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화
가방을 챙겨 등굣길에 나섰다.
알람 때문에도 그렇지만, 머릿속이 뒤숭숭하니 그대로 집에 있을 순 없었다.
'거짓이 아니란 건 확실한데….'
아침에 미션이 오지 않았다면, 어제 일은 애써 웃으며 황당했던 꿈쯤으로 치부할 수 있었겠다.
하지만 지금은 둘 중 하나였다.
이 모든 것이 진짜든, 아니면 내가 미친 거다.
'이게 멈추진 않을 것 같은데.'
어제, 그 끔찍한 몰골이었던 고블린을 떠올리면 다신 가고 싶지 않았지만, 알림은 쉬지 않았다. 나를 몰아치는 것 같달까? 게다가 미션 자체가 필라테스라니 어제완 다르지 않을까란 안도감도 든다. 필라테스 하면 여자들이 예쁜 몸을 만들기 위해 하는 그런 운동 아닌가? 그게 복싱이라거나 주짓수 같은 거였다면 진지하게 정신과부터 갔을 수도 있겠지만….
'이따 가 보면 알겠지.'
학교로 향하며 내가 파악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게 필라테스 이용권이 있다는 것, 그리고 50p가 있다는 것.
'그 총….'
아직도 방아쇠를 당길 때의 감각이 생생하다. 탄창이 필요 없는 소총이라니. 과연 그런 것이 실존한다면 그 값어치가 얼마나 될까?
1억? 10억?
문득, 유리 벽 속에 있던 수많은 물건이 생각났다.
'그것들을 얻을 수 있다면….'
하나만 팔아도 평생 놀고먹을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다. 완전 로또 아닌가?
'인생을 바꿀 수도 있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학교로 향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도민준!"
여전히 발랄한 녀석이 내게 다가오며 낄낄 웃었다. 이제 녀석의 이름을 안다.
박인성.
불과 일주일 만에 반 아이들의 전화번호를 다 딴 어지간히 미친놈이다.
"어제 레이싱 봤어?"
"그건 또 뭔데?"
"헐, 그것도 모르냐? 넌 대체 어떤 나라에서 사는 거야? 집에 TV도 없어?"
"TV 안 본 지 오래됐어."
"말도 안 돼!"
녀석은 경악스러운 듯 말을 쏟아 냈는데, 녀석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 가야 자동차 그룹이 세계적인 자동차 경주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뭐?
그건 예원이가 K스타 오디션에 나갔다고 하는 것보다 내겐 더 관심 밖의 얘기였다.
어쨌든 나는 교실에 도착해 내 책상에 앉았다.
"…."
이내 수업이 시작됐지만, 내 머릿속엔 온통 필라테스에 관한 것뿐이었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급식을 먹는 재미 외엔 특별한 이벤트가 없을 시간대였건만, 꿈처럼 예원이가 내게 다가왔다.
-예원아!
-예원아, 있잖아!
순식간에 우르르 예원이의 곁에 모여드는 아이들 사이로 예원이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안녕?"
수줍게 말을 건네는 예원이를 보며 아이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뭐야?
-쟤들 원래 아는 사이였나?
"어…. 안녕?"
나도 얼결에 인사를 했는데, 예원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살짝 고개를 숙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젠 고마워…."
이 짧은 말로도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예원인 싱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모든 아이들이 다 이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리로 가서 앉은 예원이 주변으로 아이들이 또 모여들었다.
-예원아, 쟤 알아?
-응, 조금.
-예원아, 밥은 먹었어?
-응, 먹고 왔어.
-오늘도 일찍 가? 끝나고 우리랑 로제 떡볶이 먹을래?
-어쩌지? 미안해. 6시까지 보컬 연습 가야 해.
예원이는 이미 우리 반에선 연예인이나 다름없었다. 내게 관심을 주는 것은 고마우나 상황으로 보면 달갑지만은 않은 상황. 나는 멋쩍게 얼굴을 돌렸다.
예원인 그새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재능마켓이라….'
온통 그곳으로 가득 찼다.
누구 하나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예원이가 하루아침에 인생이 바뀐 것처럼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알게 된 또 하나의 사실.
'어제 거기서 나왔을 때,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았었어.'
경황이 없어 급히 나오긴 했지만, 건물을 빠져나왔을 때 분명 느꼈다. 그 안의 시간이 멈췄었다는 걸.
'거기 주인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과학이나 상식 같은 거론 설명할 순 없어. 하긴 따져 보면 내가 과거로 돌아온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지.'
게다가 고블린이라니.
이걸 누구한테 어떻게 증명하나?
나 역시 고블린이 그렇게 생겼다는 걸 처음 알았는데.
