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부패腐敗의 주인?'
재능마켓 체류 시간을 1,000시간이나 확보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어마어마한 혜택이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하지 않은가? 한데, 나에게만 그만큼 주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만큼.
'쉬울 리가 없어.'
또한, 누구인지도 모를 부패의 주인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이건 누가 봐도 그냥 고블린 따위가 아닐 거라는 불길한 느낌이 팍팍 들었다.
그러나 이미 들어온 이상 돌아갈 수도 없다. 내가 죽거나 미션을 완수하거나!
'죽기 싫어.'
될 대로 되라던 망가진 삶이 아니다. 이제 뭔가 해 보려는데 여기서 끝낼 순 없었다.
메시지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목표: 지정 타깃 제거. 사망 시 실패. 시간제한 없음.】
'시간제한은 없어. 조급할 필요도 없다는 거지. 차분하게 가자.'
내가 가진 건 칼 한 자루와 포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일회용품이 전부다. 이것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시험장에 입장하셨습니다.】
메시지에 천천히 눈을 떴다.
'일단 어둡진 않아.'
시야가 확보된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눈을 뜨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후우…."
손을 뻗어 벽을 만져 보았다.
땅을 파낸 것 같은 벽면은 세월을 가늠할 수 없었는데, 내가 아는 곳과 같은 곳이 아님을 증명해 주는 것 같다.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없네.'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긴장을 한껏 끌어올렸다.
서울에서는 무언가와 목숨을 걸고 싸워 볼 기회가 거의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 죽음과 삶의 경계에 들어와 있었다. 애초에 퀘스트 실패 조건이 '죽음' 아닌가?
"…."
마른침이 절로 꿀꺽 넘어간다.
나는 어색하지만 두 손으로 검을 단단히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보았다. 검을 휘둘러 본 적도 없었으니, 이것부터 익숙해져야 했다.
시야는 약 5미터 앞에서부터 점차 어두워졌다. 조금씩 앞으로 가자 눈이 점차 어둠에 적응했다. 그렇게 10미터쯤 걸어가니 다시 빛이 나타났는데, 야광처럼 발광하는 물질이 사방에 박혀 있었다.
'야광석… 같은 건가?'
전기를 사용하는 게 일상인 곳에서 평생 살아온 나에게 어둠은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걸 투정할 여유는 없었고, 이 정도 빛이라도 감지덕지할 판이다.
나는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며 다시 걸었다.
'생각하자, 생각.'
부패의 주인이라고 했다.
부패라는 건 일반적으로 생물이 썩는 현상을 말한다.
'보스가 갑자기 튀어나올 린 없겠지? 그러면 난이도가 너무 높잖아. 졸개가 먼저 나올 거야.'
세상만사 모든 일에 끝판왕부터 등장하면 누가 성공할 수 있을까? 뭐든 단계가 있는 법이다. 특히 이 재능마켓도 지금껏 겪어 온 바로는 내가 성장하길 기다리며 퀘스트를 냈다.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팔 굽혀 펴기 1억 개'처럼 말도 안 되는 미션이 나왔을 거다.
'재능마켓이 나를 성장시키려 하는 시스템이라면 싸움에 적응할 수 있는 무언가가 깔려 있을 거야.'
그렇게 믿어야 한다.
아니라면 오늘 개죽음을 당할 게 분명했다.
'뭐가 나오든 당황하지 말자. 그게 가장 중요해.'
서둘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으니 나는 아주 느릿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시간제한이 없다는 게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하도 조심스레 걷다 보니 거리로는 고작 500미터쯤 전진한 것 같다.
그런데 이때,
"…?"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몇 가지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싸구려 장화를 장비하시겠습니까?】
【싸구려 우의를 장비하시겠습니까?】
'설마, 나 입으라고 가져다 놓은 건가?'
별수 없단 생각에 장화를 집어 발부터 넣어 보았다. 오피스텔에서 바로 끌려온 터라 신발도 못 신은 채 여기까지 왔다.
【싸구려 장화를 장비했습니다.】
【싸구려 우의를 장비했습니다.】
'헐, 딱 맞네.'
정말 맞추기라도 한 듯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무장화는 내 발에 딱 맞았다. 그리고 얇은 '우의'는 추위조차 막아 내지 못할 만큼 조잡한 것이었지만, 내 몸에 맞아떨어졌다.
'이건 뭐, 거지도 아니고.'
너무 허술해 벗어 던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하지만 맨몸뚱이에 검 하나보단 낫지 않을까 싶어 참기로 했다.
【본필드에 입장합니다.】
【이제부턴 직접적인 대미지를 입을 수 있습니다.】
【쉬면 피로를 회복할 수 있지만 공복도는 증가합니다.】
좀 더 나아가자 저 앞에 밝은 빛이 보였다. 그렇다고 햇빛까진 아니었지만, 내가 있던 동굴 같은 곳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대미지라…. 다칠 수 있다는 뜻이겠지?'
