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마켓-15화 (15/277)

#015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호호! 무슨 애가 이렇게 넉살이 좋아? 내일 꼭 다시 만나자!

-그럼요!

고깃집을 나와 재능마켓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사장님은 내가 며칠이나 버티나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신문 배달 때도 마찬가지였지 않나? 백번 말하는 것보단 행동과 실력으로 보여 주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후우…."

오피스텔 앞.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들어 높게 솟은 빌딩을 바라보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건물은 얼마나 하나?'

이 주변엔 수많은 빌딩이 있고, 서울 전체로 보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숫자의 건물이 있을 거다. 대체 이런 건 누가 갖고 있나? 한국에 부자가 많다더니 정말 많은가?

'100억? 200억?'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입이 떡 벌어질 금액일 것은 분명했다.

'그래도 언젠간….'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일지 모르겠지만 꿈은 크게 가지라고 하지 않았나?

'누군가 했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재능마켓을 얻은 후론 자신감이 무럭무럭 차올랐다. 높아진 자존감은 활력을 불어넣었고, 나는 박탈감을 느낄 시간에 더 땀을 흘렸다.

"…."

로비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여긴 항상 오가는 사람이 많다. 각자의 이유로 빌딩을 찾은 이들도 있지만, 이 오피스텔에서 거주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음?'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는데, 옆에 서 있던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스윽.

고개를 숙이는 여자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나도 얼결에 눈인사를 했다.

'여기 사나?'

이 오피스텔은 전 세대가 원룸으로 이뤄져 있다. 그렇다는 건 온 가족이 함께 살지 않을 거란 의미다.

'아…. 공부하러 온 건가?'

학교에서 들었다. 공부에 올인한 애들이나, 지방에서 올라온 성적 좋은 애들이 강남에서 학교와 학원에 다닌다는 얘기. 딴 세상 일인 줄 알았는데 얘를 보니 실감이 났다.

'다들 이렇게나 치열하게 사는 거야.'

쪽지 시험까지 더 나를 불태워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재능마켓으로 걸어갔다. 두꺼운 철문을 앞에 두고 손을 뻗었다.

끼이이익.

잠기지 않은 문.

여전히 안엔 아무도 없다.

"…."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벗었다.

이곳은 참 이상하다.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항상 서늘한 기운이 맺혀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언제나처럼 벽이 움직이면서 진열된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호기심이 일었지만 이젠 저것들이 그림의 떡이란 걸 알기에 나는 고개를 돌린 채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최대한 편한 자세로 책을 허벅지에 올렸다.

'수능만 잘 보면 되는 세상이 아니니까. 지금부터 내신도 관리해야 해.'

아직 어떤 대학을 가야 할지 정하진 않았지만, 이왕 하는 거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

'국어, 영어, 수학만 보는 거니까, 해 볼 만해.'

더 과목이 많았다면 어려웠을지도 모르겠지만 남은 며칠, 세 과목이라면 승부수를 띄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루에 하나씩 마스터할 때까지 안 나간다.'

그렇게 독하게 마음을 먹고 책을 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재능마켓 누적 체류 시간을 초과했습니다.】

"…뭐라고?"

갑자기 들려온 메시지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체류 시간을 갱신하기 위한 시험이 시작됩니다.】

"…시험?!"

【준비 시간 1시간이 주어집니다. 시험을 통과하기 전까지 재능마켓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면서도 묘하게 수긍해 버렸다. 이런 사기적인 공간이 무한대로 내게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심지어 공짜였지 않은가?

'어떤 시험을 본다는 거지?'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준비 시간까지 준다는 건 그리 녹록지 않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하필이면 지금…. 젠장….'

차분하게 공부 좀 하려고 했는데, 이런 상황이라니. 오랜만에 미친 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쪽지 시험 보고 나서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피할 수 있는 게 아니겠지?'

후우, 숨을 길게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설마….'

또 고블린 같은 게 나오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아닐 거야. 아니겠지….'

저번엔 어영부영 고블린을 이길 수 있었지만, 무언갈 죽이는 기분이 찝찝한 건 떨쳐 낼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악몽처럼 그 순간이 꿈에도 나왔었다.

