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화
콩닥, 콩닥.
급식을 기다리는 긴 줄에 서며 예원이는 뛰는 가슴을 두 손 모아 꼬옥 숨겼다.
힐끔, 아이들이 이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이러지?'
요즘 민준이 앞에만 서면 말문이 쉽게 떨어지질 않는다. 뭐랄까,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부쩍 어른스럽게 변해 버린 민준이는 이전과는 달리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아우라가 생겼다.
하지만 그건 예원이만 느끼고 있는 게 아니었다.
"하, 저것들 뭔데?"
"거슬리네."
"설마 저 둘이 사귀는 건 아니겠지?"
급식은 모든 아이들에게 평등하겠지만, 아이들 사이에선 서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어느 학교에나 이런 부류는 있었는데, 소위 말해 '일진'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저놈,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도민준이라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네 명의 아이 중에서도 유독 더 존재감 있는 키 큰 한 녀석이 팔짱을 끼며 도민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1학년 중에 저런 놈이 있었던가?'
강남석은 중학교에서도 '잘나가던' 부류였다. 일단 180cm가 넘는 큰 키도 눈에 띄었고, 체육관을 운영하는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복싱으로 몸을 다졌다. 당연히 강남석에게 다른 애들은 그저 어린애들로만 보였고 싸움 좀 한다, 하는 녀석은 척 보기만 해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저 도민준이라는 녀석은 오늘까지 전혀 존재감을 감지하지 못했었다.
'몸이 보통이 아닌데.'
강남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도민준의 교복 속 근육을 어림잡아 보았다. 무심히 드러난 팔뚝이나 굵은 허벅지, 목덜미에서부터 등으로 뻗어 내려간 큰 근육들이 그의 눈에 띄었다.
"흐음."
학기 초부터 학교를 휘어잡으려면 경쟁이 될 만한 녀석들을 눈여겨보는 것은 필수다. 1학년 중에서는 상대가 될 녀석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남석아, 내가 가서 한바탕 엎을까? 예원이가 저런 놈이랑 있는 거 더 봐줄 수가 없잖냐."
강남석이 예원이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아는 친구들이기에 슬쩍 떠봤다.
"그래, 너는 가만히 있어. 우리 선에서 해결할게."
"남석이 너는 지켜만 봐. 모양 빠지게 나서지 말고. 우리 셋이면 충분해."
박치라는 별명이 있는 녀석이 앞장섰다. 박치우라는 이름 때문이기도 했지만, 싸울 때 박치기를 주로 해서 박치라 불렸다.
"쓰읍."
이목구비도 험상궂어서 박치가 노려보면 아이들은 절로 길을 트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 박치가 다른 두 녀석과 어슬렁거리며 다가오자 서늘한 분위기를 감지한 주변 아이들이 잡담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야, 그 똥국이 그렇게 맛있냐?"
"…."
그릇을 툭 치며 말하는 녀석. 명백한 시비였다.
한순간에 주변 식탁이 비워지기 시작했다. 강남석을 필두로 중학 시절부터 놀아 본 녀석들이 모인 그룹이었기에 1학년에선 이들을 막을 수 있는 아이들이 없었다.
혹여 불똥이 튈까 급급히 식판을 들고 일어서는 아이들을 보며 예원이가 그 큰 눈을 치켜뜨고 박치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너네 뭔데? 왜 그래?"
박치가 식탁에 걸터앉으며 씨익 웃었다. 그사이 다른 두 명이 옆으로 늘어서서 도주로를 막았다.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는데, 한두 번 해 본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뭐긴, 친하게 지내보자는 거지. 야, 도민준. 반갑다."
아이들이 지켜보며 웅성거렸다.
-남석이 애들이 도민준 찍었나 봐.
-어떡해! 쟤들한테 찍히면 학교생활 끝난 건데!
-누가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쟤들을 누가 말릴 건데?
괜히 나섰다가는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이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
민준은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뭐, 이런 상황, 한두 번 겪는 건 아니었다.
민준은 이미 숟가락을 놓은 지 오래였고, 박치가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짐작했다.
민준이 팔을 들어 예원이의 등을 가볍게 쓸어 준 뒤 미소 지으며 말했다.
"먼저 가."
"어, 어쩌려고 그래?"
