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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107)화 (107/108)

107화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초가 켜진 거대한 샹들리에와 높디높은 천장에 그려진 수준 높은 천장화였다.

파란 하늘에 뜬 흰 뭉게구름.

그 사이를 작은 날개를 단 아기천사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그림이었다.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도르르르르.

주머니에 넣어둔 총알 한 개가 빠져나와 바닥을 굴렀다.

총알이 구르는 작은 소리에도 공간이 울렸다.

‘무도회장.’

커다란 공간은 당장이라도 드레스와 예복을 갖춰 입은 영혼들이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출 것 같은 화려한 연회장이었다.

나는 그 연회장의 한가운데였다.

-쪼르륵.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소파에 앉은 적색 눈의 남자가 잔에 포도주를 따르며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실래?”

“…….”

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고 속은 쓰렸으며, 조금 어지러운 듯도 싶었다.

구멍이 났던 어깨는 멀쩡하게 되돌아와 있었다.

먹은 건 없는데 열량 소모만 계속해 댔으니 그럴 만했다.

‘뭘 먹긴 먹어야겠지.’

“속이 비어서 술은 싫어요. 먹을 걸 좀 내와요.”

명령조의 말투가 나갔다.

애런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눈앞에서 저자가 얼마나 쉽게 사람의 목숨을 끊었는지를 봤는데도 그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말투가 건방지다고 죽이려 들면.

‘죽지, 뭐.’

아, 그럼 차라리 포도주를 마시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는걸.

“와, 속 진짜 쓰리네.”

앉았던 나는 다시 슬금슬금 그 자리에 누웠다.

기억이 끊긴 걸 보면 실신이라도 한 모양이지.

여기가 어딘지, 왜 내가 이곳에 저 남자와 단둘이 있는지 묻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 그래. 가져다줄게.”

먹을 걸 찾으러 가는지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탁탁탁 하는 신발의 딱딱한 밑창 소리가 아닌 걸 보면 맨발인가.

문득 발이 갑갑했다.

나는 누운 채 발을 움직여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 던졌다.

-도르르르르.

누워서 몸을 비튼 탓에 나머지 총알들이 흘러나와 연회장의 외곽으로 흩어졌다.

양말도 벗어버리고 눕자, 연회장 바닥의 차디찬 기운이 맨발로 스며들었다.

살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얼굴 위로 드리웠던 빛이 차단되는 게 느껴졌다.

“죽은 거야?”

“…….”

그는 눈 감은 내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아몬드를 발견했어. 먹어.”

닫힌 내 입술 사이에 말라비틀어진 아몬드를 끼웠다.

입만 벌려 아몬드를 씹었다.

아, XX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아몬드.

하나를 천천히 씹고 나면 그가 기다렸다는 듯 다음 아몬드를 넣어줬다.

눈꺼풀 위가 여전히 어두운 것으로 봐서 계속 위에서 날 내려다보는 모양이지.

“이봐요. 이름을 알려줘요.”

“애런이라니까.”

“그거 말고 당신 이름이요.”

“……내가 애런이야, 이젠. 말해줄 다른 이름은 없어.”

“애런은 어디 있어요.”

“벨, 나야. 애런이잖아.”

또다.

눈을 뜨면 또 애런의 얼굴로 아이의 표정을 따라 하고 있을 것만 같아서,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죽지 마, 죽지 말아야지. 꼬맹이가 살려준 목숨이 아깝잖아.”

하지만 눈을 감는다고 해서 보지 않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벨!!”

날 밀치고 앞으로 튀어 나가던 애런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내게 건넨 말도 선명하게.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빨간 눈동자를 가진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는구나, 이번엔.”

“저기요. 왜 자꾸 애런이 날 살려줬다고 하는 거예요.”

그는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갈아입은 모양인지, 바지만 달랑 입고서 옆에 편한 자세로 앉아 누운 나를 내려다봤다.

“궁금할 순 있는데, 울면서 자세히 듣고 싶어 하니까 이상하잖아.”

“…….”

“뭐, 그래. 꼬맹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거든. 한번 내게 양보하면 돌아올 수 없다는 걸. 그래서 많이 맞으면서도 잘 참더라고. 내게 몸을 넘기면 아픈 것도 없을 거라고 꼬셨는데 넘어와야 말이지.”

“…….”

“근데 그 순간 널 살리려면 제 능력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아니까 넘긴 거지. 그러니 내게 부탁한 순간 널 살린 거라고 봐야지?”

“데일 형이랑 벨이랑 함께 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어. 거기서 꺼내주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거야.”

“보고 싶을 거야.”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나는 남자의 팔뚝을 잡고 흔들었다.

“애런, 장난치지 마.”

“…….”

“이런 장난은 치는 거 아니야. 혹시 몰랐다면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알고 다신 장난치지 마.”

거세게 흔든 것 같았는데, 기분만 그랬지 실제로는 그러지 못한 모양이다.

남자는 별 미동 없이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애런, 지켜주겠다고 큰소리쳐 놓고 내가 널 잃어버려서 화가 난 거야? 그래서 이래? 그런 거라면…….”

이번엔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남자 쪽에서 내 팔뚝을 움켜쥐었다.

“연기가 필요하면 해줄 수 있어. 너랑 애가 어떻게 지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나도 봤으니까 알거든.”

축 늘어진 손가락에 뭔가가 걸렸다. 좀 전에 굴러가다 만 총알이었다.

“난 계속 이 안에 있었으니까 꼬맹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다 알아.”

