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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105)화 (105/108)

105화

“상황이 정리되는 데 시간이 필요한가 보더구나. 대령님께서 나오지 말고 일단 숨어 있으라 하셨어.”

다친 나 대신 애런을 안아 들고 뛰며 할아버지는 그리 말씀하셨다.

데일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숙소 건물 저편에서 연이어 폭발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아마 뛰어내린 몇 명의 능력자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을 것이다.

“신관 전용 숙소로 가자꾸나.”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해서 합류하려 들었다가 데일의 짐이 되는 것보다 그의 말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신관 숙소는 신도들 숙소에서 공터를 하나 사이에 두고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이었다.

키 작은 남자를 따라간 군인들이 얼마나 버텨줄지 모르는 상황.

빠르게 공터를 가로질러 신관 숙소의 문을 열었는데.

“예, 알겠습니다.”

누군가와 연락하며 입구를 나서던 이가 있었다.

키 작은 남자와 비슷한 옷차림을 한 그는, 우리를 본 순간 들고 있던 검을 앞으로 찔렀다.

선두에서 달리던 세바스찬 할아버지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고 그 바람에 품에 안겨 있던 애런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탕!

내 손에서 날아간 총알이 할아버지를 찌른 남자의 이마를 맞췄다.

“가요! 안으로요!”

몸을 가누기 힘들어하시는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신관 숙소로 들어가 계단을 올랐고, 3층 세탁실에 도착해서 문을 닫았다.

“으윽…….”

할아버지의 복부에 난 자상이 깊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던 할머니가 세탁실에 놓인 흰 사제복을 찢어 배에 둘렀다.

“세바스찬…….”

“괜찮아, 괜찮아 플로라.”

할머니는 뒤돌아 내 어깨도 동여매 주셨는데, 입술을 말아 물고 소리를 꾹 참고 계셨지만 선한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남편을 잃게 할 수 없었다.

‘급한 건 할아버지야.’

나는 생명력을 일정 수준 이상 사용하면 정신을 잃는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지금, 두 사람분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능력을 다 써버리고 정신을 잃으면 곤란했다.

“할머니, 잠시만요.”

[스킬 ‘연민(Lv.8)’이 발동합니다.]

그사이 레벨 업을 이뤄서 그런가.

세탁실이 빛으로 가득 차며 할아버지의 복부에 난 상처가 눈부신 속도로 아물었다.

할아버지의 표정이 평온함을 되찾을수록 게이지의 생명력이 죽죽 소모되어 갔다.

치료를 끝내고 벽에 기대자 애런이 말을 걸었다.

“벨은, 벨 어깨 다쳤잖아.”

애런은 아까 할아버지 품에서 떨어지며 쓸렸는지 볼에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크고 동그란 눈망울에서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가며 아이는 내 옷자락을 흔들었다.

‘상처에 눈물 들어가서 따갑겠다.’

아이의 목소리에 할머니와 할아버지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벨은 치료 안 하는 거예요?”

“…….”

“바로 사용하긴 무리라서요. 저도 금방 치료할 거니까 너무 염려치 마세요.”

대충 둘러대며 세탁실에 난 작은 창으로 건너편 건물을 살폈다.

키 작은 남자가 건물을 나와 공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들키면 다 죽는다.’

두 분을 돌아봤다.

이 비좁은 세탁실로 저 남자가 들어서는 순간, 애런은 빼앗기고 우리 셋은 다 죽을 거야.

뛰어내린 능력자가 총 몇 명이었지.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데일도 힘든 상황일 게 뻔했다.

‘3층까지 올라오게 둘 수 없어.’

나는 내 상처를 보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울고 있는 애런을 당겨와 당부했다.

“애런,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같이 여기 있어.”

“어?”

“난 내려가서 적을 유인할 거야. 따돌리고 나서 데리러 올 테니까 어디 갈 생각 말고, 할머니 할아버지 옆에 붙어 있어. 알겠어?”

“시, 싫어!!”

평소 어른스러운 아이는 하필 이 같을 때 내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싫어, 안 보내줄 거야!!”

나는 아이에게 옷을 붙잡혀 흔들리면서 창 아래를 내려다봤다.

키 작은 남자는 자취를 감췄다.

‘이미 건물 안에 들어온 거야.’

더 늦었다간 아무 시도도 하지 못하고 정말 다 죽는 꼴밖에 안 날 거다.

“뭐가 싫다는 거야?! 이거 놔!! 애런 왜 이래?!”

“싫어, 못 가!!”

“다 죽어! 알겠어? 이러다간 다 죽는다고!! 도움을 구할 데가 없단 말이야!!”

‘아차.’

내 말에 아이가 놀라 입을 벌렸다. 나는 얼른 굳어버린 아이를 품에 안고 말했다.

“아니야, 애런. 내가 말을 잘못했어. 상황이…… 상황이 조금 빠듯해서 그런데 곧 괜찮아질 거야. 근데 괜찮아지기까지 조금 시간을 벌 필요가 있거든. 그래서 그래. 괜찮을 거야.”

“…….”

나는 품에서 말을 잃은 아이의 등을 도닥였다.

“적은 한 명이니까 우리가 한 곳에 몰려 있는 것보다 둘로 나뉘는 게 좋아. 이해하지? 따돌리고 올라올게. 여기 조용히 있어야 해, 알겠지?”

