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째깍, 째깍.
시곗바늘 소리라도 들리면 조금 나으련만 고요한 오피스텔에서 홀로 두꺼운 사전을 보고 있자니 대체 내가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후우…. 이제 얼마 안 남았네."
지능이 올라간 덕분일까?
무작정 무식하게 사전을 외우는 형태로 공부에 접근하지 않았다. 일단 한숨 자고 나서 정신력을 회복한 후에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러고 나니까 '퍼뜩!' 떠오르는 기막힌 생각이 나 버렸다.
'잠은 앞으로도 계속 여기서 자면 되니까.'
나도 사람인지라 최소한의 시간은 수면에 투자해야 한다. 하루 24시간을 아무리 쪼개도 그것만큼은 건드릴 수 없었는데, 이 재능마켓에선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걸 잘 활용하면 수면 시간마저 돈을 벌거나 공부를 하거나 다른 곳에 투자할 수 있다. 심지어 이 안에선 12시간 동안 푹 자도 밖에선 시간이 멈춰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걸 지금 깨닫다니!'
그냥 흘려보낸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아니야. 지금이라도 알아낸 게 어디냐.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눈으론 사전을 훑으며 머릿속으론 새로운 루틴을 짰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여기로 와서 푹 자고….'
일어나면 공부한다.
그러다가 지치면 또 자고, 일어나서 나가면 내 시간은 무한대까지 가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걸 너무 반복하면 미쳐 버릴 수도 있으니, 조금씩 늘려 가는 방향으로 공부에 투자하면 효율적일 거다. 새벽엔 신문 배달로 돈을 벌면 되고.
'잠과 공부를 여기서 처리하면, 저녁 알바를 하나 더 할 수도 있겠는데?'
이건 상당히 좋은 징조였다.
학업 때문에 시간을 많이 낼 수 없었는데, 그걸 획기적으로 개선한다는 건 더 많은 기회비용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후우….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이 사전 한 권은 마스터할 작정으로 들어왔지만,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또한 혼자 여기서 처박혀 있는다는 게 생각보다 고독하고 외로워서 적응하려면 세월이 더 흘러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훑자."
그러다가 퍼뜩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근처 도서관을 이용해야겠네. 이렇게라면 책값이 어마무시하겠어."
오늘은 뭣도 모르고 책을 샀지만, 내일부터는 발품을 팔아야겠다.
"으아! 끝났다!"
나는 사전을 집어 던지며 벌떡 일어났다. 만약 내가 이전에도 스쿼트 같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처박혔던 경험이 없었다면 이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고문이었을 것이다.
'예원이도 그렇게 노력하는데, 이런 기회를 얻고서도 나태하면 그건 죄악이지.'
내일 다시 올 생각에 숨이 턱 막혔지만, 애써 파이팅 하면서 짐을 챙겼다.
【재능마켓에서 나가시겠습니까?】
"그래, 내일 또 올게."
나는 웃으며 오피스텔 문을 닫았다.
그러자 멈췄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에게 찰나가 지났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잠깐 사이에 사전 한 권을 통째로 머리에 넣은 거다.
'이러다가 머리가 터져 버리는 건 아닌지 몰라.'
재능마켓의 물건들도 어마어마한 것들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큰 아이템은 저 공간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내일부터는 먹을 것도 사 오자.'
시간이 멈추니 오피스텔에선 음식물도 부패하지 않는 걸까? 의문도 들지만, 그건 차차 실험해 보면 될 일.
"으, 배고파."
건물을 나와 대로변 포장마차로 걸어갔다. 떡볶이와 튀김 같은 것들을 보자마자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급히 주문한 새빨간 떡볶이를 기다리며 어묵 꼬치 하나를 입에 쏘옥 넣었다.
'와… 이렇게 맛있어도 되나?'
너무 감동적이라 말이 안 나올 정도다. 허기진 것도 잊은 채 공부에 매진했던 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허기가 가시자 머리가 다시 돌아갔다.
'어차피 여길 매일 와야 한다면 이 근처에서 저녁 알바를 해야겠어.'
체력은 오피스텔에서 숙면을 하면 되니까 시급이 높은 일자릴 구하는 게 좋겠다. 게다가 여긴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거대한 상권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가?
'당장 내일부터라면 500만 원을 모으는 기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겠어. 그게 끝나도 멈출 이유는 없겠지. 돈은 계속 모아 두면 좋은 거니까.'
그러려면 장기간 할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해서 숙련되는 게 좋을 것 같다.
