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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마켓-8화 (8/277)

#008화

"후… 우. 하…."

511호 앞에 서서 심호흡을 길게 했다. 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또 갇혀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이 치밀었다.

'쉽게 못 나올 수도 있어.'

지금까지의 일들을 돌이켜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고블린에, 스쿼트에 어느 하나 쉬운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돌아갈 수도 없다. 뭐든, 아는 맛이 더 무서운 법이다.

'조금만 쉬운 게 나온다면 좋을 텐데….'

【예상 불이익: 뇌출혈, 협심증, 암, 심장 마비….】

게다가 이런 협박이 거짓일 리도 없었다.

"…."

덥석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끼이이익.

열리는 문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니 여전히 인기척은 없었다.

꼴깍!

절로 넘어가는 침을 삼키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순간, 이 문을 뭔가로 막아서 닫히지 않게 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쿠웅!

헛생각 말라는 듯 문이 굳게 닫혔다.

【재능마켓에 입장하셨습니다.】

내가 들어서자 오른쪽 벽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그그긍.

유리 벽이 나타났고, 또다시 수많은 아이템들이 진열된 채 내 눈앞에 드러났다.

'아, 대박.'

저 안의 것들이 장난감이 아니란 것쯤은 이제 확실히 안다. 어떻게 써야 할지야 나중 일이고, 그저 갖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나도 모르게 차오르는 탐욕이라니. 살아오면서 이렇게 무언갈 가지고 싶단 생각은 처음인 것 같다.

'팔 굽혀 펴기를 하려나….'

그러다 문득, 오늘의 미션이 걱정됐다. 스쿼트도 한 마당에 까짓거 하라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그 험난한 고통을 생각하면 썩 내키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욕망은 지난 고통을 기억나지 않게 하는 법. 지력+1의 효과를 체감하고 있던 나에게 체력+1은 탐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니, 더 망설일 수도 없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방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울려 댔다.

【미션: 1,000km를 뛰어라. 추가 보상 획득 가능.】

"뭐, 뭐어?"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너무 당황스럽지 않은가? 내가 예상한 루트에서 완전 벗어난 거다.

"처, 천 킬로미터라고…?"

나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기구 중에 러닝 머신이 있는지 찾아보려는 거다.

하지만 없었고, 알림은 이어졌다.

【서브 미션: 500만 원을 벌어라. 추가 보상 획득 가능.】

"돈을 벌라고…?"

이건 또 뭔 소린가?

너무도 불친절했기에 나는 물었다.

"이 안에서 하라는 거야?"

【미션은 재능마켓 외부에서 수행할 수 있습니다.】

【모든 미션을 수행해야만 다음 미션을 받을 수 있습니다.】

"…."

그나마 다행이다.

갇혀서 뛰기만 하라는 건 아니었으니까.

"추가 보상이라는 건 뭐지?"

나는 다시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쳇, 알아서 하란 거지?"

나는 혀를 차며 유리 벽에 붙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내가 보유한 포인트로는 엄두도 나지 않는 제품들이 즐비하다.

'언젠간 가질 수 있을 거야.'

오늘은 아이쇼핑뿐이지만, 못 가질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두 번뿐인 성공이었지만, 자신감이 붙어 있었고, 이전처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근데, 1천km면 얼마나 뛰어야 하는 거지?'

어지간히 과격한 단위를 좋아하는 곳이다. 필라테스는 만 번이더니, 1천km는 대체 얼마만큼이란 말인가? 마라톤도 42.195km인데, 1천 킬로면 대체 몇 시간을 뛰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500만 원이라….'

고등학생이 500만 원이라는 돈을 벌기란 쉬운 게 아니다. 사실 1천km가 얼마만큼인지 가늠도 안 되지만, 뛰기만 하면 되는 거란 생각에 돈이 더 걱정된다.

택배를 할 수도 없고.

"오백만 원…."

학교 빼먹고 배달만 하면 못 벌 돈도 아니었지만….

'공부를 포기하긴 싫어.'

다행히도 걱정에 앞서 계산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는데, 이 또한 지력+1의 효과로 뇌가 팽팽 돌아가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돈과 달리기, 이 두 가지를 따로 하는 건 비효율적이야.'

시간을 무한정 들여서 할 순 없는 일이니, 최대 효율을 내려면 방법을 연구해 봐야겠다.

