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화
"…?"
배꼽 아래가 단단히 뭉친 기분이 들었다.
【코어가 활성화되면 육체의 성장, 체력과 회복력이 높아집니다.】
【코어의 크기가 커질수록 효과는 극대화됩니다.】
"오오…."
뭔가 이물감 같은 것이 익숙하진 않았지만, 나름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뭐 어떤가, 체력과 회복력이 높아진다지 않나?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추가 보상은 냉장고에서 수령하세요.】
나는 급히 뛰어갔다.
아까는 물밖에 없던 냉장고였는데?
"우와…."
벌컥 열린 문 안쪽으로 만두 한 접시와 생수 한 병이 보란 듯이 있었다. 더 어이없는 건 차가운 냉장고 속에 들어 있었던 군만두가 김이 모락모락 난다는 거다.
꿀꺽.
나도 모르게 접시를 들고 침을 넘겼다.
이걸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선 자세로 만두 하나를 집어 입에 쏘옥 넣었다.
【포만감이 극대화됩니다.】
【모든 상처와 피로가 회복됩니다.】
"대박…."
'군만두가 다 거기서 거기지.'라는 말 따윈 이 만두 맛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질 것이다. 살면서 먹어 본 그 어떤 만두 중에 으뜸이라고 할까? 더 놀라운 건 고작 하나 먹었을 뿐인데 배가 불렀다는 것이다.
효과는 또 어떻고?
연속 스쿼트를 하느라 기진맥진이었는데, 말끔하게 나아졌다.
"크흡, 아껴야겠어."
아무리 배가 불러도 더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꾸욱 참았다. 아직 8천 개 넘는 스쿼트를 해야 했고, 피로가 회복되는 걸 본 이상 만두를 허투루 쓸 순 없다.
그렇게 나는 다시 운동에 열중해 갔다.
5천 개쯤 달성했을 때,
【코어가 성장했습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도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7천 개를 넘어서자, 보상을 하나 더 얻었는데,
【추가 보상은 냉장고에서 수령하세요.】
마침 만두와 생수가 떨어진 상황에서 추가 보급은 생명수나 같았다. 어느덧 호흡도 일정하게, 움직임도 규칙적으로 변해 갔다.
스쿼트에 있어서는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감이 붙을 무렵엔 8천 개를 넘어섰고, 한 번에 100개쯤 하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질 정도로 이골이 날 때쯤엔, 알림이 알려 줬다. 내가 가야 할 길을.
【미션 완수까지 스쿼트 1,004번 남았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른다.
하루? 이틀? 설마 일주일쯤 됐나?
"…."
표정에도 변화가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그저 스쿼트 하는 기계나 다름없었고, 몸을 낮추면 그저 꼿꼿이 일어나는 반복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이 과정이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이윽고 남은 개수가 천 번 안쪽으로 진입하자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 망할 필라테스 오피스텔에서 나갈 때가 다가온 것이다.
【미션 완수까지 841번 남았습니다.】
내가 스쿼트를 9천 개 넘게 해내다니!
【코어가 성장했습니다.】
코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성장했다는 알림이 뜰 때마다 몸이 가뿐해짐을 느꼈다.
【미션 완수까지 682번 남았습니다.】
"후…."
500개가 남았을 때, 나는 몸을 풀었다.
"한 번에 달려 볼까?"
시작할 때만 해도 10개도 힘들었던 나다. 그런데 지금은 무려 500개를 한 세트에 끝내려는 마음을 먹은 거다.
"마지막이야."
이젠 만두도 다 먹었고, 물도 없다.
【미션 완수까지 499번 남았습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거창한 말까지 붙일 필욘 없었지만, 나는 비장했다.
【미션 완수까지 381번 남았습니다.】
코어 덕분일까?
이제 100회쯤은 거뜬해졌다.
【미션 완수까지 250번 남았습니다.】
이제 스쿼트는 나와 한 몸이나 다름없었고, 나름 성취감도 생겼다. 하지만 250번이 넘어가자 온몸의 근육에서 신호가 올 수밖에 없었는데,
"후우…."
