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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108)화 (108/108)

108화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정하지 못했지만 시간은 잘 갔다.

적안의 남자는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면 큰일 나는 신생아를 키우는 사람처럼 내 곁을 맴돌았다.

그러면서 그는 내게 자주 말을 걸었는데, 보통은 식사 때 말을 걸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에게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주는 밥은 씹어 삼켰다.

이 방을 나가려면 팔다리를 움직일 정도로는 힘을 회복해야 했으니까.

하여 나는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오면 가만히 받아먹는 새끼 새처럼, 그가 먹을 걸 가져오면 그것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먹어.”

그가 건네는 음식을 오물오물 씹어 넘겼다.

내가 하도 대답을 안 하자, 그는 이제 음식만 가져다주고 가까이서 먹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저기요.”

“어?”

오물거리는 내 입을 보던 눈이 위로 향했다.

말을 걸자 그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앞으로의 계획이 뭐예요?”

“계획?”

“나랑 더 대화해 보고 싶다고 했는데 나는 말을 잘 안 하잖아요. 그러면 계획이 수정됐을 것 같은데, 나 말고 말 많은 사람으로 데려다 놓는다든가.”

“그럴 생각은 없어.”

단호하게 거절하며 날 쳐다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생기면 계획도 늘겠지. 급하지 않아. 넌?”

“…….”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자, 그 역시 이쪽을 오래 응시하다 시선을 돌렸다.

“그런가, 아직 뭔갈 생각하긴 이른가……. 그렇겠네. 마저 먹어.”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편하게 먹으라는 듯 내게서 등을 돌렸다.

하지만 자리를 떠 줄 생각은 없는지, 침대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발끝을 까딱거렸다.

‘데일은 지금 어떻게 있을까.’

요즘 방 안에 앉아서 내가 하는 일은 떠오르는 모든 장면을 짧게 쳐내는 일이었다.

한 가지를 오래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괴로워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내 동료들에 대한 생각이 틈틈이 끼어들었는데,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는 데일이었다.

‘그 남자 또 울고 있을지도.’

데일은 보면 안 그럴 것처럼 생겨서 마음 약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같이 있을수록 나보다 훨씬 선하고 여린 사람인 걸 느끼게 하는 이.

‘배에 탔으려나.’

일이 이렇게 되기 전 우리의 계획은 배를 타고 군도로 향하는 것이었으니까.

사건이 터지기 전, 모든 이들에게 대충의 계획을 설명했을 테니, 혹 데일이 항구에서 떠나지 않고 나와 애런을 기다리고 있다면 모두의 원성을 사고 있을지도 몰랐다.

‘잘못한 것도 없이 참 욕만 먹는 자리란 말이야.’

처음에는 혹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그와 내 동료들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길을 떠나려 했다.

그래서 적안의 남자가 입에 음식을 물려줄 때마다 꾸역꾸역 받아먹었다.

하루빨리 체력을 회복해야 여길 떠나 그리로 갈 테니까.

그런데 현재는 생각이 달라진 거다.

‘나는 가면 안 돼.’

특히나 적안의 남자를 달고서는 말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남자는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니까.

내 동료들한테 보내줄지도 알 수 없지만 보내준다고 해도 분명 따라오려 들 게 분명했다.

사실 그동안 겪은 위협 중 대부분은 실험체를 데려가려는 세력에 의해 일어났으니까.

내가 적안의 남자를 데리고 데일에게 간다면, 당연히 적들은 다시 그곳에 나타날 것이고 그럼 또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른다.

이번엔 누가?

애런이 죽은 것처럼 이번엔 누구의 시체를 밟고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

데일이 얼마나 더 고생하길 원해.

‘내가 저 남자를 데리고 있으면 그들은 낙원까지 잘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내 계획은 일단 저 남자와 단둘이 지내는 거다.

물론 오래는 아니다.

배가 항구를 떠나기까지 며칠, 단 며칠이면 된다.

이미 며칠이 흘렀으니 설마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데일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을 거다.

‘어쩌면 이미 떠났을지도 모르고.’

