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화
"남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크는구나."
손바닥을 펴 내 머리 위로 쭈욱 팔을 뻗은 예원인 싱긋 웃으며 말했다.
실상 며칠 전만 해도 신발을 덮던 바짓단이 지금은 발목까지 와 있었다. 이건 단순한 성장 속도라고 보기엔 누가 봐도 이상했을 거다. 내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었기에 아무도 몰랐건만, 예원인 예외였나 보다.
"밥…."
나는 주변을 스윽 둘러보며 물었다.
"같이 먹을래?"
내 말에 예원이도 의외였는지 움찔했지만, 곧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식판을 들고 빈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의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달랐다. 고작 스쿼트 만 번이 뭐라고 이렇게 자신감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해 본 것과 안 해 본 것은 다르다.
"무슨 생각 해?"
내가 말이 없자 예원이가 나를 보며 물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요즘 뭐 힘든 일이라도 있어?"
"아니, 없는데?"
있었지.
그것도 살인적으로 힘들었던 일이.
재능마켓에서의 일이 머리를 스쳐 갔다.
'고블린'.
그만한 생물을 죽여 본 경험을 해 본 사람이 있긴 할까? 아직도 그 찝찝하게 가슴이 울렁거리던 순간이 섬뜩하다.
"입맛이 없는 것 같은데?"
걱정스러운 표정의 예원이를 보며 나는 웃어 보였다.
"아니야. 맛있어."
전이라면 이렇게 예쁜 애와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면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겠지만, 내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필라테스, 지능+1, 코어, 성장…. 그것들이 실제로 내게 영향을 주고 있어.'
기억력이 월등하게 올랐고, 키가 컸으며 자존감도 높아졌다.
"혹시…."
"어?"
식판이 거의 다 비워질 때쯤 예원이가 물었다.
"방송 봤니?"
그 오디션을 말하는 건가 보다.
"응, 다는 아니고."
대충 둘러댔다.
"나… 이번에 붙으면 톱 텐에 가거든."
"아? 잘됐네."
"혹시 톱 텐 가면… 와 줄 수 있어?"
"어디? 방송국에?"
"으응…."
"녹화가 언젠데?"
"톱 텐부터는 생방송으로 해. 토요일 저녁 7시에. 좋은 자리 잡으려면 5시까지는 와야 할 거야."
"…."
내가 가만히 바라보자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살짝 숙이는 예원이를 보며 나는 말했다.
"그래, 갈게."
"정말?"
"응."
방송국엔 근처도 가 본 적 없었지만, 초대까지 하는데 거절할 이윤 없었다.
"붙기나 해."
나는 장난스럽게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며 식판을 들었다. 사방에서 이쪽을 향해 귀를 쫑긋하고 있는 애들이 너무 많았다.
-쟤네 뭐야?
-몰라! 언제부터 둘이 친해진 거지?
-밥도 같이 먹잖아!
-예원이랑 같이 있는 저 남자애 누구지?
-처음 보는데?
내가 먼저 자리를 뜨자 애들이 쑥덕거렸다.
'어지간히들 관심이 많네.'
예원이가 학교의 슈퍼스타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에 비해 내가 너무 평범해서 더 부각될 거다.
그러나 이것도 이제는 아무 상관 없었다. 나는 예원이가 유명해서 함께하려는 것도 아니고, 떨어지는 콩고물 따위에도 관심 없다. 오히려 나 자신의 변화에 더 즐겁다.
교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전교생이 좋아하는 예원이가 앞에 있을 때도 뛰지 않던 심장이 고작 책 한 권 두고 이런다.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늦었다고 생각했었다.
포기해야 한다고 자책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따라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번 인생은 다를 거다!'
-점심시간 끝났다! 다들 자리에 앉아!
선생님이 오시면서 교실에 정적이 흘렀다. 항상 따분하다고 생각했었던 잠깐의 고요가 이젠 너무도 좋다.
'1초도 아까워.'
그렇게 나는 미친 듯이 공부에 빠져들었다. 사람이 집중하면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고, 지식을 쌓아 갈수록 맛보는 희열은 그 어느 것보다 달콤했다.
이날 밤.