손톱에 치이던 총알을 손에 쥐었다.

“아마 꼬맹이라면 널 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거야. 원해서 한 일이니까 후회는 안 할 거라고. 그러니까 가져다준 아몬드 다 먹고 기운 좀 차려.”

손에 넣은 작은 총알이 시리게 차가웠다.

이제 내 꼬맹이를 품에 안았을 때 전해지던 온기를 다신 느낄 수 없겠구나.

나는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사내 앞에서, 연회장이 울리도록 소리 내 울었다.

며칠이 지났다. 대충 이삼일쯤 지난 것 같았다.

나는 완전히 몸져누워 끙끙 앓다 일어났는데, 들었다 꺼졌다 하는 정신 속에서 항상 그 남자가 내 옆을 지키고 있던 기억이 들었다.

누구의 침실이었을까.

나는 사치스러운 방 안,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차리고도 음식을 입에 대질 않자, 남자는 가끔 내게 와 강제로 음식을 먹였다.

며칠 전 나는 애런을 잃었다.

누구에 의해서? 계속 애런을 쫓던 놈들에게?

아니. 나를 지키려고 아이는 스스로 목숨을 포기했다.

대신 저 남자가 남았다.

나는 방 한구석에 앉아 일어난 나를 감시하듯 지켜보는 남자에게 물었다.

“이봐요.”

“애런으로 불러줄 생각은 없어?”

“본인 이름 갖고 싶지 않아요?”

“……애런이 좋아.”

“그럼 그냥 이봐요로 부를게요. 이봐요.”

“…….”

붉은 눈의 남자는 보일 듯 말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늦게 물어본 감이 있는데, 나 여기 왜 데리고 왔어요?”

날 구해준 이유는 꼬맹이 때문이고, 그럼 끝나고 날 그곳에 두고 오면 될 걸 왜 여기로 끌고 왔냔 말이다.

남자는 별 고민 없이 답했다.

“너랑 더 대화해 보고 싶어,”

고작 대화? 꼬맹이 안에 갇혀 있었다더니 머릿속으로만 해보던 대화를 현실에서 실제 음성으로 주고받아보고 싶고 뭐 그런 건가?

“죽이려고 데려온 건 아니었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긴, 억지로 먹여가며 내 목숨이 붙어 있도록 하는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쉽게 됐네.”

되게 세던데. 그래서 아프지 않게 한 번에 보내줄 거라 여겼는데 내가 살아 있길 바란다니.

나 때문에 아이가 죽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오류 상태로 있던 첫 번째 퀘스트가 클리어됐다.

계속 퀘스트가 완료되길 바라왔는데, 그건 퀘스트를 모두 완료하고 나면 언젠가 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거란 확신 때문이었다.

결국엔 아이가 사라짐으로써 내 퀘스트가 클리어된 거다.

시스템이 일행으로 넣으라던 이는 꼬맹이가 아닌 저 남자였던 거겠지.

그러니까 아이가 사는 것과 내가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은 처음부터 양립할 수 없던 일이었다.

양립할 수 없는 일,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일.

내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아이가 이렇게 사라지는 걸 선택하지는 않았을 텐데.

두 개를 다 이뤄내려고 애쓰거나 두 개를 다 포기하거나가 아니었을까.

그럼 한 가지 선택지가 포기된 지금 나도 내 선택지를 버리는 게 맞지 않나?

낙원에 가면 애런에게 좋은 부모를 찾아주고 싶었다.

나는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애런에겐 새 보금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두 개를 다 거머쥐고 싶었는데.

나는 조용히 세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이대로 죽는다는 자각도 없이, 가만히 말라비틀어져 사라졌으면 좋겠다.

“무슨 생각하는지 얼굴에 드러나.”

남자가 다가와 침대 맡에 앉았다.

그는 굉장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는데, 왜 그런 얼굴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정든 건 애런이지 네가 아닌데 왜 당신이 그런 얼굴로 나를 봐.

“이봐요. 당신은 뭐예요? 사람이긴 한가요? 아닌 것 같은데. 그쪽 실험체라던데 무슨 실험인지는 알아요?”

“몰라, 꼬맹이 안이 내 첫 기억이야.”

그렇군, 저 자식은 아는 게 없군.

뭐 상관없었다. 도대체 실험체가 뭔지 뭔 실험인지 궁금한 거야 애런이 있을 때의 이야기니까.

“여기는 어디죠.”

“수도의 한가운데. 황성.”

“그래요. 이만 나가줄래요?”

“…….”

그는 조금 머뭇거린다 싶더니 말을 뱉었다.

“죽으려는 거야?”

“…….”

“애는 네가 죽는 걸 원치 않았어. 그래서 한 선택이었다고. 쓸모없게 만들 생각이야?”

“이봐요.”

나는 무릎에 묻었던 얼굴을 들어 남자를 바라봤다.

“애런처럼 말하지 말아요. 꼬맹이를 다 아는 것처럼 쉽게 말하지 말아요. 나를 아는 것처럼도 말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을 몰라. 근데 왜 당신은 나랑 애런을 오래전부터 아는 것처럼 말하는 거야. 당신이 누군데. 왜 아이와 나 사이에 있는 사람처럼 얘길 하냐고. 나는 너를 모르는데.”

“그렇군.”

짤막하게 대답한 남자는 굳은 얼굴로 방을 나갔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황궁의 가장 높은 탑, 열린 창틀에 발을 딛고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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