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화
점차 교정으로 다가올수록 선명하게 보이는 소녀의 얼굴은 시선을 뗄 수 없게 했다. 바람에 살랑이는 머리칼은 그 애 옆에서 춤을 추는 요정들 같았는데,
'요정이라니, 미친….'
내가 이딴 단어를 떠올리다니 기가 막힌다. 족발이나 닭똥집도 아니고….
-앗! 예원이다!
-와아아아!
-예원이 왔다!
-어디? 어디!
아이들 몇 명이 창가에서 외치자 다른 아이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쟤가 예원이구나.'
무려 20년도 더 된 기억을 더듬어 찾아보지만 역시나 모르겠다. 그저.
'저런 애가 있긴 있었지.'
학창 시절 기억이란 게 다 그렇지 않나?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애'가 있었다, 정도만 생각나는. 게다가 나완 전혀 상관없는 애들이었다. 선택받은 사람들만 어울릴 수 있는 부류. 나도 녀석들에겐 마찬가지겠지.
5분쯤 지났을까?
교실로 예원이가 들어왔다.
-예원아!
-안녕?
-어제 방송 잘 봤어! 대단하더라!
-본선 갔으니까 우승까지 달리자!
-언제 그런 걸 준비한 거야? 깜짝 놀랐잖아!
"…고마워. 열심히 할게!"
수줍게 답하는 예원이의 미소는 모두를 들뜨게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반 애들 전부 예원이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애다.
그보다,
"후우…."
잠깐 맑아졌던 정신이 다시 혼탁하게 변했다.
막상 학교에 오긴 했는데, 교과서를 들춰 보니 상황은 최악이었다. 원래도 공부를 못했던 나인데, 지금은 아예 까막눈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당연하지 않나?
20년 전에도, 또 그 이후 20년도 공부완 담쌓고 살았는데, 이걸 어쩌나?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누구나 입학 초에는 설레는 마음으로 친구 사귀기에 바빴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싱숭생숭한 마음이 더 컸다. 딱히 누구랑 가까워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솔직히 말하면 귀찮은 것도 사실이었다.
한창 이성에 눈뜰 나이라지만, 이미 마흔을 솔로로 살았으니 더 눈뜰 것도 없다.
금요일 오후.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향하는 길. 다른 아이들은 삼삼오오 학원으로 향했지만, 나는 알바 자리를 알아봐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며칠 공부에 집중하려고 해 봤지만, 역시나 그쪽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있는 것 같다.
'하루 4만 원씩만 벌어도 주말에 좀 오래 하면 한 달에 백만 원은 모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최소 일 년에 천만 원이고 졸업할 때쯤엔 삼천 정돈….'
그 삼천만 원으로 사회에 나가서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없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싶다. 전처럼 엄마가 암이라도 덜컥 걸릴 수 있으니 그 전에 대비를 해 둬야 했다.
'근데… 그런다고 인생이 바뀔까?'
문득, 나는 걸음을 멈췄다.
"후우…."
요즘 이렇게 한숨 쉬는 게 버릇이 되었다. 선생님은 한숨 쉴 시간에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라고 하겠지만, 저렇게 지는 해를 보고 있자면 가슴이 묵직하다.
집에 들어가도 어차피 아무도 없다. 내가 9살 때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신 뒤로 어머니는 식당에 나가셨다. 오늘도 어머니는 10시나 되어야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실 것이다.
'그래, 몰래 알바라도 하자.'
어머니가 아는 날엔 집안이 발칵 뒤집히겠지만, 이제는 나도 가장이란 걸 안다. 예전엔 철부지였을지 몰라도 이젠 내가 조금이라도 빨리 자립해야 어머니가 편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대학 따위….'
나는 놀이터로 걸어갔다.
그네에 앉아 하루를 곱씹었다.
반 애들은 벌써부터 '너, 어느 대학 갈 거야?' 속닥거렸다. 마치 마음만 먹으면 당장 갈 수 있기라도 하듯 말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이제 나는 알았다.
게다가 나는 작은 원동력조차 없었다. 나락까지 떨어져 실패를 맛보았으니, 무기력하기만 할 뿐.
'역시나 이번에도 과분하겠지.'
모두가 이렇게 사는 걸까?
아니다.
그저….
현실을 직시했을 뿐.
그러다 문득,
"으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완전히 어두워진 주변을 보며 그네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집으로 향하는데, 저쪽에 두 사람이 보였다.
"…?"
