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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103)화 (103/108)

103화

사과를 들어야 하는 상황인가, 지금이.

“아니, 나 이제 혼자서 가능해요. 사실 내내 내게도 뭔가 전투 능력이 생겼으면 했는데 드디어 생겼거든요.”

아쉬운 점은 스킬이 정확도만 올려주고 체력을 높여주는 건 아닌 듯했다.

남자의 체온이 전해지자 팔다리가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기술은 늘었는데 기술을 쓰기 위한 체력이 없어, 없는 체력까지 몽땅 끌어다 쓴 느낌이랄까.

“대령님, 이자는 어떻게 할까요.”

아, 주교가 아직 있었지.

그는 숨은 붙어 있었지만 내가 발목을 아작 내 출혈도 심각하고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는 꿈틀꿈틀 바닥을 기어 죽은 제 동료의 주검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내가 할게요.”

그를 처리하기 위해 사라졌던 총을 다시 만들어냈다.

데일의 동료들이 신전 곳곳을 찾고 있다면 곧 애런을 발견할 수 있겠지.

그럼 저건 더 이상 필요 없다.

나는 주교를 조준하기 위해 데일의 품 안에서 늘어졌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저세상 가는 길동무로 나를 데려가고 싶은지,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내게 총을 쏘려는 것 같았는데.

-탕.

숨통을 끊은 건 나도 아니고 데일도 아닌 플로라 할머니였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도, 할머니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그렇게 말씀하셨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데일이 날 안고서 복도를 걸어 나갔다.

내가 달려온 복도를 돌아 나가는데 내가 남긴 흔적들이 보였다.

하나, 둘, 셋, 넷…….

아, 셀 필요가 없나. 17명이라고 알려줬지 참.

나는 그의 턱 끝에 힘겹게 매달려 있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닦아줬다.

“데일.”

“응.”

“확실히 나는 이제.”

“응.”

“예전하고 다른 사람인 것 같아요. 알겠어요.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나는.”

말을 고르는 중인가. 그는 한참 만에 답을 내놨다.

“뭐가 다르단 거야. 얼굴에 묻은 먼지만 좀 닦아. 그럼 똑같아.”

“그래요? 어쨌든 상관없어요. 왜냐면.”

“…….”

“후회는 안 하거든요. 아이만 되찾을 수 있다면.”

데일이 날 안고 복도 끝에 도착했을 때였다.

활짝 열린 신전의 문 앞을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령님!! 여깁니다!!”

타운하우스의 군인들 가운데 동물 가면을 쓴 남자가 보였다.

품에 아이를 안고서.

“애런!!”

“벨!!”

나는 데일의 품에서 풀썩 뛰어내렸다.

가면 쓴 남자의 품에서 톡 떨어져 나온 내 작은 생명체가 맞은편 복도에서 나를 향해 달려왔다.

타다닥 바닥을 박차고 애런이 내게 뛰어올랐다.

“으악!”

순간,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애런이 원래 이렇게 무거웠나, 아니면 하루 만에 자랐나. 아이를 안아 든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냥 내 팔에 남은 힘이 없었다.

“무거워, 너 언제 이렇게 컸지.”

“으아아앙!!”

한눈팔면 하늘로 사라지고 마는 풍선 줄처럼 내 옷자락을 부여잡는 손을 보니 애런이 맞았다.

나는 우는 아이의 등을 열심히 쓸어내렸다.

“아픈 데는? 없어? 그 사람들이 거칠게 대하진 않았어?”

“없어.”

내 꼴이 말이 아닐 텐데.

“내 얼굴은 안 무서워?”

“안 무서워으아아앙.”

“됐어, 됐어, 그럼. 그리구…….”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서 조용히 사과했다.

“낮에 무력하게 놓쳐서 미안해. 아무것도 못 해서 미안해.”

잘만 대답하던 아이는 이번에는 품속에서 열심히 고개만 저었다.

나는 다가와 서는 남자를 바라봤다.

어느새 다가온 리븐이 가면을 벗고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말하자면 긴데요…….”

리븐은 주교실로 끌려가 갇혀 있었는데, 주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애런을 훔치려는 누군가로부터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리븐이 자신이 낙원에 가기 위해 아이를 데려왔다고 생각한 그는, 리븐을 풀어줄 테니 그쪽에게 연락해 달라는 요구를 했고, 리븐이 수락하는 척하면서 아이만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좀 몸싸움이 있었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멀끔하던 남자는 얼굴이 엉망이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가 굳이 애런을 빼내지 않았어도 대예배당에서 내가 애런을 되찾았을 터였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제가 한 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했던 말 지켰네요. 고마워요.”

“아뇨. 아닙니다.”

그는 찢긴 코끝이 따가운지 인상을 쓰며 그리 대답했다.

“주교는…….”

“죽었어요.”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리븐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죽었는지 물어도 되나요.”

“발목에 세 발, 머리에 한 발, 총 네 발이요.”

“……그렇군요.”

우르르 몰려오는 인기척에 돌아보니 예배당 쪽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오고 계셨다.

다행히 할아버지도 무사하셨는데, 할아버지도 같은 생각 중이셨는지 나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는 지하에서 올라온 신도들이 아직도 가면을 쓴 채 멀뚱히 몰려 있었는데, 그들 사이에서 군인 몇 명이 달려왔다.

“대령님, 이걸 보십쇼.”

군인이 손에 든 건 차에 싣는 기름통이었다.

“액체 상태일 때는 괜찮지만 공기 중에 풀어놓으면 살인 가스로 변하는 물질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전쟁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 물건인데. 대예배당 뒤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가 뒤에 선 신도들을 한번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지하에 몰아넣고 죽이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 주교님은 어디 계시느냔 반응들이 오갔다.