나는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다. 야간 자율 학습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문득 고개를 드니까 새까만 밤이 찾아온 거다.
꼬르르륵.
그제야 몸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린다. 배고픔조차 잊고 공부에 몰두했던 거다.
오후 8시 46분.
강남역으로 가기엔 늦었고, 여기서 공부를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집에 가서 더 보자."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나는 갈증을 느꼈다. 세상의 모든 책을 다 머리에 넣어도 부족할 것 같다. 머릿속 책장은 방대했고, 그것이 하나씩 찰 때마다 기뻤다.
교문을 빠져나오는데, 경비 아저씨가 나를 발견했다.
"이제 나오는 거냐?"
"네."
"뭐 하다가?"
"공부했어요."
"그래? 흐음."
학교 담벼락 으슥한 곳에서 불량한 애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도 그런 부류처럼 보였을까? 아저씨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내일부터는 일찍 나와야겠어.'
눈을 가늘게 뜨는 아저씨를 뒤로하곤 나는 집으로 향했다. 그 길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은 아이들을 몇 명 마주쳤는데, 다들 삼삼오오 짝을 이뤄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 거다.
전엔 그게 참 부러웠는데, 이젠 아니다.
'지나왔던 모든 교과서만 다 외워도 할 만할 거야.'
그나마 다행인 건 집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받았던 교과서들이 그대로 진열되어 있을 거였다. 거의 새 책 수준으로.
'버리지 않길 천만다행이지.'
나는 마치 최신형 컴퓨터를 사 둔 아이처럼 발걸음을 서둘렀다.
하루 사이 고등학교 교과서를 달달 외긴 했어도 기초가 부족해서 아쉬웠던 순간이 많았다. 곱하기를 배우고 있는데 더하기를 모르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이전 교과서들을 꾸준히 본다면 흐릿했던 눈앞이 맑게 갤 것이다.
그렇게 아파트에 진입해서 막 돌아서는데, 한 사람이 보였다.
"…어?"
처음엔 약간 놀랐다.
전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오늘은 예원이 혼자였다.
"늦었네?"
"설마, 나, 기다린 거야?"
"그냥 답답해서 바람 쐬고 있었어."
같은 아파트에 사니까 마주칠 수도 있겠지만… 우연인가?
"민준아, 잠깐, 괜찮아?"
나는 끄덕이며 예원이의 옆으로 걸어갔다.
"…."
"…."
놀이터 쪽을 향하며 예원이의 입술이 몇 번이나 달싹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네에 나란히 앉자,
마침내 예원이의 음성이 들렸다.
"아까 내가 부탁한 거, 부담스러웠으면 꼭 안 와도 돼."
"그것 때문에 기다린 거야?"
"기다린 거 아니라니까!"
삐죽 던지는 말투에 나는 절로 웃어 버렸다.
그러면서 분위기를 바꿨다.
"근데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어?"
내 말에 예원이가 고개를 돌렸다. 짓궂은 눈빛이 보였다.
"말 안 해 줄 건데?"
"있긴 있단 거네."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예원이가 고갤 갸웃했다.
"오늘따라 이상하다, 너."
"내가 뭐."
"묘하게 똑똑해 보이는데?"
"원래는 바보였다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민준이 넌 생각하기도 전에 몸부터 날리던 애잖아."
"하하, 그랬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긋지긋한 괴롭힘에서 벗어나는 길로는 이성을 놓는 게 가장 좋았었으니까. 그런 독기도 없었다면 무수한 놈들에게 완전히 짓밟혔을 거다.
"근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비밀!"
"…."
더 물어봐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자, 문득 재능마켓에서 봤던 아이템이 생각났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향수
지속 시간 30분.
가격 10,000p.」
'그게 있었다면 이럴 때 써먹을 수도 있겠네.'
물론 1만 포인트라는 어마어마한 장벽을 넘어야 손에 넣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근데, 1만 포인트면 고블린을 몇 마리 죽여야 하는 거야? 그 전에 내가 죽는 거 아냐?
그런데 그때,
"하아…."
예원이가 다리를 쭉 뻗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걸 보며 물었다.
"자신 없어서 그래?"