그나마 이 정도쯤은 완급을 조절하며 페이스를 맞춰 갈 수 있었다. 지금 한 250개보다 전의 50개가 더 힘들었으니, 체력이 정말 많이 늘었음을 느꼈달까?
'할 만해.'
게다가 이가 갈리고 살이 터질 것 같은 고통마저 익숙해졌고, 그걸 참아 내며 하나하나 숫자를 더해 가는 것에 쾌감이 생기기까지 했다. 이래서 헬스장 마니아들이 생겨나나 보다.
【미션 완수까지 99번 남았습니다.】
"…."
이쯤 되면 한번 쉬어가도 될 일이다. 오기를 부릴 것도 아니었고, 이거 한다고 누가 칭찬을 해 주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승부욕 강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잘하는 것'이 생겼다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미션 완수까지 50번 남았습니다.】
마지막 50개.
이놈의 50개가 또 문제인 것 같은데, 한번 이겨 냈으니 못 할 것도 없다.
"아자!"
내 목에서 터져 나온 소리가 원룸에 메아리쳤다. 그게 내 등을 밀어주는 것 같다.
"사십구!"
무려 9,951개의 스쿼트를 해낸 나다.
'나가서 기네스북에 도전할까? 그러면 돈을 주던가?'
잠시 고통을 잊으려고 웃긴 생각도 해 보았다.
'알바로 헬스장에 취직할 수도 있겠어.'
【미션 완수까지 28번 남았습니다.】
특별한 효능을 가진 생수와 만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스쿼트 일만 번을 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미션 완수까지 9번 남았습니다.】
열 번 안쪽으로 들어서자 무아지경에 빠졌다.
"…."
머릿속에 음성이 울리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미션을 끝낸 줄도 몰랐을 것이다.
【축하합니다!】
【지력이 +1 올랐습니다.】
피잉-.
어지럼이 밀려들며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대단한 도전에 성공했습니다!】
【추가 보상으로 200p가 지급되었습니다!】
"하하…."
500회 연속 스쿼트로 포인트도 벌었다. 생수 한 병에 10p니까 200포인트면 20병을 살 수 있는 거금이라 할 수 있었다. 고블린 4마리를 죽여야 얻을 수 있는 거기도 하니 이 얼마나 큰 쾌거인가?
'지력이 올랐으면, 조금은 똑똑해진 건가?'
머리가 좋아졌다는 것을 어떻게 체감하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후… 우…. 어쨌든 끝냈어."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것 하나가 이렇게 기쁠 줄이야. 이래서 일상의 소중함은 잃어 봐야 안다는 말이 나오나 보다.
운동을 멈춰서일까?
서늘한 기분에 옷을 걸어 둔 곳으로 갔다. 그리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
셔츠를 입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바짓단이 짧다. 옷이 갑자기 줄어들었을 리가 없으니, 설마 내가 커진 걸까?
불현듯 뇌리에 스치는 단어가 있었다.
'성장….'
코어가 생긴 뒤에 들었던 말이었다.
'그게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고?'
설마 키가 더 클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이게 웬 떡인가.
'그러고 보니….'
허벅지도 조이는 느낌이다.
'하긴, 그렇게 운동을 했는데.'
고생을 하긴 했어도 고블린을 죽였을 때의 찝찝함보단 오늘이 나았다.
참 긴 하루.
"이제… 나가자…."
얼마나 고됐으면 이 원룸이 내 집같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살고 싶다는 말은 아니고.
벌컥.
【누적 포인트 290.】
【재능마켓에서 나가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열어젖힌 현관문에서 시원한 개방감이 밀려들었다.
"후우우!"
크게 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그제야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력과 코어, 포인트를 챙겨 나오며 나는 밀려드는 피곤함에 전철에 앉자마자 잠이 들었다.
.
.
.
학생의 일과는 단순하다.
집, 학교, 학원, 또 집.
거의 이 사이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간혹 특별한 날 가족과 외식을 하거나 여행을 가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생활은 공부나 운동 같은 특기에 맞춰 있었고, 그것들은 학습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나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건… 마치….'
스쿼트를 완성하고 첫 수업을 받을 때, 나는 '지력+1'의 효과를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페이지를 통째로 복사하는 기분이잖아.'