'차라리 스쿼트나 팔 굽혀 펴기를 하라고 해!'

하지만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적중한다.

【시험 시작 30분 전.】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무기를 선택하세요. 무기는 하나만 고를 수 있으며 시험이 종료되면 소멸됩니다.】

"으음…."

【고를 수 있는 무기의 제한은 없으며, 귀하에게 귀속되어 타인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환장하겠네…."

나는 메시지를 들으며 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탐나던 물건들이었지만, 막상 하나를 고르라고 하니 숨이 턱 막혔다. 이걸 써야 할 만큼 시험이 어렵다는 뜻이 아닌가?

"어떤 시험을 보는지 힌트라도 줘야 무기를 고르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야?"

들으란 듯 큰 목소리로 말했지만, 돌아오는 메시지는 없었다.

"…."

꿀꺽, 침을 넘기며 물건을 눈으로 훑었다.

그 가격만 해도 몇만 포인트는 훌쩍 넘기는 값비싼 것들이 즐비했다. 저거 하나를 가지려면 몇 년을 고생해야 할 거다.

'방어력을 위주로 봐야 할까? 공격력을 보완해야 하나? 아니면 생존에 도움 되는 걸로?'

「30분간 투명 인간이 되는 망토」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잖아!'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돌아섰다.

"내 물건들도 사용할 수 있는 거지?"

【가능합니다.】

메시지에 냉장고로 달려갔다.

벌컥, 문이 열리자 생수가 가득 보였다. 마음 같아선 전부 다 쓸어 담고 싶었지만 그만한 포인트가 없다.

'이게 생명줄이 되어 줄 거야.'

만두와 생수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된다는 건 지난 시간에 충분히 느꼈다. 게임으로 치면 이 생수는 피 회복을 돕는 포션이나 마찬가지다. 전장에서 물약은 필수 아니던가?

【무기 선택까지 15분 남았습니다. 선택하지 않으면 베네핏은 소멸합니다.】

"잠깐만!"

다급한 마음에 소리쳤다.

"후우…."

내가 가진 것을 점검해 보자.

우선, 생수가 더 필요하겠지?

【회복 효과가 있는 생수×5를 구매하셨습니다. 50p 차감됩니다. 환불 불가.】

생수 5병이면 스쿼트 5천 개는 할 수 있는 양이다. 아껴 마셨을 때의 기준이겠지만, 그만큼 회복을 올려준다는 거다.

【누적 포인트 1,190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생수를 사고 남은 1,190포인트. 이제까지 얼마나 고생해서 모은 것이던가. 그런 만큼 허투루 쓸 순 없었지만, 문득 묘한 불안감이 들어 외쳤다.

"잠깐, 시험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사망합니다.】

"뭐! 주, 죽는다고-?"

간단하게 보고 넘어가는 쪽지 시험 따위가 아니다.

"미친…! 그런 정보는 진작 알려 줘야 할 거 아니야!"

죽음.

쉽게 떠올릴 법한 단어가 아니다. 그게 현실로 불쑥 닥치면 당연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무기 선택까지 7분 남았습니다. 선택하지 않으면 베네핏은 소멸합니다.】

'큰일이다. 이거 진짜 큰일이야.'

조급해지는 마음을 가까스로 붙잡으면서 나는 진열장을 빠르게 바라보았다. 이미 수백, 수천 번도 더 본 물건들이지만, 목숨이 달렸다고 하니 선택이 쉽지 않다.

'포인트를 아낄 이유가 없어.'

나는 급히 가방을 챙겼다.

안의 내용물을 다 쏟아 버리고 생수를 더 샀다.

【회복 효과가 있는 생수×9를 구매하셨습니다. 90p 차감됩니다. 환불 불가.】

이제 남은 건 1,100포인트.

10포인트 단위의 물건은 진열장에 없었기에 냉장고의 생수로 꽉 채운 거다.

'이렇게 갑자기 포인트를 다 쓰게 될 줄이야.'

