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화
수업이 끝날 때쯤 이미 소문이 쫙 퍼졌는지 나를 쳐다보는 애들이 많아졌다.
-쟤가 박치랑 싸워서 이겼대!
-한 방에 보내 버렸다면서?
-민준이 쟤, 정체가 뭐야?
내게 들릴 정도로 수군거리는 애들도 있었지만 나는 동요하지 않고 교문으로 향했다. 혹시 아까 그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진 않을까도 생각했지만, 그게 두렵다거나 무섭진 않다.
'없네.'
불행인지 다행인지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웃으며 스마트폰을 꺼내 지도를 확인했다. 그렇게 목적지를 다시 확인하곤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뛸 수 있으려나.'
솔직히 요즘엔 뛸 일이 거의 없었다. 체육 시간조차 공부에 방해된다며 굳이 학교에서 뜀박질을 시키진 않았다. 가까운 거리도 버스를 타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아침에 늦잠을 자지 않는 이상 전력 질주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뛰어야만 했다.
【미션 완수까지 999.5km 남았습니다.】
이제 500m 뛰었다.
사실 헬스장에 등록해서 러닝 머신이나 뛸까도 생각했었지만, 어차피 같은 시간을 쓸 바엔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미쳤다.
【미션 완수까지 998.482km 남았습니다.】
'돈도 벌고, 뛸 수도 있는 일.'
그래서 나는 이곳에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요즘엔 스마트폰으로 모든 걸 다 한다. 인터넷 뉴스도 보고, 쇼핑도 한다.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변해도 아직 아날로그는 남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신문이었다.
"알바 구하신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알바? 네가?"
번화가에 있는 작은 상가 한쪽엔 신문이 산처럼 쌓인 곳이 있었다. 그 앞으로 자전거가 늘어서 있었고, 자전거 앞엔 신문을 넣을 수 있는 바구니가 있었다. 뒷좌석도 개조해서 신문을 얹을 수 있게 해 뒀다.
"…."
직원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만 봐도 '얘는 얼마나 버티려나?' 생각이 읽혔는데, 그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언제 시간 돼?"
"새벽이 좋습니다."
신문은 조간과 석간이 나온다. 요즘엔 인터넷에 밀려 발행 부수가 적어졌다곤 해도 아직 종이의 질감을 원하는 소비자도 있었고, 미용실이나 식당 같은 곳에선 손님들이 찾기에 일부러 신문을 주문하는 일도 많다.
"얼마나 할 수 있는데?"
아저씨의 질문에 나는 옆을 보았다. 나도 이 일은 처음이었기에 가늠이 안 된다.
"두세 시간 정도요."
"그러면 첫날이니까 내일은 100부만 해 봐. 그것도 빠듯하겠지만."
"100부요?"
내 생각보다 너무 적었다.
"인수인계해야 하니까 내일 새벽 2시에 여기로 와. 원래 학생은 잘 안 쓰는데…. 걸핏하면 그만두거든."
그가 내 이곳저곳을 뜯어보며 말했다.
"한번 믿어 보지."
"100부면 얼마나 벌 수 있는데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5일로 하면 400부 기준으로 85만 원이고, 토요일 스포츠 신문까지 하면 100만 원이야. 숙련되면 시간당 100부씩 끊을 수도 있겠지만, 처음엔 100부만 해도 사지가 끊어질 것 같을 거다. 일할 계산해 줄 테니까 조금씩 늘려 간다고 생각해."
한 달에 100만 원.
학생인 내겐 큰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도 5달은 해야 미션을 깰 수 있단 얘기에 조금 실망한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그것도 400부를 돌렸을 때의 얘기란 거 아닌가?
'너무 오래 걸리는데….'
하지만 새벽에 적은 시간을 투자해 학교에 다니면서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니, 당장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말 알바를 하나 더 구하면 되겠지.'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욕심부리면 다쳐. 일단 해 보고 생각을 해."
"네, 알겠습니다."
무작정 찾아와서 떼를 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던 만큼 나도 이내 수긍했다.
아저씨가 나를 믿어야 할 이유가 손톱만큼도 없지 않나? 앞으로 일하며 내가 해낼 수 있다는 걸 직접 보여 주는 방법이 가장 빠를 것이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꼭 보자."
아저씨는 기대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충 인사를 받았다.
.
.
.
다음 날 새벽 1시 50분.
나는 어제의 신문 보급소로 나왔다. 공부하다가 10시에 누웠으니, 3시간 조금 넘게 잔 셈인데 다행히 크게 피곤하진 않았다.