꿀꺽, 침을 삼키고 앞으로 좀 더 나아갔다.
내 몸이 완전한 빛에 노출되었을 때,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조금씩 뜨며 빛에 적응했다.
그리고,
"와아…."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있나?
"말도 안 돼…."
설원이었다.
휘이이이이이이이잉!
눈앞은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고, 아까까진 전혀 느낄 수 없던 추위가 온몸을 휘감았다. 내 앞엔 평생 보지 못한 절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게… 정말… 말이 된다고?"
이렇게 갑자기 풍경이 변할 수 있나? 분명 조금 전까지 나는 강남 한복판의 오피스텔에 있지 않았나?
꼴깍, 또 침이 넘어갔다.
온통 눈밭이었지만 자세히 둘러보니 듬성듬성 얼음덩어리들이 보였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끝인진 구분할 수 없었지만, 저것만큼은 특별해 보였다.
나는 멈춰 섰다.
그리고 전진하지 않은 채 내가 왔던 길로 물러섰다.
그러자,
"아아…."
한기가 싹 사라졌다.
'이 동굴이 경계구나.'
몬스터가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을지 없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추위를 막아 준다는 것은 확실하다.
'여길 베이스캠프로 써야 할까? 내가 저기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을 테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혹한기에서 버틸 수 있는 도구나 하다못해 패딩이라도 가져왔을 건데, 지독하게도 불친절한 재능마켓 때문에 부패의 주인이고 뭐고 추위부터 이겨 내야 할 상황이 되었다. 내가 착용한 장화나 우의를 보고 있자니 초라해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우선 그래도 주변을 살펴야겠지?'
시렸던 코가 녹기도 전에 나는 다시 설원으로 나갔다. 다행히 눈발이 강하진 않았고, 바람도 거셌다가 잠잠해지는 걸 반복하는 걸 보며 온도를 가늠했다.
'뭐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뭔가가 나오려면 세 가지 가능성이 크겠지.'
땅속에서 나오거나,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그리고 남은 한 가지는….
'저게 수상해. 그냥 있을 리 없잖아.'
고드름을 거꾸로 세워 둔 것 같은 얼음덩어리들이 사방에 불쑥불쑥 솟아 있다. 사실 눈 말곤 보이는 게 저것뿐이라서 다른 의심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근처에만 다섯 개인가.'
눈발 때문인지 먼 거리의 얼음덩어리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장 가까운 것에 접근했다. 발이 발목까지 푹푹 빠질 만큼 눈이 쌓이진 않았지만, 장화 속 발가락은 이미 꽁꽁 얼어서 감각조차 없었다.
'길어야 10분, 그 이상이면 돌아가서 몸을 녹여야 돼.'
죽음이란 단어가 확 와닿았다.
아무도 모르는 이런 곳에서 얼어 죽는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가?
나는 발길이 더 빨라졌다.
검을 잡은 두 손을 당겨 입김으로 후욱! 불어 넣은 나는 자세를 잡고 얼음덩어리 앞으로 갔다.
그리고 보았다.
"이런 젠장…."
순간적으로 재능마켓에 '화염 방사기'가 있었던가? 라는 생각이 스칠 정도로 황당한 장면을 목격했다.
두꺼운 얼음 안엔 '사람'이 갇혀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는데, 사실 사람이라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괴물'에 더 가깝달까? 얼음이 워낙 두꺼워서 그가 지르는 고함 따윈 들리지도 않았지만, 그 표정만 봐도 나를 물어뜯고 싶어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얼어붙은 좀비가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얼어붙은 좀비의 영역에 들어섰습니다. 이제 1분 후, 좀비가 풀려납니다.】
"…!"
느닷없는 메시지에 소름이 쫘악 돋을 때,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쩌저저저저저적!
그렇게 단단해 보이던 얼음이 뿌적 갈라진 거다.
…끄어어어어억… 끄어억….
그 틈으로 얼어붙은 좀비의 괴성이 튀어나왔다. 아깐 눈알이나 입만 조금 움직였다면 이젠 몸 전체가 바들바들 떨리는 게 보였다.
1분!
1분 후면 저놈이 밖으로 튀어나와 사정없이 나를 찢어 버릴 거란 직감이 들었다.
"아, 안 돼!"
경각심이 눈알까지 치솟아서 안구 안쪽이 뻐근해지는 기분이 들 때, 나는 검을 곧추세우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곤 사정없이 앞으로 향해 휘둘렀다.
이건 본능이었다. 저게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고, 내가 생물을 죽여 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지금은 싸워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이든 벨 수 있다던 검'은 나를 곧장 배신했다.
까앙-!
"크흑…!"
처음 알았다.