화난 목소리로 소리친 건 세바스찬 할아버지였다.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그냥 이용만 당한 겁니다! 동물 가면 씌우고 그자는 당신들을 정말 사람 취급도 안 한 거라구요!!”

그러자 몇몇이 썼던 가면을 벗기 시작했다. 동물 가면 속에서 드러난 것은 정말 평범한 얼굴이었다.

개중에는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악을 쓰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곧 복도를 달려나가다 아직 치워지지 않은 주교의 주검을 보고 소스라쳤다.

주변은 소란스러웠고 나는 지치고 피곤했다.

“데일, 가요. 타운하우스요. 정말 안심하고 가도 되는 거죠? 나 거기 가서 쉴 수 있죠?”

그는 어려운 시험대 앞에 선 사람처럼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데일이 저런 얼굴이라니…….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사실 나도 너무 놀라고 겁을 집어먹어서, 조금은 천천히 생각해도 되는 걸 너무 극단적으로 굴지 않았나 하고 있었기에, 그에게 살포시 농담을 던졌다.

“정말 가면 다 머리 박고 있는 거예요? 정문에서 후문까지?”

“보고 싶어?”

“보여줄 수 있다고 하면 뭐…… 거절은 안 하죠.”

“그래?”

데일은 초조해진 얼굴이었다.

“됐어요. 농담이에요. 그냥 당장 누울 수 있는 깨끗한 침대면 돼요. 아…… 정말 침대면 될 것 같아요.”

그날 내 방에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와서 난장판이 됐을 거 같은데 바로 가서 쉴 수 있는 상태려나.

아, 몰라. 아무래도 좋았다. 어디든 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애런도 쉬고 싶지?”

“응.”

울음을 그친 애런은 내 품속에서 아직도 경계 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너 이리 와.”

자신에게 오라는 데일의 말에도 애런은 고개를 저었다. 팔이 아팠지만 애가 원했기에 더 꼭 끌어안았다.

그래. 어차피 이미 피곤한 거 몰아 쉬자.

“에즈라랑 레이스는요?”

둘은 데일과 함께 18구역으로 들어갔다가 내 무전을 받고 타운하우스로 돌아갔다고 했다.

“근데 어떻게 18구역에 있었던 거예요?”

덕분에 무전이 되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레이스가 배신하기 전 일행 있잖아. 연락했더니 18구역에 있더라고. 거길 갔었어. 그들이 다시 애런을 노린 거라고 생각했거든.”

하긴 대뜸 신전을 떠올리긴 어려웠을 테니, 따져보면 가장 가능성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타났을 때 멀끔한 모습은 아니었구나, 이해했다.

“바로 찾아 나선 거네요. 그때 거기 있던 거면, 감동적이네.”

“…….”

“이제 정문에서 후문까지 머리만 박고 있으면 되겠네요.”

그는 체념했다는 얼굴로 싱겁게 웃었다.

“아, 그래. 가서 20분만 시간 줘라.”

“아, 정말 시키게?”

“야,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그와 일상적인 농담을 주고받자 조금 숨이 트였다.

진짜 끝났구나, 싶은 기분.

그때, 잠시 사라졌다가 나타난 리븐은 어디선가 끌고 온 가면 쓴 신도를 내 앞으로 떠밀었다.

와, 이제 제발 동물 가면은 그만 보고 싶은데 왜 또.

“이자는 조타수예요.”

“네?”

“갈베스 주교가 배를 타고 군도를 방문했을 때, 쇄빙선의 조타실을 담당했던 이죠. 군도로 가려면 이자가 있어야 할 겁니다.”

주교는 낙원 측의 연락을 받기 전에, 사실 반 포기 상태였단다.

세상이 이리되기 전부터 교단으로부터 상종을 말아야 할 자로 낙인찍혔기에, 고위신관 대부분이 낙원에 갔을 때 그는 버려진 거니까.

그래서 그는 낙원의 입구를 찾을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이 저를 받아주지 않을 거란 생각에, 수도의 모든 사람과 함께 자살하는 계획을 세운 거였다.

낙원 측이 애를 찾아주는 조건으로 접촉을 시도했을 때는 희망에 부풀어서 죽을 생각을 접은 모양이지만.

“수도 아래 낙원으로 가는 길이 있다는 말은 주교가 퍼트린 거짓이에요. 낙원의 입구는 군도에 있을 겁니다.”

“하지만 타구역 사람들도 배를 타고 가서 확인을 했을 텐데.”

데일의 말에 리븐은 고개를 저었다.

“섬이 여러 개라 각 구역에서 일부 섬을 맡아서 찾았어요. 갈베스 주교는 그 여러 섬 중 어느 섬이 낙원의 문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색해 봐야 할 섬을 배당할 때 그 섬엔 신전 세력이 갔죠.”

“그럼 당신도 그 섬을 압니까?”

“압니다.”

리븐이 안다는 말과 함께 내민 것은 돌돌 말린 지도였다.

애런을 안고 있는 나 대신 데일이 지도를 받아들었다.

펼친 지도를 한동안 쳐다보던 그가 반가운 얼굴로 지도를 품에 넣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이상 수도에 머물 이유가 없어, 사람들을 데리고 온 뒤에 바로 출발하자.”

항구는 신전 바로 옆이었다.

이미 신전에 와 있는 일행이 여기서 쉬는 동안, 그는 타운하우스의 남은 사람들을 데려오려는 것 같았다.

그가 군인들을 향해 몇 걸음 걸어 나가다 대뜸 뒤를 돌아 달려왔다.

“난 가지 않을 거야.”

“네?”

“넌 많이 지쳤고 내가 필요해. 나는 네 옆에 있을 거야. 넌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

가만히 서 있자, 그가 다가와 품에 애런을 안고 있는 내 어깨를 가볍게 팔로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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