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화
등굣길.
전엔 무기력하기만 했던 이 길이 요즘은 활기가 넘쳐 보였다. 사람 마음에 따라 보이는 게 달라진다더니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기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의미가 있어 보였다.
가령,
"야! 도민준! 같이 가! 무슨 걸음이 그렇게 빨라? 헉헉!"
"왔어?"
지금처럼. 내가 녀석의 어깨를 툭 쳤다.
이전과는 달리 이제 나는 언제 어느 때 어떤 사람을 만나도 여유가 있다. 나, 자신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무럭무럭 자라난 결과일 것이다.
박인성은 내 어깨를 잡고 헐떡거리더니 숨을 고르고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너, 그거 알아?"
"뭐?"
"강남석 패거리들이 네 뒷조사 하고 다녔다더라. 내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면 이미 싹 뒤졌다는 것 같던데?"
"뒷조사라…."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야, 근데 그거 진짜야? 너, 중학교 때 독사라고 불렸다면서?"
"독사는 무슨."
한 과거가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툭 튀어나왔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앞서 걸었다.
"야! 같이 가!"
그래, 나는 독사였다.
가정 형편이 좋지 못했던 나는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는 맹수들의 맛 좋은 먹잇감이었다. 놈들은 냄새만으로도 누굴 찍어야 할지 참도 잘 가려냈는데, 나는 독하게 놈들을 쳐냈었다.
물론, 그 과정이 결코 쉽진 않았었다. 지금 코어가 생겼고 체력+1의 도움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그게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박치와 싸워서 마냥 당하고 있진 않았을 거라는 거다.
"아무튼 너, 다시 봤다. 그렇게 근성 있는 놈이었으니까 다시 공부도 시작한 거겠지만. 잘돼 가?"
"그런대로."
빠른 애들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선행 학습을 한다. 그게 중학교 3년을 거쳐 고등학교까지 이어졌으니 내가 따라잡는 것에는 아무리 계산해도 물리적 시간이 부족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다.
【미션 완수까지 900.2km 남았습니다.】
그런 나약한 마음이라면 이런 미션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까.
근데 이젠 안다.
야금야금 줄여 가다 보면 언젠가 끝이 오리라는 걸.
"소문 들리면 또 알려 줄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당분간은 강남석 애들 보면 피해 다녀. 걔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고맙다."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다. 단지 내 시간이 아깝다. 1,000km도 뛰어야 하고, 500만 원도 벌어야 했으며 중간고사 준비도 해야 한다.
짬이 나면?
자야 한다. 그 10분의 단잠이 하루를 힘있게 바꾼다는 걸 깨달아 버렸다.
교실로 들어온 나는 어김없이 교과서를 펼쳤다. 불량한 놈들과 부딪히거나 하지 않는 한, 학교생활이란 건 지극히 단조롭기 마련. 그러나 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치열해질 수도 있었다.
'교과서 안에 이런 세상이 있다니.'
이전엔 공부를 그저 단순히 외우는 것으로만 대했었다. 뭐, 제대로 외운 것도 없지만.
하지만 이젠 깨달았다. 책 안엔 그간 인류가 깨우친 수많은 지식과 깨달음이 있고, 그것들을 하나씩 이해해 갈 때마다 희열도 맛볼 수 있다는 것을. 누가 들으면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그런 기분이었고, 역사, 사회, 지리, 특히 과학을 하나하나 깨쳐 갈 때마다 무한한 호기심이 들었다.
'세상에 그냥 존재하는 건 없어. 다 이유가 있으니까 도태되지 않고 계속해서 쓰이는 거야.'
내가 이런 고찰을 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그만큼 넓고 깊어져 가고 있단 생각에 뿌듯하다.
'남들 하는 만큼만 하면 딱 거기서 끝나는 거야. 큰돈을 벌려면 모두가 필요한 것을 만들거나,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돼.'
세상에 60억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개발할 수 있다면 부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반드시 그게 물건일 필요는 없겠지.'