'확실히 체력이 올랐어.'
다른 애들은 게임을 하거나 늦게까지 학원에 다니느라 12시 넘어서 자는 게 기본이겠지만, 나는 오늘부터 하루를 더 잘게 쪼개 써야 했다.
"여어! 왔네?"
어제 그 아저씨가 나를 보며 놀랐다는 표정이다. 내가 나올지 반신반의하고 있었던 것 같다.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네. 요즘 애들 같지 않게, 근성이 보여. 몇 살이라고 했지?"
"마흔… 아니, 고 1입니다!"
"그럼 오토바이는 못 탈 거고. 저기서 자전거 하나 골라."
오토바이, 참으로 익숙한 물건인데….
"저… 혹시 자전거 말고, 뛰어선 안 됩니까?"
일부러 두 가지 미션을 동시에 하려고 이 일을 선택한 거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면 1,000km 뛰기 미션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의욕이 넘치는 건 알겠는데, 저 많은 걸 어떻게 들어? 종이라고 무시하지 마라. 얼마나 무겁다고."
책가방을 가져오긴 했는데, 신문 100부의 양이 생각보다 많았다.
"아…."
이래서 세상은 부딪혀 봐야 실무를 배울 수 있는 거다.
"어차피 자전거가 못 가는 계단은 뛰게 되어 있어. 만만하게 보다간 큰코다친다. 요령부터 배워야 해."
아저씨가 오토바이에 신문 꾸러미를 얹었다. 수북한 게 400부쯤 되는 것 같았다.
"자전거 타고 따라와."
"네."
첫날은 어디, 어디에 배달해야 하는지 눈으로 익혔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면 배달이 더 쉬웠겠지만, 아저씨의 오토바이는 주택가와 대로변 상가를 집중적으로 돌아다녔고, 나는 그 모든 위치를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전이었다면 일일이 주소를 적어서 다녀야 했겠지만, 지력+1의 효과는 혀를 내두를 만했다.
'새벽인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구나.'
모두가 잠든 시간.
거리엔 바삐 오가는 택배 차량들이 보였다. 좀 더 아침이 가까워지자 우유 배달하는 사람도 보였고, 첫차를 기다리며 버스 정류장에 모인 어르신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익숙한 새벽 풍경. 문득 옛날 생각이 났지만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오전 6시 되어서야 우리는 다시 보급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할 만해?"
"네!"
"좋아, 오늘 것도 일한 거로 쳐줄 테니까 내일은 4시에 오면 돼. 토요일은 어떻게 할래?"
"하겠습니다."
"알겠다. 내일 보자."
"넵!"
오늘은 아저씨를 따라다니기만 해서 그런지 체력 소모가 없었다. 오히려 맑은 새벽 공기를 마셨더니 몸과 머리가 더 개운한 기분이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샤워를 마치고 남은 자투리 시간에 교과서를 보다가 학교로 향했다.
【미션 완수까지 991.71km 남았습니다.】
요즘엔 가까운 거리도 무조건 뛰어다니는 버릇이 들어서 그런지 학교까지도 순식간에 왔는데, 그나마 그것이 조금씩 모여 약 10km 정도 뛰었다. 물론, 아직 990km라는 살인적인 거리가 남아 있었지만.
'누가 이기나….'
나는 교문을 넘어서며 씨익 웃었다.
"해보자고."
【미션 완수까지 970.628km 남았습니다.】
.
.
.
신문 배달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별수 없이 자전거를 끌고 이동했지만, 신문을 저장하기 위한 용도로만 썼다. 또한 자전거를 타지 않고 밀며 뛰었는데, 그랬더니 첫날 100부를 돌리는 시간이 내 예상보다 좀 더 걸렸다.
1시간 39분.
'이 정도면 더 할 수 있겠어.'
나는 아저씨에게 내 의지를 전했다.
"100부 더 돌릴 수 있습니다."
"허! 너 그러다가 몸살 난다?"
"할 수 있습니다!"
힘차게 대답하는 나를 보며 아저씨가 기막힌 듯 보았다.
하지만 나는 돈도 벌어야 하고, 미션도 해야 한다. 아저씨의 걱정도 감사하지만, 갈 길이 멀다 느껴지니 마음이 급했다.
