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마켓-3화 (3/277)

#003화

강남역 5번 출구 앞.

"…."

처음엔 오지 않으려 했다.

병원으로 갈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1초 단위로 계속해서 머릿속을 울려 대는 이명 때문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마감 시간까지 2시간 58분 13초 남았습니다.】

【마감 시간까지 2시간 58분 12초 남았습니다.】

이렇게 말이다.

지금도 알람처럼 머릿속을 후벼파는 목소리 때문에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뭐가 돼도 되겠지란 생각에 높이 선 건물을 바라보았다.

강남역.

여긴 처음 와 봤다.

40년을 살았어도 다니는 곳만 다니면 이런 별천지는 모르고 산다.

【마감 시간까지 2시간 58분 8초 남았습니다.】

"신종 보이스 피싱인가? 근데 어떻게 이렇게 하는 거지? 젠장…. 모르겠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 알람 때문에 무작정 건물에 들어가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배달을 많이 해 본 나로선 브라칸 빌딩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1~4층엔 상가들이 입점해 있는 것 같았고, 그 위는 일반 사무실이나 오피스텔이 있는 것 같았다.

'여기로 가면 되나?'

많은 사람이 평온한 얼굴로 건물을 드나들고 있었다. 코피는 멎었지만 유독 나만 안색을 풀지 못했다. 그보다 더한 괴롭힘에 발길은 더 빨라졌다.

5층에서 내려 한 곳으로 걸어갔다.

'511호. 여긴가?'

나는 문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뭐야, 이건?"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문엔 아주 커다란 간판이 붙어 있었는데,

"…필라테스?"

들어는 봤지만 생소한 단어.

그게 눈에 딱 들어왔기 때문이다.

꿀꺽.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을 울려 대던 알람이 멈췄다는 걸 깨달았다.

끼이이이이익.

문이 열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현관에 사람은 없었다.

어떻게 열린 거지?

"실례합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재능마켓에 입장하셨습니다.】

'뭐? 무슨 마켓?'

쿵!

절로 닫히는 문소리가 오싹하다.

"…?"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급히 몸을 돌려 문을 열었지만,

"…이런…."

손잡이를 아무리 돌려 봐도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

【튜토리얼에 참가하셨습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여기까지 오는 내내 머릴 지끈거리게 한 그 알람과 정확히 같은 음성이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일단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언제든 도주할 수 있도록 신발은 벗지 않았다. 그러면서 안쪽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

필라테스라는 운동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저 기구들은 그 운동을 하기 위한 것들인가?

오른쪽엔 화장실인 것 같은 문이 있었고, 왼쪽엔 작은 싱크대가 있었다. 이것들을 지나쳐 조심히 넓은 공간으로 나서니 자연스럽게 내부 전체를 돌아보게 되었다.

"…."

복층이다.

바라보고 있는 창문을 기준으로 왼쪽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역시나 사람은 없었다.

'튜토리얼이 뭐지? 면접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게 게임 같은 곳에서 쓰는 말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듣게 된다면 모두가 나처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모르겠어.'

벽엔 각종 기구가 걸려 있었는데, 느닷없이 벽이 스르륵 밀렸다. 왜, 책 대여점에 있는, 미닫이 책장처럼 말이다.

"…!"

레일도 없는데 움직이는 벽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할 말을 잃게 했다. 새로 나타난 벽은 유리로 막혀 있었고 안엔 얼추 수백 개가 넘는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게 꼭 자판기 같기도 하고 금은방에 진열된 귀금속들 같기도 하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조심히 안쪽을 살피다가,

'저건… 총이잖아.'

움찔!

어지간해선 놀라지 않는 나였지만, 계단에 바짝 붙을 정도로 긴장했다. 물론 가짜일 수도 있겠지만, 내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그 마음을 읽었을까?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곧 튜토리얼이 시작합니다. 무기를 선택하세요.】

"무기라고…?"

내가 미쳐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 어쩌면 나는 그 싱크홀에 빠져 죽었고 이런 꿈을 계속 꾸고 있는 걸까?

하지만 꿀꺽, 간신히 넘어가는 침이 이게 장난이 아니란 걸 알려 줬다.

【원하는 무엇이든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계속 울리는 이 음성은 내게 말한다.

이건 꿈이 아니라고.

나는 조금씩 벽 쪽으로 다가갔다.

유리 안쪽을 바라보니 물건들 아래에 깨알같이 적힌 것들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하나를 읽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향수…. 지속시간 30분. 가격… 10,000포인트?"

사람의 마음을 읽어? 그게 가능해?

어이가 없어서 옆을 보았다.

설마 저건 칼인가?

아니, 그냥 칼이라고 하면 주방용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는데, 저건 검이었다. 게임에나 나오는 그 검.

【용사의 철검

예리하고 강력한 검

가격: 50,000p.】

용사라는 단어가 이렇게 낯설 줄이야.

그뿐만이 아니었다.

