얼음덩이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렇게 20미터쯤 전진했을 때,
"으으으으음…."
나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벽인가…."
하늘 끝까지 뻗어 있을 것 같은 빙벽이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건 어떻게 보면 호재일 수도 악재일 수도 있었다. 더 멀리까지 가서 길을 잃지 않아도 된다는 건 좋지만, 반대로 갇혔다는 게 뼈저리게 실감 났다.
'이쪽?'
이제 방향은 둘.
벽을 뚫고 나아가는 건 불가능해 보였으니,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다.
'어느 쪽이든 비슷하려나.'
생각을 길게 하면 좋지 않다.
좀비보단 추위가 더 큰 문제니까.
퍼덕, 퍼덕.
비닐 소재의 우의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오랜 못 버텨.'
돌아갈 때 돌아가더라도 정찰은 해야 해서 나는 왼쪽으로 뛰었다. 체력 소모는 심했지만, 걷는 것보단 추위를 이겨 낼 수 있었으니 별수 없었다.
'열 걸음.'
그렇다고 무작정 뛰어가는 건 아니었다.
'삼십.'
내 보폭을 정확하게 알 순 없었지만, 한 발 한 발 숫자를 세면 거리를 짐작할 순 있을 거다. 그게 오십이 되었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나는 방향을 틀었다. 베이스캠프를 향하는 거다.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벽 끝까지 확인하면 돼.'
그러면 오른쪽만 남게 된다.
'생각보다 크진 않은 것 같아.'
이번 미션은 환경에 적응하고, '적'을 거리낌 없이 처리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을 수도 있다.
그렇게 나는 베이스캠프를 몇 번이나 왕복하면서 설원을 누볐다. 좀 하다 보니 이제 눈밭을 뛰노는 아이들처럼 완벽히 적응하고 있었다. 체력이 떨어지면 회복 효과가 있는 생수를 마시면서 버텼다.
그게 얼마나 반복되었을까?
【축하합니다!】
뛰다가 놀라서 우뚝 섰다.
【추위 내성이 생겼습니다. 이제 추위에 조금 이겨 낼 수 있습니다.】
'내성이라고…?'
'조금'이라고 했지만, 그 체감 효과는 대단했다. 전력 질주를 하고 스쿼트를 해도 추위 자체는 어쩔 수 없었는데, 한순간에 마치 두꺼운 패딩을 입은 것처럼 몸에서 한기가 나갔다.
【레벨이 오르면 필드에서 더 많은 스킬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레벨이 오르면 아이템의 출현 확률이 높아집니다.】
"아… 그래?"
듣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그렇게 되물으며 웃었다. 좀비가 튀어나오고 몸이 덜덜 떨릴 설원에 혼자 있었지만, 이렇게 작은 희망이 있으면 사람은 언제든 웃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한결 따듯해진 몸으로 오른쪽 빙벽을 훑던 나는 그 끝 지점쯤 도착해서 탄성을 질렀다.
"아-!"
저기 뭐가 있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침내 목적지를 발견했다는 쾌감이 앞선 거다.
설원엔 좀비 다섯이 전부였던 것 같다. 눈보라 때문에 빙벽과 베이스캠프 사이에 내가 놓친 게 몇 개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새로운 게 나타났다는 거다.
나는 그쪽으로 냉큼 뛰어갔다.
높이가 3미터쯤 되어 보이는 빙벽 동굴은 안으로 깊이 이어져 있었는데,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바람은 멎었다.
'여기려나.'
이제 도착 지점에 온 것 같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정비했다.
생수를 마시고 만일에 대비해서 드링크를 주머니에 넣었다. 위급할 때 써먹으려면 가방 속은 좋은 선택이 아니니까.
'앞으론 주머니가 많은 옷을 입어야겠어.'
왜 낚시꾼이나 등산하는 사람들이 그런 조끼를 입는지 알겠다. 세상 모든 것엔 다 이유가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후우, 쫄지 말자. 지금까지 잘해 왔어.'
처음 설원에 들어왔을 땐 그렇게 막막했었지만, 나는 잘 이겨 내고 있었다. 뭔가 되게 거창한 것 같지만, 못 할 미션을 내진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자박.
걸음에 얼음 조각이 소음을 냈다. 밖은 눈밭이었지만, 이 안은 온통 얼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벽 너머가 보이진 않았는데, 얼핏 반사되는 내 모습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이 길 끝에 '부패의 주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고 그만큼 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두려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그걸 이겨 내는 사람만이 그 너머를 볼 수 있으리라.
"…."
마침내 나는 문 하나를 앞뒀다.
"…후우우."
콧속은 이미 꽁꽁 얼어 코를 쥐면 작은 얼음 알갱이들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이마는 불덩이였다. 한껏 오른 긴장과 투지가 비현실적인 열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일단 먹자.'
추위를 없애 준다는 드링크를 주머니에서 꺼내 마셨다.
화아아아아악!
뜨끈한 라면 국물이 목구멍에 넘어간 것처럼 온몸에 화기가 돌았다.
이제 지속 시간 30분!
아이템 시간을 1분이라도 아껴야 했기에 나는 문을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보았다.
"허억…."
폭이 30미터 정도 되는 공터 중앙에 선 '거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