뭔가를 칼로 벤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검을 잡은 두 손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고, 손목까지 저렸다. 있는 힘껏 휘둘렀는데, 검의 날이 정확히 얼음에 닿지 않고 옆으로 쳐서 그 반탄력이 고스란히 내게 온 거다.
카아! 까아아악…!
내가 자길 죽이려 한다는 걸 깨달았는지 얼어붙은 좀비는 더욱 발광했다. 부스스 떨어지는 얼음 조각들이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걸 알려 준다.
'다시 해 보자.'
찰나였지만, 뭐든 벨 수 있다는 조건도 날이 정확하게 파고들어서 그 방향성이 일정한 흐름을 유지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든 부술 수 있는 망치가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지금은 따질 때가 아니었다.
깡! 까앙!
두 번째, 세 번째 시도도 얼음을 완전히 가르지 못했다. 이건 지금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한다는 뜻일 거다. 아마 도끼질을 처음 해 본 사람이라면 내 시행착오를 정확히 공감할 수 있을 거다. 생각대로 검이 나아가지 않는다는 거다.
'진정해. 아직 시간 있어. 서둘러서 될 게 아니야.'
나는 검을 다시 잡았다.
"하아아아…."
휘이이이이이이이잉!
내쉰 숨이 금세 눈보라에 사라졌지만, 조급함을 버리려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앞에선 당장에라도 얼음을 부수고 좀비가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내가 검을 잘 휘두를 수 없다면 몇 번 더 공격해도 무의미할 것이다.
'힘이 일정해야 돼.'
그나마 몇 번의 실패가 공부가 됐다.
조급해 봐야 달라질 건 없다. 또한 예전이었다면 될 때까지 계속 삽질을 반복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와 지력+1을 얻은 나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문제가 있다면 고민하고 생각해서 더 나은 방향을 찾는다!
'휘두를 때, 검 끝을 확실히 보는 것도 중요하고.'
검술은커녕 목검을 들고 하는 검도조차 배워 본 적 없는 나였지만, 좀비를 앞에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치열해질 거다.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진짜 '죽인다.'라고 마음을 먹으니 마음속에서 전에 고블린을 죽일 때의 그 찝찝함이 되살아났지만, 애써 잊으려 했다. 내가 살고 봐야 했다. 이건 길거리에서 길고양이를 죽이거나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으드드드드드득!
이제 거의 얼음이 다 부서졌다.
나는 한 발 물러서서 다시 검을 있는 힘껏 휘둘러보았다. 스윽 바람을 가르는 검은 확실히 아까보다 흔들림이 줄었다.
몇 번 더 시도해 본다.
서억, 서어억.
"헉, 헉…."
가쁜 숨이 넘어왔다.
묵직한 검을 연거푸 휘두르는 것도 꽤 체력 소모가 심하기 때문이다. 앞서 몇 가지 운동을 1만 번씩 반복하고 신문 배달을 하며 뛰었던 체력이 없었다면, 이조차도 어려웠을 것이다.
'나아졌어!'
그나마 처음보다는 나아짐이 느껴졌다. 지난 시간 동안 미션을 완수해 오며 올라온 내 자존감이 이렇게 힘차게 내 등을 밀어준다.
'할 수 있어.'
나는 눈에 독기를 품었다.
사박.
눈을 밟고 앞으로 나섰다.
이제 검의 사정거리에 좀비를 둔다.
카아아악! 카아악!
놈의 상체가 움직였다.
그리곤 갈고리처럼 뻗은 손 갈퀴가 내 목덜미를 움켜쥐려고 버둥댔다. 그게 당장에라도 내 멱을 딸 것 같았고, 놈이 팔을 휘저을 때마다 바람 소리가 오싹하게 들렸지만 뛰는 심장을 무시하고 검을 꽉 잡았다.
'셋.'
번지 점프대 앞에서 숫자를 세는 기분으로 좀비를 보며 카운트했다.
'둘.'
오른쪽에서 왼쪽 대각선으로 정확하게 그어야 한다.
'하나.'
만약 이 일격이 빗나간다면 옆으로 이동해서 재차 공격을 할 생각이다.
"지금! 으아압!"
내 평생, 가장 집중한 상태로 팔을 휘두르자 검은 높이 치솟았다가 무섭게 떨어졌다.
스윽!
그어진 검이 드디어 땅으로 처박힐 때, 나는 '까앙!' 소리 대신 말끔하게 물체를 가르는 검날과 그게 되었을 때 얼마나 큰 만족감을 얻는지 느꼈다.
"아아아…."
꼭 말캉한 두부를 자른 것 같았다. 저 단단한 얼음 조각이 아직도 남아 있었고, 좀비의 몸 자체도 딱딱하게 얼어 있었으니 연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 검은 모든 물리법칙을 무시하기라도 한 것처럼 좀비를 동강 냈고, 이어 메시지가 터졌다.
【축하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