"너한테도 그렇게 보이는 걸 보면 진짜 그런가 보다. 이렇게 떨릴 줄 몰랐는데, 막상 톱 텐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예원이가 두 손을 모아 꼭 쥐었다.
"흐음…."
나는 그걸 보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녀석에게 어떤 조언이 필요할 것 같은데….
"…."
문득, 주마등처럼 스쿼트 1만 번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람이 못 할 게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던 경험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었으니까 너도 해!'라는 말을 해 줄 순 없었다. 그게 와닿지 않는다는 건, 지난 내 인생에서 처절하게 배워 오지 않았나?
노력?
그만큼 이중적인 말이 있을까? 사람마다 다 다를 텐데?
게다가 학교에선 모두가 예원이를 응원한다. 그 녀석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어려웠을 거다.
"야."
내 목소리에 예원이가 나를 보았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런데, 톱 텐 다음엔 뭐야?"
"톱 파이브."
"그다음엔?"
"세 명 남아서 결승전 해. 패자 부활전이 간간이 있고."
조심스레 답하는 예원이를 보며 나는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러면 그때마다 계속 이럴래?"
"…?"
위로받고 싶었을 수도 있다.
단순하게 칭얼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예원이에게 말했다.
"이미 충분히 잘했잖아. 넌 지금도 우리 학교 최고라고. 더 바라는 게 있어? 전교 1등이나 마찬가지인데."
방송에 나갔으니 유명한 가수가 되고 싶을 수도 있다. 나는 예원이의 꿈을 모른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되는 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거…?"
예원이가 말끝을 흐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나를 힐끔 바라보는 눈빛이 이상하긴 했지만, 일단 녀석에게 이 말은 꼭 해 주고 싶었다.
"천천히 가. 넘어진다. 넌 이미 충분히 빨라."
학교에서 예원이를 모르는 사람은 이미 없다. 대단한 심사 위원들한테도 인정을 받았고, 그 많은 참가자 중에서 10명 안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했다.
이 정도만 해도 굉장하지 않나?
나는 그네에서 일어났다.
"내가 볼 땐, 넌 이미 스타라고."
"…정말?"
"당연하지. 그러니까 이제 할 일은 하나야. 후회 남기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거."
"푸훗! 갑자기 어른처럼 구네?"
"이 몸은 삶의 무게가 다르거든."
"어련하시겠어."
예원이가 웃자 나도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자. 늦었어."
부드러운 손끝이 내 손에 닿자 나는 힘을 주어 그녀의 체중을 받았다.
짧았던 접속은 금세 끝난다.
두 손을 뒤로 모으고 내 곁에 서는 예원이가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덕분에 좀 낫네."
"그럼 다행이고."
놀이터를 나와 멈춰 섰다.
"잘 가."
"응."
눈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리던 예원이가 우뚝 섰다.
"민준아."
그러면서 돌아보았다.
"왜?"
"혹시 전화번호 물어봐도 돼?"
"어?"
"그냥… 너랑 얘기하니까 편해서."
.
.
.
【서브 미션: '누군가의 진심을 얻어라.'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50p를 획득했습니다!】
어젯밤, 나는 우연히 서브 미션을 달성했다. 더해 보상으로 50포인트도 얻었다.
이 50포인트면 생명수 5병을 살 수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성과던가!
카톡.
그리고 또 하나.
【막 녹화 끝났어!】
【오늘도 끝까지 힘내자! 아자!】
예원이가 카톡을 보내고 있었다.
촬영 때문에 오늘 학교에 나오진 않았지만, 이렇게 톡을 보내니 녀석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전이었다면 녀석의 톡 하나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하나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으며 고민하고 있었겠지만, 나는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위를 바라보았다.
꿀꺽.
"…."
-자기야! 여기야!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아니야! 괜찮아!
수많은 연인이 만나는 곳.
-빨리 가자. 예약한 거 괜찮겠지?
-응! 아직 시간 있어!
강남역에 또다시 나 혼자 와 있었다.
"후우…."
어제 서브 미션을 끝내자마자 새로 나타난 지령.
【재능마켓에 입장하세요. 남은 시간 14시간 53분 11초.】
수많은 이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지만, 나는 멈춰서 5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능마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