'두 가지 미션을 동시에 수행하려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스윽 유리 벽을 바라보고 말했다.

"필라테스 이용권 하나 줘."

【누적 포인트 290p가 있습니다.】

【정말 100p를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솔직히 말해서 여기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나는 운동에 대해 겁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미션이 주어진 이상 체력+1을 반드시 따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호오? 그렇고 보니, 여기 들어와서 공부해도 되겠는데?'

여기선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시간이 아깝단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이런 기막힌 방법이 있나?

【필라테스 이용권을 구매하였습니다.】

【100p가 차감됩니다.】

【190p를 보유했습니다.】

【필라테스 이용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전엔 당황했지만, 이제는 슬슬 옷을 벗으며 준비를 했다.

【운동 효과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운동에 따라 체력, 지력, 근력, 회복력, 면역력, 순발력 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귀하에게 허락된 종목은 두 가지입니다.】

"…?"

당연히 팔 굽혀 펴기를 할 줄 알았는데, 두 가지라니?

【팔 굽혀 펴기 10,000회. 흐트러짐 없는 자세 필수. 체력+1 획득 가능.】

【철봉 오르기 10,000회. 하강 시 팔꿈치 관절을 완전히 펴야 함. 근력+1】

"흠…."

스쿼트를 완료해서일까?

근력+1을 획득할 수 있는 새로운 운동이 추가되어 있었다.

"체력과 근력이라…."

철봉 오르기 1만 번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힘든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가서 달리기 미션을 하려면 근력보다는 체력이 중요할 거야.'

나는 결정했다.

"팔 굽혀 펴기."

【팔 굽혀 펴기 10,000회를 선택하셨습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 필수. 체력+1 획득 가능.】

후우우웅.

빛나는 원반이 생겨나는 것을 보며 나는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웃는 게 우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

.

.

"하아암…."

잘 잤다.

나는 딱딱한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미션 완수까지 팔굽혀펴기 3,208번 남았습니다.】

나는 전처럼 다급하게 운동하지 않았다. 졸리면 잠까지 자면서 체력을 회복했고, 포인트를 아껴 가며 공짜로 주는 만두와 물을 챙겨 소비했다.

팔 굽혀 펴기 5,000번을 넘겼을 때, 돌발 미션을 수행해서 만두를 얻었고, 50포인트를 얻어서 240포인트를 누적했다.

"세 번 푹 잤으니까, 한… 삼 일쯤 됐나? 이틀 정도일 수도 있겠고."

확실히 지력+1이 주는 판단력과 사고력은 이렇게 도움이 된다. 이전의 나라면 무식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보상을 얻기도 전인데, 근력이 오른 것 같아."

나는 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 팔을 봐라.

팔 굽혀 펴기를 7,000번 가까이 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 팔 근육이 터질 것같이 부풀었고, 혈관이 툭툭 도드라졌는데, 덩달아 허리와 발가락까지 단련된 느낌이었다.

"으차!"

나는 경쾌하게 일어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

누가 보면 정말 미쳤다고 하겠다.

하지만 나는 조금씩 즐기고 있었다. 강남역을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를 단련하는 기분도 나름 괜찮았다. 또한, 여기선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고, 무식하게 미션만 달성하면 무조건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도 깨달았으니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달까?

"슬슬 시작해 볼까?"

두 개 남은 만두를 보니 입가에 침이 고였지만, 지금은 아끼자는 마음으로 엎드렸다. 한 500개 정도 더 하고 먹으면 될 거다.

"헛, 둘, 헛, 둘."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나는 팔 굽혀 펴기에 돌입했다.

【미션 완수까지 팔 굽혀 펴기 3,143번 남았습니다.】

미션 달성까지 남은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제 100개쯤은 안 쉬고 가능하다. 스쿼트에, 팔 굽혀 펴기까지 이젠 이 두 가지 종목에선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다.

'묘하게 스쿼트보단 쉬워. 코어 덕분인가?'

회복력과 피로를 풀어 주는 만두와 생수가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나는 하체 운동보다 상체 운동이 잘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체력을 조절하면서 팔 굽혀 펴기를 계속했다.

이윽고,

【축하합니다!】

【체력이 +1 올랐습니다.】

【대단한 도전에 성공했습니다!】

【추가 보상으로 200p가 지급되었습니다!】

"크크큭…."

