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화
"…아…!"
예원이가 나를 발견했는지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그쪽으로 걸어갔는데, 그사이 옆에서 다른 참가자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허설 완전 대박이었잖아! 그렇게만 해! 그러면 이번 라운드는 무조건 붙어!
-맞아! 딱 오전에 한 만큼만 하자! 우리 아들, 장해!
오전에 리허설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게 어떻게 진행되는지, 리허설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심정 같은 건 잘 몰랐지만,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이들의 얼굴이 상기된 걸 보면 꽤 긴장했던 것 같았다.
"와 줘서 고마워."
의자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는 예원이는 내가 이제껏 본 그 어떤 모습보다 예뻤다. 화장을 진하게 해서 그런가? 어른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다만 표정이 좋지 않아 그 아름다움이 퇴색시키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내 질문에 예원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리허설, 완전히 망쳐 버렸거든."
"어차피 그건 연습이잖아. 본게임에서 잘하면 되는 거고."
"그렇긴 한데, 선곡이 문제였나 봐. 이번에 뭔가 보여 줘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좀 무리했던 것 같아. 이제 와서 바꿀 수도 없고…."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해 본 일이 없었으니 예원이의 말을 공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예원이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는 느낄 수 있었다.
평소 예원이답지 않게 꼬옥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
나는 예원이를 보다가 주변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들 비슷비슷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어차피 가수라는 직업이 이런 중압감을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한다면 현재의 부담감을 이겨 내야 하는 것 아닐까?
"뭐가 문제였는데?"
"총체적으로 다."
피식 웃으며 대답을 하긴 하는데, 예원이는 자신감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전혀 근거 없는 선곡을 한 건 아닐 거 아냐."
"나름, 자신은 있었지. 근데 무대에선 어렵더라고. 컨디션이 아주 좋은 날에만 고음이 다 올라가는 곡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키를 좀 낮춰 봐야지, 고음부에서만이라도."
"그래도 돼?"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래…."
나는 웃으며 예원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잘 모르지만."
그리곤 말했다.
"어쨌든 후회는 남기지 마. 다시 없을 기회잖아."
조금이라도 힘이 되길 바라면서.
"으응…. 고마워. 너랑 얘기하니까 많이 좋아졌어. 나, 열심히 할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예원이의 입술 끝은 여전히 아래로 처져 있었다. 나는 그런 예원이를 가만히 보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나보다 필요한 건 너겠구나.'
아직 내가 먹어 보지도 않은 '아이템'이 손에 잡혔다.
'당장은 필요 없으니까.'
지금 이 순간.
나보단 녀석에게 꼭 필요할 것 같다.
나는 결심을 굳힌 채 녀석에게 불쑥 병을 내밀었다.
"응? 이게 뭐야?"
"우리 엄마가 주신 건데, 청심환 같은 건가 봐. 혹시 공연 직전에도 진정이 안 되면 마셔 봐."
"아… 그래? 고마워."
병을 힐끔 보곤 손으로 꼭 쥔 예원인 라벨도 없고 유통 기한도 적혀 있지 않은 수상한 갈색 병을 보면서도 얼마나 긴장했는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저거 하나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거니까….'
나는 예원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했다.
"잘해."
"응!"
나는 방청석으로 돌아와 앉았다.
'포인트는 다시 모으면 되는 거야.'
어차피 몇백 포인트 더 있다고 뭔가에 드라마틱하게 변화가 있는 게 아니었고, 보상으로 받은 거였으니까 쿨하게 잊기로 했다.
'그보다, 두 달 안에 미션 두 가지를 달성할 수 있을까?'
전엔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살아갔지만, 지금은 하루가 아까웠다. '심심하다'라는 단어 자체가 내 인생에서 지워져 버린 것 같다.
'하루를 48시간으로 늘릴 수 없다면 내가 두 배 빨리 움직이면 돼.'
재능마켓이 왜 내 앞에 나타났고, 그것이 나를 어떻게 바꿔 놓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드는 생각인데, 재능마켓은 나를 훈련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아기에게 걸음마부터 가르쳐 나중엔 뛰게 하고, 나아가 그 아이가 비행기까지 개발하게 하는 그런 과정 같은 것 말이다.
수학으로 치면 지금 나는 덧셈 정도 진행되어 있을까? 함수부터 방정식, 그 이상 가려면 한참이니 조급함은 억누르고 지금에 충실하면 언젠간 길의 끝에 닿지 않을까?
-자자! 곧 생방송 시작합니다! 통제에 잘 따라 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방청석 앞을 스태프들이 부랴부랴 뛰어다니며 방청석에 각종 주의사항을 말해 주었다.
'예원이가 잘해야 할 텐데.'
이런 무대를 지켜보는 건 처음이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올 일이 없는 공간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 흐뭇하게 웃으며 돌아가고 싶다.
뭐든 시작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힘내, 예원아.'
-생방송 10분 전입니다!
시장통처럼 북적이던 무대 근처가 준비를 끝냈는지 고요해졌다. 사회자로 보이는 사람이 무대 한가운데 서서 이런저런 체크를 했다.
10명이 노래해서 그중 절반은 떨어지는 가혹한 승부. 그러나 이게 세상이고 사회다.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지 않으면 내가 떨어지게 되는 게 섭리일 것이다.
그런데 이때였다.
【재능을 나누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재능이 선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선한 영향력?'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아! 하고 짚이는 게 있었다.
'예원이가 마셨구나!'
【내 것을 나누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 한 걸음 나아간 보상으로 500p가 지급됩니다. 추가로 집중력 드링크×2를 수령할 수 있습니다.】
"하…."