허탈감도 들었지만, 지금은 살고 봐야 했다. 나는 가방을 단단히 메고 진열장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반응은 즉시 나왔다.

【'수호 부적'을 구매하시겠습니까?】

"그래!"

【'수호 부적을 구매했습니다. 1,100포인트가 차감됩니다. 잔여 포인트 0.】

내가 보유한 포인트로 살 수 있는 아이템은 애초에 별로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쓸 만해 보이는 게 바로 이 수호 부적이다.

【수호 부적

생명이 위급한 순간 자동 발동된다.

물리적, 정신적, 마법적 효과 가드.

1회 사용 후 자동 소멸.

구입 시 귀속. 타인 양도 불가.】

파팟-!

빛무리가 내 앞에 생겨나며 작은 부적 형태로 변했다. 그걸 손에 덥석 쥐고 얼굴을 진열장으로 돌렸다.

'생수도 있고, 부적도 있으니까 공격 수단이 필요해.'

마음이 더 급해졌다.

튜토리얼이랍시고 무시무시한 고블린을 소환했던 재능마켓이다. 어떤 게 튀어나올지 모르니 대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이왕이면 가장 비싼 아이템으로….'

나는 한 곳을 바라보았다.

"저거로 할게."

【'무엇이든 벨 수 있는 용사의 검'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래."

【무기가 선택되었습니다. 3분 후 시험이 시작됩니다.】

나는 빛무리 속에서 손잡이를 낚아챘다.

묵직하다. 체력이 +1 오르지 않았다면 한 손으로 잡고 휘두르긴 어려웠을 것이다. 정말 무엇이든 벨 수 있는진 모르겠지만, 가격이 무려 196,000포인트나 하는 물건이었고, 고블린을 상대했던 소총보다도 비쌌다.

비싼 건 비싼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무엇이든 벨 수 있는 용사의 검

날이 상하지 않는다.

동급 효과를 가진 아이템을 제외하면 물리적 제약을 받지 않는다.

무한대로 사용할 수 있다.

착용자에게 귀속된다.

타인이 소유할 수 있지만, 고유 효과는 발동하지 않는다.】

"좋아… 후우…."

【1분 후 시험이 시작됩니다.】

두 손으로 쥔 검의 끝이 내 마음을 대변하듯 가늘게 떨렸다.

'전엔 처음이라 당황했지만, 이젠 고블린 정도면 해볼 만해.'

【10초 후 시험이 시작됩니다.】

나는 어깨를 펴고 소리를 쳤다.

"하압-! 와라!"

기합이 쩌렁쩌렁하게 오피스텔을 떠돌았다.

【시험을 시작합니다.】

'이번에도 화장실에서 나오려나?'

마른침을 삼키며 그쪽을 주시하는데, 예상할 수 없는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시험장으로 이동합니다. 2층으로 올라가세요.】

"어엇…? 2층이라고?"

오피스텔은 복층으로 이뤄져 있었다. 하지만 전엔 계단을 딛고 올랐을 때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밀려나지 않았나?

"…."

하지만 생각은 무의미하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지만,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자 몇 걸음 만에 계단에 도착했다. 위를 올려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 끝에 안개처럼 뿌연 무언가가 맺혀 있었다.

【시험장으로 이동하세요.】

'전엔 튜토리얼이었다는 건가?'

맛보기였다는 뜻이다.

이젠 진짜 전장으로 가야 한다.

【고의로 시간을 끌 경우 베네핏이 소멸됩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나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해도 고작 열 개의 계단밖에 없다.

순식간에 올라선 2층은 뿌연 안개 때문에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말을 하는 순간,

"흐읍…!"

몸이 앞으로 쑤욱 빨려들었다.

【시험장에 입장했습니다. 시험을 통과하면 보상으로 재능마켓 체류 시간 1,000시간을 획득합니다.】

하얗기만 하던 시야가 차츰 회복되며 메시지가 귓가를 울렸다.

【목표: 지정 타깃 제거. 사망 시 실패. 시간제한 없음.】

【지정 타깃: 부패腐敗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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