예원이는 겁에 질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도와주는 아이들도 없고, 선생님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 민준이 스윽 일어났다.
단기간에 키가 부쩍 커서 몸을 일으키자 박치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
"하, 이 새끼 봐라? 눈깔에 힘 안 푸냐?"
하지만 박치가 고작 키 차이로 겁먹을 녀석은 아니었다. 오히려 박치기하기엔 더 좋은지 여유만만이다.
낄낄, 웃으며 한 발 성큼 다가온 녀석과 민준의 눈이 마주쳤다. 언제 주먹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급박한 상황!
"미, 민준아…."
예원이가 울먹이며 그의 교복 끄트머리를 손으로 잡았다. 하지만 이내 평온한 목소리가 울렸다.
"괜찮아."
민준이는 예원이를 향해 얼굴을 돌리고 말했다.
"…?"
"괜찮다고."
싱긋 웃는 얼굴을 보며 예원이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왜 안심이 되는 걸까?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이고, 무서운 애들이 잔뜩인데, 민준이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민준은 예원이를 안심시킨 뒤 박치를 향해 얼굴을 돌리며 손을 내밀었다.
"뭔데?"
내민 손을 보며 박치가 얼굴을 찡그렸다.
"친하게 지내보자며?"
천연덕스럽게 악수를 청하자 박치가 오만상을 쓰며 노려보다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리곤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비리비리한 새끼가 뭘 믿고…. 어디 맛 좀 봐라!'
손을 작살 내 버릴 생각으로 꽉 잡은 박치. 하지만 이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 어어…?"
잡은 손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아, 아아악-!"
뿌득.
박치가 순간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놔, 놔! 이 새끼야!"
잡은 손이 부서질 것 같았다.
뿌드득.
심지어는 뼈가 갈리는 소리까지 났다. 하지만 떨쳐 내려고 해도 악력이 얼마나 강한지 뿌리칠 수조차 없었는데, 박치는 어깨를 흔들다가 본능적으로 고함을 지르며 머리를 앞으로 후욱! 내밀었다.
박치의 전매특허인 박치기였다.
"꺄아아아아-!"
바로 뒤에서 지켜보던 예원이가 비명을 질렀다. 박치의 이마가 민준의 얼굴을 향해 똑바로 날아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끝났군.'
'코가 부러지겠어.'
박치 패거리는 옆에서 비웃으며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콰앙!
"크허억-!"
박치기를 시도한 박치가 오히려 뒤로 널브러졌다. 얼마나 세게 부딪혔는지 분명 뭔가 깨지는 소리까지 울려 퍼졌는데, 나가떨어지는 박치를 보며 모두는 경악했다.
민준이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픽 웃으며 말했다.
"너넨 인사를 이런 식으로 하나 보지?"
얼마나 놀랐으면 그 눈빛에 주춤 뒷걸음까지 치는 녀석들이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미친….'
여태껏 박치와 박치기 싸움에서 이겼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꿈틀, 꿈틀….
쓰러진 박치가 살충제를 맞은 벌레처럼 몸을 떨어댔다.
"박치야!"
"야! 박치! 너, 괜찮냐?"
정신을 차린 패거리가 다급히 박치를 불러 보지만, 녀석은 곧 축 늘어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박치기 한 방에 기절해 버린 거다.
"히이익?"
"야! 야…!"
일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두 사람은 쓰러진 박치에게로 후다닥 이동해 박치의 몸을 흔들었다.
"얘, 주, 죽은 거 아니야?"
"야! 정신 차려 봐!"
박치는 뽀글뽀글 입에 거품까지 물었다. 살이 터진 이마에선 핏기가 맺혔고, 눈은 허옇게 뒤집혔다.
"…."
"…."
지켜보던 모든 아이들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설마 박치가 단 한 방에 뻗어 버릴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먼저 공격한 건 박치가 아닌가?
예원이도 놀라서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는데, 이때였다.
"…어, 어디 가? 도민준!"
도민준이 웃으며 한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강남석이 있었다.
'이게… 미쳤나….'
강남석은 자신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도민준을 보면서 침을 삼켰다.