'아직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고심 끝에 내린 결론.
'가슴이 뛰어!'
무감각했던 내 인생에 활기가 생길 기회, 이건 어쩌면 쥐뿔도 없던 내 인생의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
.
.
.
강남역 5번 출구.
평생 와 보지 않았던 곳에 이틀 연속으로 출근 중이었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한결 익숙해졌다고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 진짜 많구나.'
퇴근 시간이라서 그런지 인파가 어마어마했다. 어제도 이랬던 것 같은데, 사람 마음이 참 신기한 게 오늘에서야 이런 것들이 보였다.
'출출하긴 한데.'
붕어빵 노점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돈이 없었다.
엄마가 챙겨 준 용돈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 얼마의 돈도 여길 오가는 차비로 쓰고 있었으니 붕어빵 한 개 사 먹을 여유도 없었다.
'현실은 여전하네.'
젠장.
치킨을 못 먹던 미래나, 붕어빵을 못 먹는 지금이나.
혹 나중에 아이템 중 하나라도 얻을 수 있다면 이런 고민쯤은 안 해도 되지 않을까?
'그 소총.'
그런 거 하나만 있으면 대체 얼마의 값에 팔 수 있을까?
"후우…. 일단 가 보자."
나는 브라칸 빌딩을 보며 마음을 다잡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511호.
어제와 같은 곳.
여전히 【필라테스】라고 적힌 간판을 앞에 두고 절로 침을 삼켰다.
'설마 오늘은 더 심한 괴물이 나오진 않겠지?'
미션 자체가 어제완 달리 필라테스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로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감이 엄습했다.
'됐어, 여기까지 왔잖아!'
이럴 때는 그냥 부딪혀야 한다.
나는 두려움을 이기려고 꾸욱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어제처럼 덜컥,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나도 모르게 복도를 둘러봤지만, 오늘도 역시 아무도 없었다.
'에잇,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눈을 질끈 감고,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익숙한 알림이 울렸다.
【재능마켓에 입장하셨습니다.】
【50p를 보유했습니다.】
【필라테스 이용권이 1장 있습니다.】
드드드드드득.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저번처럼 벽이 움직이며 유리가 나타났고, 그 안엔 수많은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
오늘은 서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모든 것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가니 아까 아래서 보았던 그 인파가 그대로다.
'여차하면 이걸 깨고 탈출할 수도 있을까?'
이 유리창이 부서질진 모르겠지만, 뭐든 염두에 둬야 했다.
'이게 다인데….'
신중하게 살핀다고 해도 원룸이나 다름없는 작은 공간에 필라테스 기구까지 들어차 있어 공간이 넓진 않았다.
계단을 보았다.
까치발을 들면 복층 너머가 보이긴 하는데, 더 안쪽은 계단을 올라가야 보일 듯했다.
'올라가 볼까?'
어제는 운 좋게 총을 선택해서 고블린을 상대했지만, 만약 궁지에 몰릴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도주로 정도는 익혀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게 계단을 오르려고 발을 올리는데,
"…?"
【허락되지 않은 장소입니다.】
몸이 자연스럽게 투웅 밀려났다.
이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훅, 떠민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허락되지 않은 장소?'
알 수 없는 것이 또 생겨 버렸다.
별수 없이 몸을 돌려 상품이 진열된 곳으로 갔다. 안 되는 걸 억지로 하기보다는 그 시간에 다른 정보를 얻는 게 좋다는 판단이다.
"진짜 많구나…."
어젠 이래저래 유심히 보지 못했던 상품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필라테스 이용권을 빼면 가장 싼 게 500p네.'
【활력 드링크
탈진했더라도 마시기만 하면 체력 UP!
일회용.
부작용 없음.】
쓰여 있는 내용이 정말 말도 안 되는 허황된 말뿐이었다. 어제 겪은 일을 생각하면 거짓이라고 하기도 우습지만, 믿기도 쉽지 않다.
"흠…."
주로 상품들은 이 드링크처럼 일회성 상품으로 500~1,000포인트 사이의 가격대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허어!"
어제 내가 썼던 【탄창이 필요 없는 소총】은 무려 13만 포인트였다. 다시 저걸 쓸 수 있을까 의문이 들 때쯤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근데, 필라테스는 뭐란 거지?'
누가 설명을 해 줬으면 좋겠지만, 여긴 인기척조차 없다.
그런데,
【필라테스 이용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알림으로 반응이 돌아왔다.
'어제 같은 건 아니겠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나는 결심을 굳히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사용할게."
【운동 효과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
【운동에 따라 체력, 지력, 근력, 회복력, 면역력, 순발력 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
운동하면 체력이나 근력이 오르는 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뭐? 지력? 회복력? 거기에 이런 정적인 운동을 하는데, 순발력이 오른다고?