거리가 제법 됐지만, 실랑이를 벌이는 걸 알 수 있었다. 괜히 시비라도 걸릴까 싶어 고개를 돌린 채 슬쩍 눈치만 살피며 발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예원이…?'
모자를 눌러쓴 여자애.
그 앨 못 알아볼 순 없었다.
-싫다고 했잖아!
-야, 그래서? 이렇게 끝내자고?
-우리가 언제 시작한 적이라도 있었어? 갑자기 찾아와서 이러면 나더러 어쩌라고?
-하? 잘나간다, 이거냐?
-너야말로! 방학 내내 연락 없다가 이러는 이유가 뭔데?
목소리가 들리니, 대충 상황 파악이 됐다.
-흥분하지 말고, 얘기 좀 더 하자.
-난 너랑 할 얘기 없다니까?
-짜증 나게 할래?
그런데 그때,
실랑이가 격해지더니 녀석이 예원이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
나는 더 생각할 새도 없이 빠르게 달려들어 녀석의 팔을 잡았다.
"…뭐야?"
녀석은 당황한 듯 나를 보았다.
돌아서서 있어서 몰랐는데, 나보다 키도 크고, 참 잘생겼다.
"손부터 놓지."
"넌 뭐냐니까?"
"같은 반 친구."
"…뭐라고?"
녀석이 기막힌 듯 나를 보며 입을 떡 벌릴 때, 예원이가 잽싸게 손목을 뿌리치고 내 뒤로 이동했다.
"진예원! 뭐야? 새 남친이라도 생긴 거냐?"
녀석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며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픽 웃었다. 그 눈빛에서 '고작 이런 놈이랑?' 생각이 읽혔다.
"너랑 할 얘기 없다니까! 자꾸 이러면 엄마한테 전화할 거야!"
예원이가 핸드폰을 무기처럼 꺼내 들자 녀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넌, 어떨지 몰라도 난, 안 끝났다. 그것만 알아 둬."
녀석은 이를 갈 듯 그렇게 말하며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더니 내 팔을 어깨로 툭 쳤다.
"또 보자."
위협적으로 말하며 저쪽으로 걸어가는 녀석을 보며 예원이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아! 진짜 미쳤나 봐. 왜 저러는 거야!"
진저리가 난다는 듯 몸을 떨던 예원이가 나를 보며 말했다.
"고마워, 민준아."
"…?"
어라? 내 이름을 아나?
예원이가 웃으며 말하는데,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 더 혼란스러웠다.
"옛날이랑 똑같네. 역시 멋있어."
"…뭐?"
옛날이라고?
의미심장하게 웃던 예원이가 갑자기 손뼉을 마주치더니 말했다.
"앗! 늦었다! 엄마 기다리시겠다. 들어가 봐야 해. 학교에서 봐!"
"어? 어…."
옛날?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멍했다. 예원이가 아파트로 들어가자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쟤도 여기 사는구나….'
근데 옛날이라니? 무슨 뜻이지? 우리가 만났던 적이 있었나? 아무리 떠올려도 명확하게 생각나는 게 없었다.
'됐다. 그거 생각해서 뭐 한다고.'
몇 걸음 걸어 가방을 고쳐 메며 돌아서는데, 우뚝 한 사람이 내 앞에 있었다.
"…여어."
아까 그 녀석이었다.
"안 끝났다고 했지?"
뱀처럼 웃는 녀석의 눈동자엔 폭력에 익숙한 자신감이 한껏 가득 차 있었다.
"따라와, 새끼야."
'하아. 결국 이렇게 되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이런저런 시비에 늘 휘말렸었다. 남자애들은 머리가 크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과시 욕구가 생겨 희생양이 필요해졌다. 아버지 없는 나는 녀석들에게 좋은 먹잇감으로 보였을 것이다.
-지금 뭐라고 했냐? 안 해?
-햐! 이 새끼 돌았네?
-죽고 싶냐? 도민준!
그래서 싸웠다.
격투기를 배웠거나 운동 신경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냥 당하고 사는 건 돌아가신 아버지와 힘겹게 식당 일을 하는 어머니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었나 보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독한 새끼!
-이런 독종은 처음 본다!
차츰 나는 녀석들의 사정권에서 벗어났는데, 그게 중학교 졸업할 무렵이었던 것 같다.
"너, 예원이랑 무슨 사이냐?"
아파트 안쪽 으슥한 벤치 앞에서 녀석이 말했다. 여긴 경비 아저씨도 잘 오지 않는 곳이다.