데일은 한두 명보다는 모두를 더 살피는 사람이고, 모두를 이끄는 자리에 있는 사람의 선택이란 그래야 하는 게 맞으니까.

이미 그가 바다 위라고 해도 원망은 없다. 그에겐 고마운 일뿐이니까.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좀 더 얼굴을 보고 올걸.’

우는 얼굴이라도 열심히 쳐다보다 올걸 그랬다.

아마 나 때문에 울었던 걸 텐데, 내가 그에게 뭐라고 말했더라?

나 때문에 울기까지 하다니, 고맙다는 말을 했던가. 아니, 안 했구나.

왜 안 했지? 생각해 보니까 해야 할 말을 안 했네.

‘이제 영영 못 보는데.’

그리 생각하니 속이 시큰거렸다.

참 이상하지. 그와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사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어왔는데 횟수가 부족했나.

이렇게나 아픈 일일 줄, 나는 정말 몰랐다.

“넌 참 조용히 운다.”

“…….”

“돌아보지 않았으면 우는 줄도 몰랐겠네.”

남자가 발을 까딱이던 것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내 계획은 일단 당신이 머무는 이곳에 얼마간 있는 거예요.”

“얼마간?”

“네. 왜냐하면 당신은 아이의 무덤 같은 거니까. 내게도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아이가 묻힌 곳에서 조금은 시간을 보내야겠죠.”

누가 들어도 무덤 취급은 유쾌한 일이 아니겠지.

빨간 눈에 언짢은 기색이 어렸다.

“그래, 얼마간. 그다음 계획은?”

“아직 없어요.”

“돌려보내 달라고 울고불고할 줄 알았는데, 그 말이 없네. 넌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지 않나?”

“…….”

“뭐…… 나야 좋아. 얼마간이라도 옆에 있다 보면 한 마디라도 더 나누게 되겠지, 지금처럼.”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쪽은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돌아가고 싶은 곳?”

그는 애써 기억을 더듬는 흉내를 내며 미간을 좁혔다.

“일단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야 가고 싶든 아니든 할 거 아냐, 안 그래?”

“…….”

“대신 지금 내가 있고 싶은 곳은 알아, 애런이랑 같아.”

그리 말하며 남자는 내 반응을 살피듯이 얼굴을 훑어봤다.

“쉬어야겠네.”

남자는 보기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살며시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남자가 나가고 나는 시스템 창을 불러왔다.

[메인 퀘스트 ‘최후의 낙원을 찾아서’ 파트2

파트2는 간단한 한 가지의 퀘스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최후의 낙원에 도착하기 전까지, 자신을 지켜내시면 됩니다.]

내용은 간단명료했다. 즉, 죽지 말란 소리가 아닌가.

그런데 어쩌냐. 나는 더 이상 시스템의 비위를 맞추고 싶지가 않았다.

그날 밤, 깜깜한 방 안으로 남자가 스르르 찾아들었다.

그는 황궁에 온 내내 나와 한방에서 잤는데, 한 침대가 아닌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그런데 그날 밤은 달랐다.

그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내가 누운 침대 위로 올라왔다.

어딜 올라오냐는 말도, 옆에 눕는 그를 피해 몸을 움직이는 것도 다 귀찮았기에 나는 그저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사람의 시선이란 참 신기하지.

눈도 감고 있고, 어둠 속인데도 상대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는 눈 감은 내 얼굴을 한참을 들여다보다 내 옷자락을 쥐었다.

애런의 잠버릇이었기에 나는 그 익숙한 손길에 움찔했다.

같은 몸을 공유한 사이니까…… 몸에 남은 아이의 습관인 걸까, 아니면 의식적으로 애런의 행동을 따라 하는 걸까를 생각하는데, 그가 낮은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나를 애런이라고 생각해 주면 어때.”

“…….”

“아이와 무슨 추억을 나눴는지, 나는 너와 공유할 수 있어. 그러다 보면 너도 점차 괜찮아질걸.”

뭔가 남자는 착각도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갑자기 미쳐서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고, 그래서 당신을 보고 ‘어머, 애런. 언제 이렇게 커버린 거야?’ 하고 물을 수도 있겠죠? 이대로라면 멀지 않은 것 같으니까 기다려 보든가요.”