누구나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 이 작은 물건 안에 무한한 시장이 잠재되어 있었다. 시각이 바뀌니 스마트폰도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하나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심지어 나는 부분적이지만 미래를 알고 있다. 이 또한 적절하게 써먹을 수 있다면 실패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조급해할 필욘 없어. 지금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하나씩 나아가면 되니까. 그래도….'
그러다 문득, 요즘 느끼는 아쉬움이 울컥 올라왔다.
'지력을 하나만 더 올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학교를 나오며 재능마켓에 대해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체력을 얻었고, 다음은 근력을 획득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선 미션이 선행되어야 했다. 뭐랄까, 보물은 앞에 뒀는데 상자를 열어 볼 수 없는 기분이랄까?
급할수록 돌아가란 말을 계속 되뇌고 있었지만, 지력+1이나 강해진 체력의 맛을 봐 버리고 나니 재능마켓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갈망이 더욱 커져만 갔다.
'근력 후에 뭐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지력이 뜨면 지력부터 얻자.'
싸움도 머리가 좋아야 하는 것. 세상만사 통찰력을 기르면 몸이 편하지 않겠나?
집으로 돌아와 공부하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1시 40분에 맞춰 둔 알람이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리곤 전력 질주다.
짧은 거리라도 뛰는 습관을 들였더니 전보다 폐활량이 늘어난 것 같다.
"안녕하세요!"
신문 보급소는 벌써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여어! 오늘도 부지런하구나!"
소장님이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처음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의심하셨지만, 이젠 나를 보시면 엄지를 치켜들며 대견해하셨다.
그렇게 나는 우리 학교의 그 어떤 학생보다 아침을 일찍 시작하며, 가장 늦게까지 죽을힘을 다해 뛰었고,
【미션 완수까지 889.203km 남았습니다.】
수요일이 되자, 드디어 900km대가 깨졌다.
【미션 완수까지 870.95km 남았습니다.】
배달 부수를 늘릴수록 남은 거리는 빠르게 줄어 갔다.
이윽고 토요일이 되었고,
【미션 완수까지 848.6km 남았습니다.】
'이 속도라면 두 달에 미션을 다 끝낼 수 있을 거야.'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짜 갔다.
다음 주부터는 주말에도 알바를 더 할 생각이다. 밀린 공부에도 이번 주말을 이용해 박차를 가할 예정이었는데, 새삼 엄마한테 미안해졌다.
'어머니….'
아버지 없이 나를 키우느라 그간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 난 혼자도 그리 벅찼는데.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내가 세상에 나가면….'
그때부터는 이제까지의 고생을 모조리 보상으로 돌려줄 테니까!
"훅훅훅! 후욱! 후욱!"
달리기 선수도 뛰면 숨이 가쁜 건 마찬가지다. 어쩔 수 없는 신체적 체력 소모를 피할 순 없었는데, 나 역시 200부쯤 돌리는 시점에선 숨이 가빠 왔다.
이럴 때는 속도를 늦춰 다음 평지를 위해 안배해야 했다. 그나마 산처럼 솟았던 신문의 상당수가 사라져 자전거 자체는 가벼워져 있었다.
'스쿼트가 도움이 많이 됐어.'
굵어진 허벅지는 자전거를 끌고 뛰는 고행을 받아 내 주었다. 팔 굽혀 펴기를 하면서 기른 팔 근육은 흔들림 없이 자전거를 지탱했는데, 이젠 자전거를 끌고 뛰어도 남들이 뛰는 만큼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이렇게 되기 위해 몇 번을 넘어지고 깨졌는지 모른다.
오전 4시 48분.
하나둘 보이던 취객들이 자취를 감췄다. 모두가 휴식하는 평온한 일요일 아침을 맞기 위해 어둠은 한껏 짙어졌다.
'오늘은 잘하면 6시간 안쪽으로 돌 수 있겠는데?'
거리에 사람이 없으니 속도는 한결 빨라졌다. 장애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엔 큰 차이가 있었다.
오늘 내 할당량은 800부!
마침내 나는 100부로 시작해서 800부까지 도달했고, 오늘은 주말이라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니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완수할 생각이었다.
"후욱-. 후욱-."
