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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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추위 속에서 눈을 떴다.
초점이 덜 잡힌 상태에서 처음 눈에 띈 것은 갈색 벽돌로 쌓아 올린 불그스름한 벽이었다.
‘벽돌집?’
낯선 장소를 살펴보다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옆구리에 뜨끈한 체온이 느껴진다 싶더니 확인해 볼 것도 없이 애런이었다.
아이는 여느 때와 같이 내 옆구리로 파고든 채 옷자락을 손에 쥐고 잠들어 있었다.
‘커다란 손이 날 거울 속으로 끌어당겼었지.’
그 후 눈을 떠보니 여기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애를 써도 앞으로 닥칠 일이 좋은 일은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좋은 일로 사람을 부를 땐 적어도 이런 식으로 부르진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이번에도 아이를 데려가려는 게 목적이려나.
‘내 가방.’
있다, 다행이었다.
커다란 전신 거울 옆에 놓인 가방을 끌어당겨 안을 살폈다.
내 폰, 무전기, 총…….
가방 안 물건들은 누군가 손대지 않은 그대로였다.
나와 애런을 이곳에 데려다 놓은 놈이 머저리라서 가방을 그대로 둔 건지, 아니면 이 정도 무기는 소지하고 있어도 우리를 제압하는 데 별문제가 없는 놈이라 신경을 안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다행이다. 데일에게 연락해야 해.’
무전기를 켜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그와 약속해 둔 주파수로 맞췄다.
“아아, 데일 저예요. 무전기 수신되나요? 된다면 응답해 줘요.”
-칙, 치지직.
“데일.”
-치이이.
기대했던 응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거리가 먼 거야.’
수도로 들어오기 전, 데일이 8구역에 있는 동료들과 연락하기 위해 무전기를 켠 곳은 16구역 바로 바깥이었다.
‘무전기의 송수신 거리는 그 정도가 한계인 거다.’
망했군. 알아낸 사실이 있다면 이 벽돌집이 8구역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덜컥, 덜컥덜컥.
집 안이 왜 이리 추운가 했더니, 여닫는 나무 창문이 활짝 열린 채 덜컥거리고 있었다.
‘일단 나가자.’
누군가 우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 데려다 놨다는 것은 곧 돌아온다는 소리였다.
부모 손을 놓친 미아도 아니고 여기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애런.”
나는 작은 목소리로 애런을 흔들어 깨웠다.
“애런 일어나야 해.”
“벨?”
“응. 일어나, 우리 꼬맹이.”
아이는 일어나자마자 낯선 환경을 보고 겁을 먹은 눈치였다.
“벨, 여기…….”
“응. 여긴 낯선 곳이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랑 대화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만 하는 거야.”
“…….”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다.
작은 목소리로 하랬더니 애런은 아예 소리도 내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여길 나간 후에, 빠르게 움직여서 형한테 연락할 수 있는 거리까지 갈 거야. 이해했어?”
“응.”
“그래, 가자.”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손이 잡힌 아이가 겁에 질린 얼굴로 내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벨, 벨. 나 잠들기 전에 우리를…….”
일단 밖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창문 너머로 밖부터 살피고 움직일까.
여전히 바람에 덜컥거리는 창문 쪽으로 다가가는데, 밖에서 멈춰 서는 차 소리와 낯선 이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쉿.’
입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리븐 신관님은 허술하네.”
“빼돌린 애를 저런 곳에 둔 거면 거저 데려가란 소리지.”
‘빼돌린 애.’
창문 너머로 동물 가면을 쓴 세 명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애런!’
애런도 낯선 이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눈짓하자 아이는 구석으로 가 몸을 웅크렸다.
‘죽여야만 하나?’
역시나 이번에도 목적은 애런 같은데, 저들을 죽이지 않고 애를 포기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을까.
있다고 해도 그 전에 애런이나 내가 다치지 않을까, 또는 죽거나.
“열쇠는?”
“따야지.”
“창문이 열려 있네?”