그는 손에 쥔 내 옷자락을 꾹 쥐며 대답했다.

“안에서 아이를 통해 밖을 내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어. 아이가 너와 대화할 때, 어…… 저거 꽤 괜찮다. 뭐가 괜찮은진 모르겠는데 그냥 기분이 그랬어. 그래서 밖으로 나오면 나도, 아이와 네가 맺었던 그런 관계 맺을 수 있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럴 수 있을 거예요. 세상이 망했는데도 밖엔 사람이 많아요. 언젠간 맺게 될 거예요.”

옷자락을 통해 느껴지던 움직임이 멎었다.

“상상하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말이 없었다.

가만히 누워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옆을 쳐다봤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어른스러워진, 아니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의 얼굴을 훑었다.

자는 얼굴이나 모습이 너무 애런 같았다.

그와 아이는 저 하나의 몸 안에서 어디까지 공유해 온 걸까.

그렇다면 저 남자 안에서, 애런을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바보 같은 생각이다.’

아이는 이제 없는걸. 나는 오지 않는 잠을 계속해서 청했다.

얌전히 받아먹으면서 이틀쯤 아무것도 안 했더니 몸이 좀 회복됐다.

나는 랜턴 불빛에 의지해 텅 빈 황궁의 복도를 걸었다.

‘죽는 것도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니.’

살아갈 힘이 더는 나질 않아 죽고 싶어진 건데, 정말 죽으려면 몸을 움직일 힘이 필요했다.

내가 나를 해할 용기는 없었다. 도구를 쓰는 건 무서웠다.

이럴 때 비련의 여주인공들은 어떻게 했는지를 생각해 봤다.

‘그래 역시 클래식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거지.’

오늘도 내게 모이를 주고서 남자는 사라진 후였다.

잠깐이지만 어제도 황궁을 돌며 장소를 물색했는데 찾질 못했다.

애매하게 높으면 목적은 이루지 못하고 많이 고통스럽기만 할 수 있으니까, 확실한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가장 높은 곳을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좁고 가파른 원형 탑이 보였다.

남자가 방을 나가 뭘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돌아오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는다.

나는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다리에 힘없는 사람은 고전적으로 죽는 것 따위 못 한다.

내가 이때를 위해 새 새끼처럼 꿀떡꿀떡 밥을 먹은 거다.

탑에 도착해 뱅글뱅글 돌아가는 수십 계단을 올랐다.

“와.”

저 끝에 해안선이 얇게 보였다.

그리고 해안선을 넘어 더 멀리에, 빛기둥이 보였다.

메인 퀘스트의 파트2는 생각보다 더 간단한 모양이었다.

저 빛기둥이 파트2의 오픈과 함께 나타난 걸 보면 아마 저곳에 낙원으로 가는 길이 있지 않을까.

‘내 몸 하나 지키면 되고 길 안내까지 해주다니, 많이 친절해졌네.’

하지만 더 이상 시스템이 하란 대로 하기는 싫었다.

친절하게 죽여도 되는 대상을 골라서 안내해 주는 시스템도, 그리고 그대로 따를 생각을 하는 나도 싫고.

지쳤다.

그래, 더는 생각하길 그만하고 싶었다.

계단을 오르면서 엄마한테 50번쯤 미안하다고 말한 것 같은데 그래도 한참 부족하겠지.

근데 더는 못하겠다. 그만하고 싶다.

나는 해안선을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찡그렸다.

저 바다 위 어딘가 데일이 가고 있을까.

“넌 계속 살아 있을 거지?”

“…….”

“죽지 않을 거지?”

“…….”

“대답해.”

‘절대 안 죽는다고 말했는데, 결국 약속 못 지키네.’

마지막 순간에 더 강하게 생각나는 게 엄마가 아닌 남자라니.

엄마 미안해. 엄마 자식이 이렇게 못났다.

근데 엄마는 일단 안전한 곳에 있잖아. 여긴 비교가 안 되게 위험하니까 좀 봐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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