그렇게 번화가를 지나 주택가로 접어들었을 때가 5시 20분쯤 지나고 있을 때였다. 번화가 상가에서는 가게 문 앞에 신문을 두지만, 주택가는 대문 안쪽으로 신문을 던져 넣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게 보기엔 쉬워 보여도 잘못 던지면 허공에서 신문이 화르륵! 펼쳐지면서 끝까지 날아가지 못하고 볼품없이 떨어질 수도 있어서 방심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된 신문은 구김이 져서 못쓴다.
툭.
투욱.
신문이 문 안쪽으로 떨어지는 걸 확인하면서 그렇게 계속 골목을 나아갈 때였다.
"…?"
이젠 나름 익숙한 길.
가로등이 없어도 어느 골목에서 어디로 꺾어 돌아야 하는지 빠삭하다.
'뭐지? 사람인가?'
한데, 저쪽 전봇대 뒤쪽에 시커먼 것이 보였다.
"…?"
찰나지만 그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그 그림자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이 겹쳐 보여서 그랬던 거다.
나는 순간적으로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읏?!
저쪽에서도 나를 발견한 모양이다.
주변엔 불 켜진 곳이 한 곳도 없었다. 가로등만 을씨년스럽게 골목을 비추고 있었고, 인적이라곤 전무했는데,
"…."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다. 아니, 의식 없이 쓰러져 있었다. 중년의 아줌마였는데, 그녀의 몸을 다른 사람이 뒤지고 있었다. 아줌마의 오른쪽엔 널브러진 가방이 보였고, 남자는 모자를 푹 눌러쓴 상태였다.
그가 나를 빤히 보다가 콧등을 찌푸리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냅다 뛴다.
"젠장!"
나는 본능적으로 그를 따라 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스마트폰을 꺼내 112를 빠르게 눌렀다.
"아줌마가 쓰러져 있어요! 강도를 당하신 것 같아요! 제가 버들풀 공원 쪽으로 따라가고 있는데…!"
나는 경찰에게 설명하곤 계속 수상한 남자를 따라 달렸다.
"…씨×…! 넌 뭔데? 왜 따라와! 저리 꺼져!"
남자는 뒤를 돌아보더니 욕을 했다. 내가 조금씩 거리를 좁히는 걸 본 것이다.
【미션 완수까지 839.274km 남았습니다.】
이 긴박한 와중에도 미션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나는 긴장을 풀지 않고 팔을 뻗었다.
"…이, 이…!"
앞서 뛰던 남자가 짜증을 내며 더 속도를 냈다. 그러나 이제 이 골목에서 나보다 빨리 뛸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는 저 앞의 골목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도 다 알고 있었고, 심지어 자전거도 없이 맨몸으로 뛰고 있어서 깃털처럼 몸이 가벼웠다. 주렁주렁 발에 매단 모래주머니를 뗀 기분이랄까?
덥석.
나는 남자의 가방에 손을 뻗어 움켜쥐었다. 손잡이가 그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는데, 내가 잡아채자 그의 몸이 크게 갸우뚱했다.
반탄력이 느껴졌지만, 나는 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을 주며 당겼다.
두두두둑!
남자의 몸에서 가방이 떨어지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지퍼가 없는 형태라서 그랬는지 안의 내용물이 밖으로 우수수 쏟아졌는데, 남자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이 개새끼가!"
흥분한 사람은 무섭다.
분노한 사람은 더 무서운데, 범죄를 저지르다가 궁지에 몰린 사람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상처 입은 맹수!
이렇게 포악한 짐승도 없을 거다.
이 사람도 그랬다.
"죽고 싶어?"
그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달려들었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약 0.5초 정돈 몸이 굳었던 것 같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섬뜩하게 반짝이는 은빛.
칼이다.
"…!"
영화에서 조폭들이 들고 다니던 것같이 그리 큰 건 아니었지만, 사람은 칼 앞에선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더 상체를 밀어 넣으며 용기를 냈다. 급히 어깨를 비틀어 칼의 예상 동선을 피하며 팔꿈치를 그의 가슴 쪽으로 박았는데, 나는 비릿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그 고블린에 비하면….'
이 '사람'은 나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