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가서 사람들을 데려오는 일만 시키고 올 테니까 여기서 쉬고 있어.”
“……알겠어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데일은 이내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찾아냈다.
“어르신, 여기 함께 계셔주시겠습니까?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알겠네.”
내 곁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붙여둔 데일은, 동료인 아론 및 몇 명의 군인과 함께 자릴 비웠다.
가만히 서 있던 리븐도 데일의 손에 이끌려 끌려갔다.
나는 뛰어가면서도 몇 번씩 뒤돌아 이쪽을 힐끔거리는 데일을 보다 애런에게 시선을 내렸다.
“애런, 배고프지 않아?”
“배고프지 않아.”
“정말?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 어젯밤 이후로 먹은 게 없는데. 온종일 아무것도 안 먹은 거야.”
나는 데일이 우릴 호위하라며 붙여놓은 군인에게 손짓했다.
“애가 뭘 좀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먹을 만한 게 있을까요?”
“있습니다. 가져오겠습니다.”
막 이동하려는 군인을 플로라 할머니가 붙잡았다.
“여긴 너무 정신이 없고 몸을 뉠 곳도 없어서, 신도들이 머물던 숙소에 가 있으려고 하는데 그쪽으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알겠습니다.”
군인 한 명이 자리를 떠나고 우리는 남은 군인들과 함께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는 8인실인 모양인지 총 8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잿빛 벽에 있는 거라곤 침대와 이불, 작은 서랍장이 다인 소박한 공간.
나는 애런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 그 옆에 누워버렸다가 바로 몸을 일으켰다.
눕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아, 5초 만에 잠들겠구나.
잠시 쉬는 정도지, 편히 잠들 수 있을 만한 안전한 공간은 아니었기에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허릴 기댔다.
그러자 내가 일어나 앉는 걸 보던 애런이 꼬물꼬물 다가와 옷자락을 쥐었다.
그리고 빈 한 손으로는 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왜, 내 얼굴 이상해?”
“그게 아니라, 벨은 자기 전에 늘 깨끗이 씻으니까.”
“풉, 그래서 지금 손으로 세수시켜 주는 거야? 누가 물도 없이 세수를 해.”
“내가 물 가져다줄까?”
나는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리려는 애런을 낚아채 다시 앉혔다.
“지금 안 자. 세수 필요 없어. 그러니까 어디 갈 생각 말고 여기 있어.”
“웅.”
한동안 방 안의 모두가 말이 없었다.
군인들은 가만히 자리를 지켰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서로의 손을 잡고, 자는 건 아니었지만 조용히 눈을 감고 계셨다.
자정이 넘은 시각, 다들 지치고 피곤한 얼굴들이었다.
나 또한 주변이 조용하니까 더 잠이 몰려들었다.
자지 말아야지. 어차피 데일이 곧 올 테니까. 오면 무언가 소식을 전해주겠지. 아마 바로 이동하게 되려나?
잠을 자지 않고 버티려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 닫아놨던 시스템 창을 켰다.
[삭제시킨 대상의 생명력이 게이지에 저장됩니다.
‘자기혐오’ 포인트가 적립되었습니다.
총 17포인트]
17명의 생명력이 게이지에 저장되었다더니.
그 잠깐 사이에 나는 무려 2단계나 레벨 업을 이뤘다.
[클래스 ‘종의 요정’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종의 요정(Lv.6)’
⇒ ‘종의 요정(Lv.8)’]
[클래스 레벨 업에 따라 아이템 ‘자선냄비’의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자선냄비(크기: 소형)’
⇒ ‘자선냄비(크기: 중형)’]
레벨 6이 된 게 어젯밤인데 하루 하고도 몇 시간 만에, 아니지.
단 몇 시간 만에 2단계나 오른 거다.
타인에게서 얻는 행복이나 감사 포인트는 생명력으로 변환 후 저장되는 데 반해, 17명의 생명력은 아무것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저장됐다.