【미션 완수까지 949.31km 남았습니다.】
최소한의 동선을 나름대로 익혀 가면서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신문을 던지는 방법도 깨우쳐 갔다. 200부로 늘렸을 때 간신히 3시간을 넘기지 않고 완수할 수 있었는데, 숙련자들이 1시간에 100부를 소화한다고 했으니 좀 더 노력하면 더 나은 결과가 생길 것 같았다.
물론, 그분들은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사용했으니 다르겠지만, 그런 걸 따질 필욘 없었다.
그렇게 주말까지 나는 새벽을 달렸다.
배달을 300부로 늘렸고, 아직 3시간 45분이 걸렸지만, 자전거를 밀며 뛰는 요령이 붙어 갔다. 신문 부수를 늘려갈 때마다 자전거 무게가 더욱 늘어났지만, 조금씩 줄여 가는 시간을 보며 호승심마저 붙기 시작했다.
【미션 완수까지 910.6km 남았습니다.】
'조금만 하면 100km다.'
어느덧 미션의 10%를 해냈다. 일상생활 속에서 계속 거리를 줄여 가고, 열심히 달리다 보니 꽤 성과가 난 것이다. 이대로라면 500만 원을 모으기 전에 1,000km 미션을 먼저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어.'
게다가 이 상태면 다음 주엔 400부로 늘릴 수 있을 것 같았다. 5시간 안쪽으로만 돌면 2시에 나와서 7시까지 마치고 학교에 가면 된다.
스포츠 신문을 돌리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했다. 운동 후 목욕이 이렇게 시원한지 새삼 깨달았는데, 땀은 씻겨 나가지만 노력과 성취감은 피부에 흡수되는 것 같았다.
"…음?"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와 스마트폰을 보았는데, 예원이한테 톡이 와 있었다.
「다음 주, 정말 올 거니?」
나는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당연하지.」
기다리고 있던 건지 읽었다는 표시 '1'이 바로 없어졌고, 이내 예원이가 쓴 글자가 날아들었다.
「고마워.」
「고맙긴. 네 덕분에 방송국도 가 보고 좋지. 넌 잘하고 있으니까 계속 하던 대로만 해.」
예원이도 자신의 꿈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주말 알바는 한 주 미뤘다가 구해야겠네.'
녀석과 약속했으니까 그건 꼭 지키고 싶다.
'어차피 밀린 공부도 해야 했으니까.'
책상에 앉아 달력을 보았다.
'중간고사가 언제더라?'
전엔 공부를 포기했었지만, 이젠 아니다. 기회가 주어졌으니, 꼭 해내고 싶었다.
'수학이랑 영어에 더 집중해야 해.'
단순 암기 과목들은 시간이 약이었지만, 수학과 영어는 기초가 없이 무작정 외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가령 단어를 아무리 많이 외운다고 해서 그것들을 어떻게 문장으로 만드는지 모른다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달까? 게다가 영어는 문법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다. 회화도 신경을 써야 했으니 첩첩산중이 따로 없었다.
'좀 무식하긴 하지만, 늦었으니 별수 없지.'
내가 요즘 하는 방법은 문장 자체를 통으로 외우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으로도 한계는 있었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잠을 더 줄여야겠어."
지금도 4시간 이상 자지 않고 있었지만, 30분이라도 더 확보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책상에 앉았다.
.
.
.
월요일 오전 2시.
"400부 하겠습니다."
"허어…."
내가 처음 만났던 아저씨는 보급소 소장님이셨다.
"괴물이네… 이거."
고작 일주일도 안 돼서 400부를 돌리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익숙해지면 500부 해도 되죠?"
"…."
소장님은 기막히다는 듯 나를 보다가 크게 웃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근육통에 일어나지도 못할 거다, 몸살 나서 끙끙 앓을 거다, 소장님은 항상 그렇게 말했었지만 나는 다 이겨 냈다.
신문 배달을 우습게 본 건 아니지만 보통 사람이 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거다.
'총 거리와 속도를 계산해 보면 물리적으로 하루 800부까진 될 거야. 내 동선에 언덕이 없는 것도 다행이지. 뭐, 아직은 무리겠지만 더 숙련된다면 못 할 것도 없을 거야.'
스쿼트와 팔 굽혀 펴기를 1만 개씩 해내서인지 최근 자신감도 최고치였고, 내 한계를 더 알고 싶었다.
'다음 주 안에 어떻게든 끊는다.'
400부 기준으로 100만 원이니까 800부를 돌릴 수 있다면 한 달에 200만 원이 확보된다. 4~5시간을 투자해서 이 정도 벌이면 학생 신분으로 어마어마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