【철벽의 방패】, 【신속한 부츠】, 【투명 망토】, 【뚫리거나 타지 않는 장갑】 같은 여러 물건들을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듯이 음성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튜토리얼 미션!

포악한 고블린을 죽여라.

성공 조건: 고블린 사망.

실패 조건: 플레이어 사망.

보상: 50P.

확률적으로 포악한 고블린이 드롭하는 아이템을 얻을 수도 있다.】

"고… 블린?"

영화에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아, 그건 골룸인가?

【무기를 선택하세요. 곧 튜토리얼이 시작합니다.】

"…!"

생각할 시간이 더는 없었다.

음성이 끝나는 그와 동시에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고,

-크르르르르르르….

괴상한 소리와 함께 짐승의 누린내가 저쪽에서부터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그건 시골의 코를 찌르는 소똥 냄새보다 천배는 더 강하고 거북했는데,

"마, 말도…."

그보다 심각한 것은 태어나 이렇게 오싹한 적은 처음이었다.

"…안 돼…."

사람이 맹수와 마주하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 것이다.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만 봐도 무서운데, 만약 울타리조차 없는 산중에서 맹수를 마주한다면 어떨까?

딱 지금의 내 기분일 것이다.

심지어 매일 쓰는 화장실이란 일상적 공간에서 비현실이 튀어나오다니, 이게 말이 되나?

나는 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40년을 산 경험 따윈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끄르르륵?

아까 내가 현관을 지나온 것처럼 화장실을 나온 고블린 한 마리는 이쪽을 바라보며 기하학적으로 대가리를 비틀었다. 녀석도 당황했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그러면서도 나를 경계하며 거리를 두었다.

-끄륵?

'미친….'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이 모든 게 거짓일까?

아니면 내 뇌가 정말 이상해진 건가?

그런데 그때,

-킥, 키이익!

방에 단둘뿐이라는 걸 확신했는지 녀석이 어깨를 낮추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어 내 정신을 차리게 하는 알림이 다시 울렸다.

【무기를 선택하세요.】

"젠장!"

이러다간 진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나를 자극했다. 나는 아까 보았던 것 중에 가장 강력할 것 같은 것을 떠올렸다.

그런데 유리 벽 속에 있는 물건을 어떻게 꺼내지?

에잇, 모르겠다.

"타, 탄창이 필요 없는…!"

나는 다짜고짜 창문 쪽으로 뒷걸음질 치며 외쳤다.

"소총!"

급히 뒤를 돌아보니 바닥과 천장을 잇는 통창이 있었다. 밖이 다 보이는 통창 밖으론 거리를 지나는 사람과, 맞은편 건물의 창문들이 빼곡하게 보였다.

아니, 이 괴리감은 뭔데!

바깥 세상은 너무도 평범해서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더 괴이하기만 하다. 도와 달라고! 살려 달라고 소리치면 저들이 알아들을 순 있는 걸까?

【무기를 선택하셨습니다. 선택하신 무기는 훈련이 종료되면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때, 스스스스스.

내 앞에 안개 같은 것이 생성되더니, 그것은 이내 물질로 구체화되었다. 내가 외친 그 소총이었다.

-끄르르르르르?

고블린이 나를 보며 얼굴을 찡그리는 게 보였다. 나는 빠르게 손을 뻗어 소총을 잡았다.

【탄창이 필요 없는 소총을 획득했습니다.】

"…!"

금속의 차가운 감촉과 총을 소지했다는 이상한 안도감이 심장을 뛰게 했다.

고블린은 나를 관찰하듯 보다가 내 손에 들린 총이 위협적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씨익 웃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별거 없단 판단을 마친 모양이다.

-끄르르르르.

놈은 허리춤에서 초승달처럼 휜 칼을 뽑았다. 그러며 자기 것이 더 멋지지 않냐? 라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어… 어떻게 하지…?'

내 쪽으로 걷는 고블린을 보며 나는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이제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장난이라 해도, 아니 이것이 꿈이라고 해도 난 뭐라도 해야 했다.

'이걸 쏴?'

더 물러날 곳은 없었다.

20년 가까이나 지났지만, 군대에서 총을 다뤄 본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어깨에 개머리판을 단단히 고정하고 방아쇠에 부들거리는 손가락을 댔다.

총구를 고블린에게 향하며 말이다.

"더… 다가오면 쏜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애당초 저놈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저 고블린과 싸워야 한다는 건 확실했지만, 방아쇠를 바로 당길 순 없었다.

총으로 누굴 쏜다는 게 말처럼 쉽냔 말이다.

-키륵, 키륵!

고블린이 우습다는 투로 내게 칼을 꼬나들며 또 걸어왔다.

"머… 멈춰!"

늑대나 호랑이가 앞에 있다면 놈이 도약할 수 있는 거리 안에서 어떤 공포를 느낄 수 있는지 나는 처절하게 느끼는 중이었지만, 녀석의 감정은 나완 정반대인가 보다.

주르르륵.