박치를 한 방에 보내 버린 거? 운이 좋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박치를 박치기로 보내 버린 건 이해할 수 없었다. 박치기라는 기술이 보기완 다르게 굉장히 까다로운 기술이었고, 주먹질이나 발길질처럼 평소에 쉽게 훈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완벽한 타이밍을 익히려면 경험이 필수였다.
스윽.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남석이 이마를 구겼다. 도민준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 새끼….'
그리고 이때, 강남석은 보았다.
'전혀 흥분하지 않았어.'
도민준은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보통의 아이들이 싸울 때는 제 분을 못 이기거나 흥분해서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기 마련인데, 도민준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너무도 차분해서 오히려 경각심이 들 정도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건가?'
강남석은 도민준의 어깨너머로 다른 애들을 바라보았다.
'만약 여기서 내가 깨지면?'
갑자기 좋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싸워서 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만에 하나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이제 학기 초인데 이런 놈에게 지기라도 하면 앞으로 3년 내내 다른 놈들이 자신을 우습게 볼 것이다.
무엇보다 저 눈빛!
'우리 체육관에도 저런 눈은 드문데….'
아버지는 늘 눈이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그래서 상대를 파악할 때 그 눈을 보고 짐작하라고 했었다.
한데 도대체 이놈은 뭔가?
겁을 먹거나, 긴장하거나, 흥분했다면 저런 고요한 눈동자를 만들 수 없다. 스파링을 아주 오래 해서 링이 전혀 두렵지 않은 숙련자들이나 할 수 있는 눈이랄까.
무엇보다 아버지와 같은 세월의 깊이를 품고 있는 눈동자였다.
'뭐 이런 자식이….'
그렇게 강남석이 도민준을 노려보고 있을 때 저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오신다!
그 목소리에 그제야 아이들 사이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아 다행이었다.
"…."
도민준은 묘하게 웃으며 강남석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곤 돌아섰다.
아직도 조마조마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예원이에게 돌아가는 도민준을 보면서 강남석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뭐 하는 자식이지?'
.
.
.
점심시간이 끝났다.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책을 펴 놓고 책상에 앉아 식곤증을 이겨 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직까진 조용하네.'
박치란 놈이 기절했는데도 소란스럽지 않은 걸 보면 놈들도 쪽팔렸는지 알아서 흐지부지 처리한 모양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교무실로 소환되었을 거다.
스윽.
손을 들어 이마를 만져 보았다. 욱신거리긴 하는데 크게 아프진 않았다.
'확실히 달라졌어.'
나는 키만 큰 게 아니었다. 그간의 운동으로 성장했고, 고블린이라는 괴물과 맞상대를 해 봐서인지 깡도 세졌다. 이전에도 어느 정도 강단 있단 소릴 들었지만, 더 쉽게 마인드 컨트롤이 된달까? 이건 나이완 상관없는 거다.
또한, 원래도 나는 이런 녀석들과 싸우는 게 이골이 난 놈이다. 힘이 없을 때도 독기 하나로 버텨 냈던 나인데, 이젠 힘까지 손에 거머쥐었으니 거칠 건 없었다. 심지어 내 눈엔 죄다 애들일 뿐이다. 어른이 유치원 가서 겁을 먹는 것부터가 웃긴 거다.
거기에 더해서,
체력+1과 지력+1.
이것이 주는 능력은 굉장했다.
'이젠 누구에게도 쉽게 지지 않아.'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아쉬움이 공존했는데, 더 강력한 힘을 갖고 싶단 열망이 들기 시작했다. 박치 같은 놈들이 한 트럭 몰려와도 상대할 수 있는, 그런 나를 키우고 싶다.
'우선, 이것부터!'
부르르.
하지만 나는 머리를 흔들며 잡생각을 지웠다. 일단 책이 앞에 있으니 부족한 공부부터 따라가야 했다.
'아직도 기초가 부족해. 단순히 암기하는 건 해도 이게 뭘 뜻하는 건질 잘 모르겠어.'
워낙 기초가 없어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단계만 넘어서면 그 누구보다 빠르게 성적을 올릴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아직은 오리무중인 지식의 세계를 위해 무식하게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 나가며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미션: 1,000km를 뛰어라. 추가 보상 획득 가능.】
【서브 미션: 500만 원을 벌어라. 추가 보상 획득 가능.】
'할 수 있어.'
그래, 두드리면 열리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