게임을 하다 보면 숨겨진 퀘스트가 있고, 알려지지 않은 미션이나 보상 같은 것들도 있어서 플레이어를 즐겁게 한다. 마치 그것처럼 내게도 같은 일이 생긴 것이다. 500p도 엄청난 보상이었지만, 드링크 한 병을 투자했더니 2병이 되어 돌아왔다.
【누적 포인트 1,240.】
어쩌다 보니 위기에 처한 아주머니를 구하고, 절망에 빠진 친구를 도왔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 두 가지 일만으로 나는 이제껏 내가 모았던 포인트를 뛰어넘는 포인트를 받아 버렸다.
'그냥 여기저기 뿌린다고 다 이렇게 뻥튀기돼서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내 진심이 통했으리라.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받은 미션들은 어떤 큰 흐름 안에서 흘러가는 것 같다. 게다가 '선한' 영향력이라는 단어에 이목이 끌렸다.
세상 모든 일엔 반대편이 있기 마련. 솔직히 조금이지만 나는 재능마켓이 악마의 장난이거나 나를 괴물로 만들어 버리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도 가슴 한쪽에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걸로 확실해진 것 같다.
-대망의 생방송 첫 번째 참가자는…!
예원이는 두 번째 무대였다.
'다행이야.'
사실 욕심 때문에 외면하고 있었지만, 이왕이면 그게 선한 쪽이라면 얼마나 다행인가.
'좀 더 박차를 가해 보자.'
아직 의문점들도 많았고, 내가 영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옳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걸 느낀 이상 망설일 필욘 없었다.
그때, 첫 번째 참가자가 최선을 다해 노래했다. 하지만 내 관심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확실히 치고 올라가야 해. 수능만 잘 보면 되는 시대가 아니니까. 내신까지 챙겨야지.'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했다.
'그러면 엄마도…좋아하시겠지?'
어느새 첫 번째 참가자의 곡이 끝났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K스타 오디션! 갈수록 열기를 더해 가고 있는데요! 대국민 문자 투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와아아아아아!
귀가 먹먹할 정도로 방청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 소리가 예원이에겐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재능마켓의 아이템의 효과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않나?
'어디… 한번 볼까?'
나도 못 먹어 본 드링크.
하지만 예원이를 보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으리라.
-다음 참가자는 혜성처럼 등장해서 '국민 여동생' 타이틀을 위협하고 있는 화제의 참가자입니다!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폭발적인 가창력과 짜릿한 고음으로 주목받는 진예원 참가자 무대로 나와 주세요!
-와아아아아!
등장과 동시에 노래가 흘러나왔다.
안개처럼 무대 바닥에 희뿌연 것들이 깔렸는데, 잔잔한 전주만 듣고도 사람들은 곡을 알아차렸다.
'이선희 씨 노래네.'
대한민국 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가수의 노래는 신예가 불렀을 때 극명한 장단점이 있다. 익숙한 노래라서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좋지만, 반대로 원곡자의 그늘이 너무 강해서 그걸 넘지 못하면 묻혀 버린다.
'잘해, 예원아.'
나는 차분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든 예원이를 바라보았다. 방청석은 어느새 고요해졌고, 예원이가 입술을 달싹거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모두의 시간은 멎어 버렸다.
.
.
.
-와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납니다! 진예원 참가자! 오늘,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는데요!
아직도 귓가에 함성이 울리는 것 같다.
드링크를 복용한 예원이는 정말 대단했다. 원래도 잘했지만, 집중력을 높이는 드링크까지 마셨으니 100%의 컨디션으로 노래했을 것이다.
'확실히 달랐어.'
나는 예원이가 노래할 때의 그 표정을 잊지 못했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었다. 방청석을 넘어서 TV를 지켜보던 모두가 그 3분 남짓한 시간을 예원이에게 강제로 빼앗겼을 것이다. 그야말로 '홀렸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노랠 예원이가 해낸 거다.
'예원이 실력도 있었겠지만….'
예원이는 이번 라운드에서 최고점을 받았다. 매 라운드가 토너먼트라서 언제 떨어질진 모르지만 그래도 압도적으로 이겼다는 게 중요한 거다. 예원이의 본실력도 크게 한몫했겠지만, 나는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나도 질 순 없겠지?'
내가 예원이의 무대를 보고 자극받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서점으로 향했다.
원래는 재능마켓에서 드링크만 수령해서 집에 갈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일찍 자야 내일 일찍 일어나서 신문을 배달할 수 있겠지만, 예원이가 마신 드링크. 그 효과를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다.
이대로는 궁금해서 잠도 오지 못할 것이다.
'우선, 이걸 봐 볼까?'
500만 원을 벌어야 해서 빠듯했지만, 지금 이 끓어오르는 열정을 위해서 몇만 원쯤은 투자해도 괜찮을 것이다.
나는 아주 두꺼운 책을 한 권 사서 서점을 나왔다.
'네가 모두를 미치게 했듯이.'
무대 위 예원이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나한테 미칠 거야.'
녀석에게 부끄럽지 않게 노력할 생각이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이 책이다.
"…."
건물로 들어서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계단을 뛰어올랐다. 벅찬 마음과 동시에 나는 뛰어야 하니까.
끼이이익.
511호 문이 열리고, 아무도 없는 재능마켓이 나를 반겼다.
【누적 포인트 1,240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알림이 울렸지만, 무시하고 나는 곧장 냉장고를 열었다.
오늘의 목표는 이게 아니다.
콰앙!
오피스텔 문이 닫혔다.
"후우."
나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곤 집중력 드링크 2병을 꺼냈다. 그리곤 벽 쪽으로 가서 기대어 앉았다.
'미루지 말자. 오늘부턴 무조건 하루 1권 마스터다.'
내 눈길이 머금은 곳.
서점에서 사 온 '영어 단어 사전'의 첫 장이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