그래서 훨씬 빠르게 레벨 업이 가능한 건가?
‘그렇다면 능력이 단시간 내 세지길 원한다면 더 빠른 길은…….’
나는 경고하듯 붉게 일렁이던 자기혐오 게이지를 살펴봤다.
지금은 색 변화 없이 잠잠하기만 했다.
‘주교를 내가 죽였다면 어땠을까,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를 쏜 건 내가 아닌 플로라 할머니였다.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할머니는 불장난에 정신이 팔린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급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화르르 타오르려는 작은 불길 위로 모래를 쏟아부어 불씨를 꺼트리는 것처럼 그때, 진한 붉은 색을 띠던 경고창의 불도 꺼졌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했다면?
뭔가 특별한 변화가 있지는 않았을까? 레벨 업이 2가 아닌 3이 되었다든가.
어쨌든 오늘 밤의 일로 알아낸 것은, 이전보다 더 빠르게 능력치를 올리는 방법이었다.
타인의 행복이고 감사고 다 느려.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방법은.
‘스킬 대상자에게 더 많은 스킬을 사용하는 것.’
그런데…… 나를 보던 할머니의 표정이 자꾸 신경 쓰였다.
왜 나를 그렇게…….
‘잘못한 거 아니잖아요.’
나는 세바스찬 할아버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계신 할머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어나 옆에 개어둔 이불을 펴 두 분의 몸을 덮었다.
아무 움직임도 없는 걸 보니 그새 잠드신 모양이었다.
피곤하실 만했지, 나 역시 이런걸.
“벨.”
몸을 덮는 이불의 촉감에 깨신 건가. 할머니께서 스르르 눈을 뜨셨다.
할머니는 방 안을 빙 둘러보시더니 내 손을 잡았다.
“잠깐만 얘기할래요?”
방을 나와 문을 닫고 우린 빈 복도에 섰다.
복도 끝에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말을 꺼내기에 앞서, 플로라 할머니는 조금 머뭇거리는 모습이었다.
“이런 말, 내가 할 주제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니까. 능력이 있는 사람이 보호해 주겠다 나서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사람이죠. 세바스찬이나 데일이나 벨 같은…….”
그녀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벨한테 엄청난 능력이 생겼다고 해도 말이에요.”
“…….”
“그거 쓰지 않아도 돼. 그걸 무조건 써야 하는 건 아니야.”
존대를 해주시다가도 가끔 툭툭 편한 말이 나오는데, 더 가깝게 느껴지는 기분이라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쓰기 싫으면? 하지 마요. 책임지기 싫으면? 지지 않아도 돼. 어떤 결과로 이어지든 그건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지 벨이 잘못해서가 아니야.”
그녀의 의도를 알겠다. 할머니는 나를 위로하고 싶으셨던 거다.
내용은 상관없었다. 그녀의 의도는 충분히 넘칠 만큼 따듯하니까.
“그래도 최소한, 나중에 자신에게 변명할 수 있을 만큼의 노력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리하진 않을 거예요.”
뭔가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할머니는 끝내 안쓰러운 표정을 풀지 못하셨지만, 그래 됐다, 싶은 얼굴로 닫힌 문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그래요. 그럼 들어갈까요?”
들어가 침대 구석에 잠든 아이 곁에 앉았다.
뭘 좀 먹이고 나서 재우고 싶었는데 그새 잠들었는지 아이의 숨소리가 깊었다.
나 역시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풀에 힘을 주고 있을 때였다.
-두우우우우.
닫힌 창문으로 소리가 뚫고 들어왔다.
불길한 예감에 창을 열자, 머리 바로 위로 프로펠러 비행기가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저고도로 비행하고 있었다.
“대형을 유지해!”
긴장하는 군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비행기가 최저점까지 내려왔을 때 지상을 향해 내려오는 로프가 보였다.
그리고 신전의 지붕 위로 하나둘 낯선 인영이 뛰어내렸다.
‘애런을 데려가려는 놈들이다.’