'앞으로 졸업까지 3년. 신문 배달과 저녁 알바를 계속하면 꽤 많은 돈을 확보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문득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대학은 내 힘으로 갈 수 있을지도….'
엄마가 들으면 다 컸다고 대견해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일단 허락을 받아야 한다. 지금은 새벽 운동 간다고 몰래 빠져나오고 있지만, 저녁 알바까지 하려면 계속 엄마를 속이는 건 불가능할 거니까.
그렇게 나는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새벽부터 신문을 돌렸다. 오피스텔에서 늘어지게 잔 덕분인지 체력이 남아돌았다. 이렇게 순조롭게만 진행된다면 조만간 800부를 넘어 1,000부를 돌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민준아, 안녕?"
월요일 오전.
학교로 걸어가는데 생소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누구…?'
고갤 돌렸는데, 낯익다.
'아, 우리 반의… 지민이라고 했었나?'
대화해 본 적은 없었지만, 기억엔 있는 아이였다.
"이 근처에 사니?"
"어."
"너, 요즘 공부 열심히 하더라. 잘돼?"
"그냥 하는 거지, 뭐."
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기초가 한참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토요일, 영어 사전 독파를 시작으로 어제는 중학교 3학년 수학 교과서를 미치기 직전까지 풀었는데, 오늘은 그걸 마저 할 생각이었다. 홀짝홀짝 아껴 마신 집중력 드링크가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시간이 무한하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 따라가려면 더 노력해야 해. '
최대한 시간을 활용한다 해도 역부족인 것들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없었다면 더 힘들었겠지.
내가 재능마켓을 떠올리는데 옆에서 지민이가 말했다.
"무슨 생각 해?"
"아니야, 아무것도."
"혹시 내가 말 걸어서 불편해?"
"같은 반 친군데 불편할 게 뭐 있어?"
"그러면 다행이고."
지민이가 환하게 웃으며 나와 눈을 맞췄다. 그러고 보니 꽤 예쁘게 생긴 아이다. 예원이라는 강력한 아이돌이 있어서 반에선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인기가 많을 타입이었다.
저 앞에 교문이 보였다.
"토요일에 방송 봤니?"
다소 조급하게 느껴지는 지민이의 목소리에 나는 어깨만 으쓱했다. 방송이 아니라 방청석에서 직관했지만 그걸 시시콜콜 말할 필욘 없겠지?
"어."
"예원이 잘하더라."
그렇지 않아도 학교로 들어가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하는 얘기가 온통 그 방송이었다. 그렇게 멋진 무대를 보여 버렸으니 명실상부 우리 학교 최고의 스타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일 거다.
"…."
"…."
대화가 끊겼다.
지민이와 나는 딱히 공통 관심사가 없었으니, 같이 발맞추고 걸어도 딱히 건넬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만 우리 주위를 맴돌았고, 나는 교실에 들어서서야 작게 한숨을 돌렸다.
'재능마켓에 가서 대인 관계 연습도 같이해야 하나?'
사회생활을 하려면 붙임성이나 쾌활한 성향이 좋다는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각박하게 살아온 나에겐 쉬운 일은 아니었다. 원래 어둡던 내가 한순간에 밝아질 순 없는 것이었다.
'뭐든…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우자.'
생각으로만 끝나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나는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마음을 다졌다.
'아직 내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마음먹고, 행동하고, 그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습관을 만들어 버리면 언젠간 내 것이 될 것이다.
-선생님 오신다!
교과서를 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담임선생님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슬슬 시작할 때가 됐지?"
"…?"
"…!"
아이들이 그게 무슨 뜻이냐며 눈을 동그랗게 뜰 때 담임 선생님이 씨익 웃었다.
"이번 주 금요일, 쪽지 시험을 볼 거다. 중간고사도 코앞이고, 너희는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자신의 기량이 얼마나 되는지 기준을 잡아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니까."
'시험'이라는 단어에 아이들이 경기를 일으켰다.
-우우우우우!
-역시 오고야 말았어!
-선생님! 한 주만 더 주세요! 아직 초반이잖아요!
-히익! 벌써 시험이라니! 아, 망했다!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쪽지 시험이라 내신엔 반영되지 않지만, 중간고사의 예행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제대로 할 생각이니까 금요일은 통째로 시험 본다고 생각하고 준비 잘해 와. 다른 선생님들과도 얘기 끝났으니까 남은 기간 동안 후회 없이 공부하도록 하고."
-우우우우우!