정독해서 보면 결코 잊을 것 같지 않은 느낌. 스윽 훑어보면 효과는 다소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분명 전보다 압도적으로 기억력이 올라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이전에 없던 짜릿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문법에 약해서 그것들을 술술 조합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단 본 단어는 떠올리는 순간 곧장 뇌에서 꺼낼 수 있었다.
이게 어떤 감각이냐면 머릿속에 수많은 책장이 빈 채로 있는데, 내가 거기에 단어들을 차곡차곡 집어넣는 그런?
"여, 도민준. 뭐야? 쉬는 시간에도 공부하는 거냐? 너 공포자 아니었어?"
이런 머리로 공인 중개사 공부를 했다면 2개월이 안 걸렸을 것 같다.
그렇다고 그걸 다시 하고 싶다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원대한 지식이 필요했다.
"허어? 눈빛 봐? 진짜 공부하는 거냐?"
박인성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았지만, 나는 녀석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시간이 아깝다.'
단어 하나라도 더 머릿속 서랍에 욱여넣고 싶었다. 태어나 지식에 목마르다는 경험을 처음 해 보고 있던 것이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볼 리가 없는데. 흐음…. 뭐, 하겠다니 말리진 않을게. 잘해 봐라, 도민준."
박인성은 내게 흥미가 떨어진 듯 다른 녀석을 향해 쪼르르 걸어갔다.
"…."
나는 그렇게 오전 내내 쉬는 시간마다 영어를 외웠다. 물론 다른 수업 시간엔 그 교과서를 탐독했다. 고등학교에 올라오자마자 받았던 책들이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무척이나 깨끗했지만, 이제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내 손때가 묻어 가고 있었다.
'공식은 모르겠지만, 기초만 다지면 풀 수 있겠어.'
워낙 기본기가 없어 막히는 부분이 많았지만, 숨이 턱 막혔던 수학 문제에도 이제는 자신감이 생겼을 정도다.
'집에 가서 중학교 때 교과서 좀 다시 봐야겠는데?'
나는 학원 다니는 애들이 항상 부러웠었다. 고1 전반기 수업 따위는 이미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선행해 버린 애들이 다반사였기에 더욱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젠 희망이 생겼다.
나도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전엔 그렇게 굴려도 굳어 있던 머리가 뇌에 메모리 칩 하나 심어 놓은 것마냥 돌아가는 게 신기할 정도다.
'지력+1이 이 정도라니. 이게 +10이 되면 대체 어떤 일이 가능해지는 거야?'
뇌에 슈퍼컴퓨터라도 생기게 되는 건가?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만 되면 뭐든 할 수 있겠는데?'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그게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부정할 수 없었다. 아이템을 얻지 못한다고 해도 지식만으로 떼돈을 벌 수 있다니, 슬슬 욕심이 생겼다. 스쿼트를 할 때는 죽을 것 같았는데, 지력+1의 효과를 보고 나니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단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건 그저 '필라테스 이용권 1회'를 사용한 것뿐이다. 그곳엔 이런 것 말고 어마어마한 효과를 지닌 '완제품'들이 수북하지 않은가?
-으아! 배고파!
-밥이다! 밥!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냐!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을 빠져나갔다.
'오늘처럼 시간이 빠르게 간 건 처음이야.'
공부에 미친 놈들은 하루가 24시간도 부족하다고 하더니 그걸 오늘 내가 체감했다.
식당으로 가면서도 나는 생각했다.
'내가 가진 290포인트로는 당장 뭘 살 순 없어. 그렇다고 계속 모아 봤자 언제 물건을 살 수 있을지 기약이 없겠지.'
쓸 만한 것들은 1만 포인트가 훌쩍훌쩍 넘어가니 지금부터 전략을 잘 짜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팔 굽혀 펴기 만 번… 그걸 해야 하는 건가.'
지력의 효과를 봤더니, 체력도 탐이 난다. 문제는 스쿼트처럼 팔 굽혀 펴기 또한 죽을힘을 다해야 할 거라는 것이다.
부르르.
생각만으로도 절로 오한이 든다.
그때였다.
투욱.
누가 내 등을 손으로 두드렸다.
스윽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키 컸네?"
예원이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