주교가 살아 있을 때 이미 연락이 갔던 건가?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갑시다!”
세바스찬 할아버지가 외쳤고, 나도 이 방을 나가서 근처에 있을 데일과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벌컥.
방문이 열렸다.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조금 전 먹을 걸 부탁한 군인이었다.
“…….”
지나치게 굳어버린 얼굴의 군인 뒤로 키가 작은 누군가가 서 있었다.
누군지 확인하려 고개를 기울이던 그 순간.
-쉬익.
군인의 몸을 관통한 것은 레이피어처럼 얇디얇은 검날이었다.
이미 한 사람을 찌른 그것이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며 내게 돌진해 왔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내겐 이미 그것을 피해 움직일 기력도, 후드를 뒤집어쓸 정신도 없었다.
그저 미간으로 가까워지는 얇은 송곳 같은 무기의 끝을 눈에 담을 뿐이었다.
‘죽는구나.’
죽음을 직감한 순간 모든 것이 느려 보였다.
“벨!!”
의문의 남자를 향해 달려드는 방 안의 군인들,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있던 애런이 날 옆으로 밀치는 모습까지.
“아악!!”
검날이 뚫고 지나간 건 다행히 내 머리가 아닌 오른쪽 어깨였다.
어깨에 박혔던 검이 다시 길이가 줄어들어 키 작은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벨, 이리 오렴!”
-탕탕탕탕탕!!
방 안에 있던 군인들의 무차별 공격이 키 작은 남자에게로 쏟아졌다.
하나밖에 없는 문이 막혔으니 남은 탈출구는 창문뿐이었다.
할머니가 창밖으로 빠져나가게 도우면서 할아버지가 날 불렀다.
“할아버지, 애런부터요!”
애런을 넘기고 손에 총을 불러들였을 때, 창이 떴다.
[아이템 ‘자선냄비(크기: 중형)’]
[불우이웃이 당신께 기부를 요청합니다.]
[포인트를 자선냄비에 넣어 대상에게 기부해 보세요.]
‘데일이다.’
[경고: 지금부터는 소모 자원으로 각성자의 생명력을 사용합니다.]
오늘 이미 너무 많은 능력을 사용한 탓에 경고창이 떴다.
레벨 업을 했지만 소모한 푸른 게이지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대상이 기부를 받았습니다. 기부 대상의 능력치를 일정 시간, 일부분 활성화합니다.]
[기부 대상: 데일 캐드
활성화 정도: 50%
지속 시간: 00:15:00]
“할머니! 데일한테 연락해 주실래요?”
“알겠어요!”
군인들이 총알 세례를 갈긴 문 앞이 희뿌연 먼지로 가득 차올랐다.
“애 여깄어. 대장 이리 오시라 해.”
바닥에 그림자가 보였다.
문 옆으로 몸을 피한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 능력자? 그럼 그때까지 여긴 내가 맡지.”
관통당한 어깨에서 울컥울컥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왼쪽 손으로 다친 부위를 꾹 누르며 놈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능력자라 할지라도 머리를 맞으면 죽는 건 똑같으니까.
‘스킬 대상이기만 하면 정확도는 올라가니까 맞출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마치 살아 있는 듯 움직이는 칼날로 자신을 보호하며 문 앞에 선 키 작은 남자의 수치는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탕탕!
쏴봤지만 역시나였다.
스킬이 아닌 그냥 쏘는 총은 정확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게다가 상대는 눈 씻고 봐도 능력자.
뱀처럼 움직이는 칼날이 총알을 다 튕겨내 버렸다.
키 작은 남자는 내 총알을 가볍게 튕겨내더니 제 앞을 막아서는 군인들을 바라보며 다시 어디론가 연락을 취하는 모습이었다.
“애가 건물을 빠져나갔어. 나도 따라 이동한다.”
“벨!!”
문 앞에서 사라지는 그를 보며 나도 할아버지가 내민 손을 잡고 창문을 뛰어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