-이렇게 갑자기 그러시면 흐윽…!
-말도 안 돼요!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다르다.
일단 교과목의 난이도도 그렇지만 1학년 때부터 내신을 잘 쌓아 두지 않으면 수능만으로 좋은 대학을 가는 시절은 끝났다.
-과목은요? 어떤 시험을 보는 거예요?
한 아이의 질문에 담임 선생님이 나가다 말고 서서 대답했다.
"국영수. 간단하지? 반장."
"넵!"
"예원이한테도 전달 잘하고."
"알겠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나가자 아이들이 울상이 되었다.
-어떡하냐, 아직 진도도 다 이해 못 했는데.
-나도! 나도!
-오늘부터 밤새워야겠네.
쪽지 시험이라지만, 시험은 시험이다.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지만, 이것도 성적은 나온다.
'국영수라….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이들의 칭얼거림과 달리 나는 가슴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간 기초를 따라잡으려고 영어와 수학을 중점적으로 했는데, 마침 시험을 본다고 하니 내 실력을 가늠할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살짝 들뜬 기분도 든다.
'금요일까지… 앞으로 5일. 5일이면 상당히 많은 시간이야.'
남들 몇 년 할 거, 고작 며칠로 따라잡을 수 있단 생각은 안 한다. 하지만 재능마켓을 적절하게 이용하면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오늘부턴 죽을 각오다….'
그래, 시작이 반이다.
수업을 받으면서 시험 범위를 예상했다.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하는 얘기도 많은 도움이 됐다. 그렇게 학교에서 나와 다시 재능마켓이 있는 강남역으로 향하는 길에 할인 마트에 들렀다.
저렴한 빵, 육포, 칼로리가 높은 초코파이류를 샀다. 그것들을 차곡차곡 가방에 넣고 지하철로 뛰었다.
'이거면 최소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거야.'
부족하면 나와서 사면 되니까 가방 하나만 채울 정도면 될 것 같다.
하지만 그 전에.
'붙어야 할 텐데.'
나는 강남역 9번 출구로 나왔다.
내가 가야 하는 재능마켓은 5번 출구 근처였지만, 오늘은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여기도 사람 많네.'
강남역은 어느 출구로 나와도 사람이 득실거렸다. 하지만 분위기는 조금씩 달랐다.
'여긴 고깃집이 많구나.'
이면 도로 번화가 뒷길로 들어가니, 고깃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이 나왔다.
'아, 저기다.'
오늘 내 목적지가 보였다.
'강남 고기.'
참으로 직설적인 간판처럼 말 그대로 고기를 불판에 구워 먹는 곳이었다. 퇴근 시간 전이라서 그런지 고깃집은 한산했다.
"안녕하세요!"
카운터로 가서 인사했는데,
"전화드렸던 도민준이라고 합니다!"
"아, 학생이 그 학생이야?"
중년의 아주머니가 나를 눈으로 훑으며 웃었다.
"일 잘하게 생겼네! 키도 훤칠하고!"
"감사합니다!"
"경험은 없다고 했었지?"
"네! 하지만 알려 주시면 금방 적응할 수 있습니다!"
"호호호! 말은 잘하네. 얼마나 버틸진 모르겠지만! 따라와."
가게 앞쪽에는 외부 테이블들이 있었다. 뒤쪽으로 돌아가니 수도 시설이 있었고,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엔 사용한 불판이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이걸 닦으면 되나요?"
"맞아. 근데 대충 하면 다시 해야 할 거야."
이 근처 다른 알바는 최저 시급이었지만, 이 알바는 무려 시간당 15,000원이었다. 하루 10시간에 15만 원, 한 달이면 450만 원 아닌가? 물론 알바니까 그렇게까진 못하더라도 꽤 쏠쏠하단 거다.
"세월아 네월아 하다가 한 시간에 10개도 못 닦으면 시급에서 깔 거니까 명심하고."
한 시간에 10개가 마지노선이라는 얘기다.
'그러면 하나에 1,500원이라는 건가?'
쉬는 시간을 포함하지 않아도 6분에 하나를 닦아야 한다는 말인데, 기름때를 물에 불려 놓으니 가능한 것이리라.
나는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혹시 더 잘 닦으면요?"
"으응?"
"한 시간에 10개라고 하셔서요. 혹시 15개, 20개 하면 시급이 오르나요?"
"호호호호! 그게 말이 되는 소리니? 내가 여기서 13년이야. 여태껏 그렇게 불판 닦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