나는 플로라 할머니에게 애런의 손을 넘겼다.

“벨, 그래도 셋이 붙어 있는 게……. 혼자서는 안 돼요. 그냥 여기에…….”

할머니는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계셨다. 이대로 있다간 들키는 것밖엔 없는데.

“할머니 제가 신전을 다 쓸어버렸던 거 보셨죠? 전 괜찮아요. 그럼 아이를 부탁드려요.”

“벨! 싫어!!”

할머니에게 잡혀 발버둥 치는 아이를 뒤로하고 세탁실을 나섰다.

내려가는 계단을 조심조심 밟아 1층 계단 앞에 섰을 때.

-벌컥, 탁.

하는 문 열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죽여 2층으로 올라가 계단 바로 옆에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기서 들킨 다음 바로 계단을 향해 뛰어 내려가서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면, 적어도 3층은 뒤지지 않을 거야.’

내 품엔, 세탁실에 있던 옷을 대충 뭉쳐 만든 천 뭉치가 들려 있었다.

가까이 오면 눈치챌 테지만 그래도 조금은 유인할 수 있을 것이다.

-벌컥.

이렇게 빨리? 라고 생각했을 때.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작은 인영은 애런이었다.

나는 총을 쏠 준비를 하고 있다 놀라서 다급히 팔을 거뒀다.

“애런! 너 왜……!”

“벨, 지금 위험한 거지?”

“…….”

“지금 팔도 제대로 못 올리잖아.”

그 말에 오른쪽 어깨를 손으로 감쌌다.

할머니가 감싸 준 흰 천은 이미 피로 축축이 젖어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는 이미 상황을 다 파악한 눈치였다.

괜찮을 거라는 거짓말은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후…….”

나는 애런의 손을 잡고 방 안을 둘러봤다.

단출한 방 안엔 아이를 숨겨줄 그럴싸한 공간이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침대 밑을 가리켰다.

“들어가.”

“…….”

“우리를 공격했던 사람이 저 방문을 열면 난 바깥으로 튀어 나갈 거야. 너는 나 따라오지 말고 여기 숨어 있는 거야, 알겠지?”

애런은 입을 가로로 다물고 있다가 내게 물었다.

“언제까지?”

“…….”

“벨이 돌아올 때까지? 숨어 있다가 벨이 돌아오면 나가면 돼?”

“나는…….”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아이에게 그리 말할 순 없었다.

나는 애런에게 가지고 있던 무전기를 건넸다.

“이거 쓰는 법 알지? 숨어 있다가 불 들어오면 받아서 네 위치를 알리는 거야. 그때 나가면 돼.”

“벨이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나가지 않을 거야.”

“…….”

“침대 밑에서 평생 엎드려 있을 거야.”

다 알고 있는 듯한 아이의 투명한 눈망울에 더 이상 무언가를 말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없다.

나는 조금 거칠게 애런의 손을 잡아끌어 아이를 침대 밑으로 숨기려 했다.

“그만 들어가. 정말 화낼 거야.”

“싫어.”

애런은 처음 보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고집을 부렸다.

멀쩡한 왼팔로 아이를 밀었지만, 아이는 두 팔로 침대를 잡고서 들어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너 진짜……!”

“벨.”

그러던 아이가 내 목을 끌어안았다.

“나 거기서 꺼내줘서 고마워.”

“뭐? 너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나 처음 봤을 때부터 알 수 있었어. 벨한테 너무 좋은 냄새가 나서 보자마자 따라가고 싶었어.”

기분이 이상했다.

혹시 내가 잘못될 거라 생각해서 마지막 인사를 해두려는 건가?

“데일 형이랑 벨이랑 함께 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어. 거기서 꺼내주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거야.”

“…….”

“나 사실 알고 있었어. 자꾸 날 데려가려는 사람들 때문에 형이랑 벨이 힘들다는 거.”

나는 내 목에다 대고 자꾸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아이의 작은 머리통을 떼어내려 했다.

애가 무슨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봐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는 목을 끌어안고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나 책임지겠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예쁜 옷 입혀줘서 고마워. 잘 때 옆에서 잘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다 고마운 것뿐이야.”

“너 도대체 무슨…….”

“데일 형한테도 고맙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휙 고개를 돌렸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애런, 나도 고마운 게 잔뜩 있어. 근데 지금은 말 못 해. 나중에 얘기해. 응?”

“벨.”

작아진 내 목소리를 의식했는지 아이도 목소리를 줄였다.

“나중에 그럴 수 있다면 나 또 꺼내줄래? 거기서 그랬던 것처럼.”

“당연하지. 일단 침대 밑부터 들어가 있자, 제발.”

들렸다. 이번엔 명확하게 더 가까이서 발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릴 것이다.

침대에 애를 숨길 시간도 이젠 없었다.

나는 애런을 방문을 열었을 때 보이지 않는 벽으로 밀어붙였다.

‘쉿.’

-뚜벅, 뚜벅

곧 방문 앞이었다.

‘저 남자가 방에 들어오면 아이를 발견하지 않을까?’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문이 열리는 순간 총을 쏘고 튀어 나가려 했지만, 애런이 옆에 있으니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먼저 방문을 열고 나가서 눈에 띄자.’

문손잡이로 팔을 뻗으려는데.

얌전히 벽에 붙어 서 있던 애런이 두 팔로 나를 거칠게 밀었다.

그리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애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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