【코어가 성장했습니다.】

만두와 생수가 바닥을 드러냈을 때, 나는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지난번과 비교해서 이번 도전을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지력+1이 더해져서 전략적으로 운동을 한 것도 있겠지만, '코어'의 힘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 딱히 뭐가 어떻게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코어가 성장했다는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몸 자체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으니까.

심지어 이제는 체력까지 +1이 붙었다.

【누적 포인트 440.】

거기에 포인트도 쏠쏠하게 벌었다.

나는 땀이 흐르는 이마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한 판 더 해야 하나.'

이왕 강남까지 온 거 철봉까지 해치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알림이 날아들었다.

【미션을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필라테스 이용권을 구매할 수 있지만, 미션을 달성하지 않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쳇."

하긴 이런 제약이 없다면 한 방에 괴물이 되어 나갈 수 있을 거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더 짧아졌네."

그리 큰 키가 아니었는데, 이젠 180cm에 육박한 것 같다. 다리만 길어진 게 아니다. 신발도 꽉 조였다.

'교복 다시 맞춰야겠어….'

남자애들 소원이 키 크는 것일 텐데 나는 비용부터 걱정이 들었다.

'어차피 500만 원을 벌라고 했으니까 조금만 더 버텨 보자.'

교복뿐 아니라 운동화나 사복까지 다 새로 맞춰야 하니 꽤 돈이 들 것 같다.

【재능마켓에서 나가시겠습니까?】

현관에 선 나는 전보다 홀가분한 표정으로 웃었다.

"또 보자고."

쿠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으로 다가왔다.

.

.

.

힐끔.

힐끔, 힐끔….

최근 1학년 1반엔 묘한 기류가 흘렀다.

'내가 왜 이러지?'

'자꾸 민준이만 보게 돼.'

'쟤가 저렇게 훈남이었나?'

여학생들은 수업 시간에도 종종 뒤를 돌아보았다. 지난주만 해도 존재감이라고는 1도 없던 도민준이 갑자기 눈에 밟히기 시작한 것이다.

남학생들은 반대로 얼굴을 돌렸다.

'오늘도 예쁘다, 예원이….'

'하아, 말이라도 한번 걸어 봤으면.'

'톱 텐 붙은 거 축하한다고 접근해 볼까?'

같은 반이라고 모두 친한 건 아니다. 심지어 특정 아이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면 묘한 거리감이 생겨나는데, 예원이야 워낙 유명하니까 그렇다고 쳐도 여자아이들의 반응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크!'

그건 예원이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눈이 마주쳐 버렸잖아!'

자연스럽게 돌아보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민준이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콩닥, 콩닥!

삼시 세끼만 챙겨 먹어도 쑥쑥 자란다는 고등학생 남자애들이라지만 민준이의 폭풍 성장은 반 아이들 사이에서도 화제였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단순하게 키만 큰 게 아니다. 전체적으론 마른 체형인 것 같아도 교복이 꽉 낄 정도로 튼실한 팔 근육과 긴 목, 그 위론 자라지 않았는지 상대적으로 작은 얼굴은 완벽한 모델 비율에 근접해 가고 있었다.

여자를 폭 안아 줄 수 있을 만큼 어깨도 넓어진 것 같고.

'말해야 하는데.'

다음 주 토요일에 톱 텐 생방송에 와 줄 거냐고 얘기하고 싶은데, 다른 아이들 눈치를 보느라 쉽게 다가갈 수가 없다.

'그냥 톡으로 할까?'

이때였다.

-와아! 끝났다!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트인 숨통을 뱉어 냈다.

-매점 가자! 매점!

화장실이나 매점으로 향하는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갔지만 민준이는 가만히 앉아 교과서를 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한 건 또 있다. 민준인 공부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줄 알았는데, 며칠 전부터 미친 듯이 교과서를 보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앞 머리칼이 눈썹을 간지럽혀도 얼마나 집중하는지 표정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저러니 그녀가 파고들 틈이 있나. 더 문제인 건 여자애들 몇몇이 민준이에게 관심이 있는지 훔쳐보고 있다는 거였다.

'히잉….'

혹시 눈이라도 마주치면 신호를 주려고 했지만, 민준인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또 집 앞에서 기다려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예원이는 누군가 자기 옆에 서 있다는 걸 느끼고 옆으로 얼굴을 돌렸다.

"…어?"

생각도 못 했기에 놀람이 더 컸다.

"도민준…?"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점심, 먹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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