기막혔지만, 다음 음성에 절로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현재 귀하에게 허락된 종목은 두 가지입니다.】
【스쿼트 10,000회. 5초간 바른 자세 유지 필수. 지력+1 획득 가능.】
"…뭐?"
듣자마자 절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는데,
【팔 굽혀 펴기 10,000회. 흐트러짐 없는 자세 필수. 체력+1 획득 가능.】
"…!"
들을수록 기막힌 소리에 나는 경악했다.
필라테스라고 하지 않았나?
어이가 없어 입만 떡 벌리고 있는데, 마지막 음성이 쐐기를 박았다.
【수행하지 않으면 마켓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
.
.
백만 스물하나.
백만 스물둘….
광고에서 한 번쯤 들어 봤을 법한 이 말은 그걸 하는 녀석이 건전지니까 되는 거다.
"망했다…."
사람이 스쿼트나 팔 굽혀 펴기를 어떻게 10,000개를 하나? 물론 운동에 이골이 난 사람들은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머리털 나고 단 한 번도 이런 것들을 진지하게 해 보지 않았다.
'못 나간다니….'
충격이다.
나는 지금 이 골방에 기약 없이 갇혔다는 뜻 아닌가?
"후우…."
외면하고 싶은 현실에서 잠깐 도피할 겸 나도 모르게 유리 벽 속 상품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투시 안경
사물을 투과하여 속을 볼 수 있다.
깨지면 고칠 수 없다.
가까운 거리에서만 효과가 나타난다.
가격: 31,000p.】
이런 거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크흠! 내가 남자라서 그런 건 아니다. 아주 다양한 곳에서 쓰일 수 있을 거다. 가령 지진으로 구조 활동을 할 때라든가….
【절대자의 시계
5초간 시간을 멈출 수 있다.
소유자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재사용 대기 시간 24시간.
가격: 64,000p】
"이것들이 다 정말이라면 대박이지만…."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갈 수 없다면…."
무용지물.
이미 문은 죽자고 열어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
"그래, 하자, 해."
나는 겉옷을 벗고 유리 벽에서 돌아섰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랬나? 마냥 즐겁진 않았지만 들어온 이상 여기서 나가려면 두 가지 운동 중에서 하나는 완수해야 한다.
"팔 굽혀 펴기… 스쿼트라…."
뭐가 쉽다는 건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고, 한두 번은 어느 쪽이 더 나을 순 있어도 그게 무려 10,000번이라면 얘기가 다를 것이다.
"흐음, 대충 고를 수도 없고…."
이런 문제로 이렇게 심각하게 서 있을 줄은 몰랐지만,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판단해야 했다.
"체력이랑 지력이라."
이렇게 된 거 우선, 보상을 먼저 고르자.
무슨 일을 할 때, 원동력은 매우 중요하니까.
기준을 정하고 나니, 다음 문제가 생겼다. 앞으로도 이런 운동이 계속해서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체력이 중요할 텐데.
'하지만 꼭 그렇게만도 볼 순 없지.'
어떤 일이 닥치면 그걸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선 머리도 따라 줘야 할 것이다. 【서브 미션】이 있는 걸로 봐선, 무조건 체력만 있다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것 같진 않다.
"몸이냐, 머리냐인데…."
다른 사람이라면 뭘 고를까?
모르겠다.
순간 불현듯 드는 생각이라면, 지난 인생에서 뼈저리게 받아 왔던 설움이었다.
공부를 잘하고 싶다!
얼마나 간절했던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포기 상태였는데, 조금이지만 희망이 생기지 않을까?
'체력은 앞으로 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붙을 수도 있는 거고.'
팔 굽혀 펴기든, 스쿼트든 이걸 10,000번 하면 근육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좋아, 머리로 간다."
【스쿼트 10,000회를 선택하셨습니다. 5초간 바른 자세 유지 필수. 지력+1 획득 가능.】
음성이 들리자마자 후웅-! 소리와 함께 방의 중심에 빛나는 원이 생겨났다. 누가 봐도 저곳에서 스쿼트를 하라는 거였다.
"후우, 후우…."
조명 장치도 없는데, 스스로 빛을 내는 바닥을 보면서 나는 숨을 고르며 그곳으로 걸어갔다.
이제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내게 중요한 건 이 운동을 해낼 수 있는가 없는가였으니까.
'간다.'
나는 빛나는 원 안에서 내가 아는 모든 상식을 동원해서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이어진 알림은 내 자세를 교정시켰다.
'이걸… 만 번 하라고?'
그리고 깨달았다.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건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