창문 밖에서 누군가의 걸음걸이 소리가 뜀박질 소리로 바뀌었다.
나는 창문 바로 옆에 붙어 서서 숨을 죽였다.
지척으로 다가온 뜀박질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쑤욱, 돼지 가면이 열린 창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저기 있다!”
돼지 가면의 시야에 먼저 들어온 것은 구석에서 몸을 떨고 있던 애런이었다.
왼쪽 구석에서 아이를 확인한 돼지 가면이 천천히 내가 서 있는 오른쪽으로 목을 돌릴 때였다.
-탕!
아주 가까웠기에 정확히 맞출 수 있었다.
내가 쏜 총알이 돼지 가면의 머리 대신 오른 어깨에 박혔다.
“아악!”
돼지 가면이 어깨를 부여잡으며 창문에서 멀어졌다.
나는 재빨리 창문을 닫으며 소릴 질렀다.
“당신들 그 몽타주를 본 건가요? 그 몽타주의 내용은 다 거짓이에요!”
“…….”
“애를 데려가도 애만 빼앗을 뿐, 그들이 당신들에게 낙원의 거처를 내어주진 않는다구요! 경고의 의미로 한 발을 쐈지만, 여기서 물러간다면 더 쏠 생각은 없어요!”
애만 빼앗긴단 말? 물론 거짓말이다.
이 거짓말이 먹혀서 저놈들이 ‘아, 예 그렇군요!’ 하고 돌아갈 확률? 희박하지.
하지만 ‘아이가 어찌 될지도 모르면서 아이를 넘기려 하다니 너무 비인도적이지 않나요? 포기하세요!’라고 하는 것보다는 확률이 높아 보였다.
동물 가면 세 놈이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모양인지 밖이 조용했다.
그 침묵이 정말이지 공포스러웠다. 제발, 제발…….
‘역시나.’
-끼익.
짧았던 침묵은 슬며시 열리는 문소리에 깨졌다.
열린 문으로 먼저 들어온 것은 놈들이 아닌 놈들의 그림자였다.
‘왜 바닥에 비친 그림자가 둘뿐이지.’
라는 의문을 가졌을 때.
-탕탕탕탕탕!
닫힌 나무 창문 쪽으로 총알 세례가 쏟아졌다.
머리에 쓴 후드 위를 다시 팔로 감싸고 몸을 말았다.
패딩을 입고 있던 덕에 죽지는 않았지만, 여러 명한테 단체로 두들겨 맞는 듯 몸이 아팠다.
‘XX.’
“벨!!”
내가 바짝 웅크렸던 고개를 쳐든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악어 가면을 쓴 놈의 어깨에 들춰 업힌 애런이 벽돌집에서 멀어지며 내 이름을 부른 순간.
내가 살기 위해 고개 숙였을 때, 집 안으로 들어온 두 놈이 애런을 낚아챈 거다.
나는 일어나 달려 나가며 총을 쐈다.
다리를 맞은 한 놈이 픽 고꾸라졌고, 나머지 두 놈은 차에 타 시동을 걸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차된 차가 보였다.
-탕!
운전자석 창문을 깨고 들어가 앉았다.
다행히 열쇠는 꽂혀 있었으나 기름이 없었다.
아이가 탄 차가 멀어지는 모습이 보였고 내가 탄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XX! XX, 진짜!”
‘다 죽여버릴걸.’
돼지 가면이 창 안으로 목을 집어넣었을 때, 어깨가 아닌 머리를 날리고.
되지도 않는 시도를 할 게 아니라 집 밖으로 나가서 남은 두 놈도 쏴버렸어야 했다.
패딩 위로 맞으면 아프긴 해도 그뿐 죽진 않으니 가능했을 텐데.
나는 가지 않는 차 핸들을 쥐고 무너졌다.
‘지켜준다고 약속했는데.’
그렇게 말해놓고서.
“아, XX 어떡해…….”
여기가 어딘지도 파악을 못 했고, 가면 쓴 놈들이 누군지, 애런을 어디로 데려갔는지는 더욱 알 길이 없었다.