쩍 벌어진 아가리에서 흘러내리는 침만 봐도 녀석에게 내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꺄르르르르륵!

그리고 그 순간, 마치 명랑한 아이가 질러 대는 소리처럼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녀석을 향해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놈이 든 칼날, 그 섬뜩함은 주저할 틈을 주지 않았다.

"으아아아아!"

비명처럼 고함이 절로 터졌다.

누가 들었다면 절규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두두두둑!

총소리는 탕! 탕! 나는 게 아니다. 실제론 그보다 더 둔탁하다. 그게 고막을 찢어 버릴 것 같다.

두두두둑-!

처음 조준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총구를 돌리며 다시 방아쇠를 당겼을 때, 내게 바짝 다가왔던 녀석의 몸에 총알들이 박혀 들었다.

-커어어어어어-?

나는 옆으로 급히 몸을 피했다.

콰당!

달려오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고블린이 벽에 처박혔다.

그리고 이내 축 늘어졌다.

꿈틀, 꿈틀.

놈의 근육이 경련하며 손가락 끝이 움직였다.

"헉, 헉…."

심하게 뜀박질을 한 것도 아닌데, 긴장 때문인지 절로 호흡이 가빠졌다.

"맙소사…."

무언가를 죽였다는 감정이 이렇게 혼란스러운지 처음 알았다. 내가 총을 쏘지 않았다면 반대의 상황이 되었을 것을 알면서도 현실감이 없어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

영화기는 한데, 너무도 생생해서 소름 끼치는.

그때였다.

【축하합니다!】

【튜토리얼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50p가 지급되었습니다!】

【보유 포인트는 언제든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스스스스스….

손이 점차 허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과 동시에 창에 처박혔던 고블린의 몸도 안개처럼 변해 갔다.

"…."

이 모든 일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한 곳을 바라보게 된다. 고블린이 있던 자리, 무언가 반짝이며 내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저게 뭐지?'

분명 아까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주변을 주시하며 창 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반짝이는 것은 아주 작은 구슬처럼 생겼는데 까맣고, 반질반질했다.

【아이템을 발견했습니다!】

아이템?

【획득한 아이템은 자동으로 귀속됩니다.】

종잡을 수 없는 일이 연달아 일어나니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마저 들기 시작한다.

'아이템이라니…. 하!'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나는 창문 밖 사람들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열리지 않는 현관문을 보았다.

'어떻게든 여기서 나가야 해.'

아까 그 총소릴 들었다면 경찰이 올지도 모른다.

서둘러 몸을 낮춰 반짝이는 구슬을 잡았다.

【아이템을 귀속하시겠습니까?】

'뭐든 하라고!'

【아이템을 귀속하셨습니다.】

【필라테스 이용권 1회를 얻었습니다.】

"…뭐?"

아까 고블린이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만큼 어이가 없었다.

"필라테스…?"

【튜토리얼이 종료됩니다.】

그 음성과 동시였다.

벌컥!

현관을 막고 있던 철문이 열렸다.

【재능마켓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적 포인트 50.】

【재능마켓 출입은 오전 6시에 갱신됩니다.】

【이전 미션을 수행하지 않으면 새로운 정규 미션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재능마켓은 하루 한 번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거기까지 듣곤, 현관을 향해 뛰었다. 저게 다시 닫히면 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본능적으로 진열대 안의 한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게 특별했다기보다는 다른 물건들에 비해서 0이 가장 많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십… 백천만… 십만… 백만, 천만, 일… 억?'

무려 1억 포인트짜리 상품.

생긴 건 흔한 금반지였다.

【모두가 탐내는 반지

특별한 방법으로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설명을 읽어 봐도 저게 왜 저렇게 비싼지 모르겠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헉, 헉…."

복도로 나오니 긴장감이 확 풀렸다.

끼이이이익.

조금씩 닫히는 문을 보면서도 조금 전에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실감조차 나질 않았다.

그리고 쿠웅.

문이 모두 닫혔다.

【필라테스】라고 문에 붙은 간판을 보며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고블린이 나오는 필라테스 학원이 세상에 대체 어딨나?

멍하니 닫힌 문을 보는데….

"학생? 괜찮아?"

목소리에 옆으로 얼굴을 돌렸다.

저 끝에서 아저씨 한 분이 나를 보며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아, 네…. 괜찮습니다."

갑자기 현실감이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

.

.

어제는 녹초가 되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푹 자고 싶을 만큼 정신적 충격도 컸기도 했고, 모든 걸 떨쳐 버리고 싶은 욕구도 강했기 때문이다.

아침엔 그냥 학교도 가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미션: 필라테스 1회를 완성하라.】

【서브 미션: 누군가의 진심을 얻어라.

보상: 50p.】

【필라테스 1회 이용권은 재능마켓에서 100p로 살 수 있습니다.】

오전 6시가 되자, 그 어떤 알람보다 강력한 음성이 머릿속을 뒤흔들며 나를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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