하아, 미치겠네.
이젠 이런 애송이도 상대해야 하는 건가?
"같은 반 친구라니까."
"겨우 그거라고?"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이 입고 있는 교복, 인근 사립고등학교의 디자인이다. 최소 중산층 이상만 갈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그런데?"
전이었다고 해도 그냥 당하진 않았겠지만, 원래의 성격에 40년을 거친 밑바닥 인생으로 살아 본 경험까지 녹아 있었으니 이런 철부지의 눈빛이 무서울 리가 없다.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내가 아니꼬운지 나를 지그시 노려보던 녀석이 냅다 손을 뻗었다. 아마 따귀를 치고 기선 제압을 하려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에 순순히 맞을 내가 아니었다.
덥석.
내가 녀석의 손목을 잡았다. 이런 전개를 예상하지 못했던지 녀석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
"…."
나는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걸 느끼고 손목을 내팽개치듯 놓았다. 뒤로 밀쳐진 녀석이 겨우 중심을 잡았다.
"말로 할 때 가라."
"이 씨×…."
위압적으로 말하는 나를 보며 녀석이 욕을 내뱉었다. 자기가 상대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낀 모양인데, 한꺼번에 일곱 명과 싸웠던 적도 있는 내겐 긴장감조차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다구릴 맞은 거였지만….
"가라니까?"
내가 손을 치켜들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서자 녀석이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본능적으로 도망친 것이 부끄러웠는지 녀석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을 때 나는 웃으며 말했다.
"꼭 까 봐야 아는 건 아니잖냐."
"…이 새끼, 어디서 좀 쳤나 본데."
내 말투와 여유에서 녀석도 그걸 느꼈는지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어 댔다.
나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그렇게 녀석을 지나치려고 했다. 애들 싸움에선 이렇게 한번 기세에서 밀려 버리면 끝이다. 객기나 오기로 달려드는 녀석들도 간혹 있지만 그래 봐야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역시 말뿐인 놈이다.
병신, 주먹부터 나왔어야지.
"야."
"왜… 왜?"
나는 녀석의 바로 앞에 서서 말했다.
"꺼져-!"
기합처럼 터지는 목소리.
"히익?"
녀석이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런 놈이 예원이 근처에 얼쩡거린다는 게 한심하다. 왜 여자들은 이런 놈들에게 끌리는 걸까?
'하긴….'
나라고 뭐 있나….
"…."
나는 자빠진 녀석을 보다가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고 집으로 걸어가려고 발을 뗐다.
그런데,
"…!"
지끈!
현기증처럼 뭔가가 몸을 장악했다.
'왜 이러지?'
나는 오래전부터 고통에 익숙했다.
그걸 참는 건 더 이골이 났다.
모진 놈들과 싸울 때도 그랬고, 열이 펄펄 끓어도 그냥 견뎌 냈다. 괜히 어머니 걱정시키기 싫은 것이 제일 컸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아파도 보살펴 줄 이가 없으니 버티는 게 더 익숙해져만 갔는데….
'집 가서 두통약이라도 먹지 뭐.'
진통제, 내겐 만병통치약이다.
그런데, 길을 돌아 나왔을 때 주르륵….
"음…?"
나는 이질적인 감각에 손을 들어 코 주변을 스윽 닦았다. 손등에 흥건하게 피가 묻는 걸 보며 급히 고갤 들었다.
'젠장, 몸에 문제가 있는 건가?'
갑자기 코피라니?
아까 그 현기증과 관련이 있을까?
"…."
멈췄나?
아까보다는 숨쉬기가 편해지는 것 같은데, 지끈! 또다시 현기증이 밀려왔다.
'아, 진짜 병원에 가 봐야 하나?'
그때였다.
【장소: 서초동 ×××. 브라칸 빌딩 511호. 마감 시간: 18시.】
"…어어?"
천둥처럼 울리는 소리에 내가 미친 건가? 이젠 이명까지 들려?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면접을 미룰 시, 상당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시간을 엄수하세요.】
낯설지만 여성의 음성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음성이 왜 들리냐고?
【예상 불이익: 뇌출혈, 협심증, 암, 심장 마비….】
"허어…."
'암'이라는 말에 심장이 지끈했다.
불현듯 아버지가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누구야? 누가 장난치는 거야?"
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눈을 찌푸렸는데, 경고하듯 음성은 마저 울렸다.
【마감 시간까지 4시간 11분 42초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