‘아냐, 알 방법이 아직 있어.’
내가 다리를 맞춘 놈이 아직 살아 있…….
-탕!
내가 아닌 누군가가 쏜 총소리였다.
나는 핸들에 처박고 있던 머리를 들어 소리의 근원을 쳐다보았다.
다리에 총상을 입은 놈이 엎어져 있던 곳, 그곳에 또 다른 가면을 쓴 사람들과 그 가운데 선, 하얀 옷을 입은 금발의 남자가 보였다.
무리 중 뱀 가면을 쓴 자의 손에 총이 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방금 총성의 주인은 그인 듯싶었다.
다리에 총상을 입고 땅바닥을 기던 놈은 가면이 벗겨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똑같이 가면은 썼는데 서로 적이라 죽인 건가? 내분?’
어쩐지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저쪽은 아까 세 명보다도 더 다수니까, 냅다 도망치거나 총을 쏴서 나도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보여주거나 일단 뭐든 해야 할 상황인데도.
‘이렇게 가만히 있다 보면 죽겠구나.’
아, 내가 지금 죽고 싶어져서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 건가.
‘나 멘탈 쓰레기 같네.’
이렇게 쉽게 죽고 싶어지나?
“하하, 하하…… 참.”
내가 운전자석에 가만히 앉아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대자, 가면을 써서 얼굴이 안 보이는데도 그들이 좀 당황했다는 게 느껴졌다.
‘정신 차리자.’
다리에 총상 입은 놈은 죽었지만, 애런이 끌려간 곳을 알려줄 다른 대타들이 나타나 줬잖아?
여러 명이 나타났으니까 한 명이 입을 안 열면 다른 놈을 조지면 되고, 다른 놈도 안 열면 또 다른 놈이 있어.
“굿이네.”
잘된 거지.
“좋아, 좋다고.”
실성한 듯 웃던 사람이 이번엔 좋아, 좋아하면서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 것을 동물 가면들은 묘한 분위기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힘차게 차에서 내렸다.
“방금 내 애가 납치당했는데.”
“…….”
“너네랑 비슷한 가면 쓴 놈이 끌고 갔거든. 자, 어디로 갔을까? 어서 말해보자. 너네 걔 친구들이지? 내가 지금 너네 친구 때문에 화가 많이 났는데, 내가 어떤 사람이냐면…… 나한테 그 총을 막 갈겨도 나는 안 죽어, 응. 근데 내 총에 너넨 죽어. 그러니까 빨리 말…….”
“벨?”
동물 가면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분홍 토끼 가면을 쓴 자였다.
나는 감흥 없는 얼굴로 총을 쥔 팔을 앞으로 뻗으며 말했다.
“으으응~ 수작질은 안 통해.”
그때, 흰옷을 입은 금발 남자가 토끼 가면을 막아섰다.
발로 차면 넘어질 것같이 혈색이 파리한 인간이었다.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토끼 가면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막아서는 모습이 어딘가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신관?’
잘 보니 신관들이나 입을 법한 옷으로 보였다.
“뒤에 계세요. 제가 대화해 볼게요.”
“아, 수작질하면 저 화나요~ 니들 뭐냐고. 뭐 하는 놈들이고 애 어디로 데려갔냐고!!”
-탕!
내가 쏜 총알이 금발 남자의 발치에 박혔다. 그리고 그는 꼭 총에라도 맞은 것처럼 앞으로 허리를 굽히더니.
“우욱.”
붉은 피를 토해냈다.
뭐야! 나 아니야!
“보좌주교님!”
“리븐 님! 괜찮으세요?”
눈 덮인 바닥과 흰옷이 투두둑 떨어진 붉은 핏방울로 더럽혀지자, 동물 가면들이 금발을 에워싸고 걱정했다.
그중, 금발에게로 몰려가지 않은 두 가면이 서 있었으니.
키가 작은 분홍 토끼 가면과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보라색 토끼 가면을 쓴 자들이었다.
그들은 아까부터 이상하리만치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는데, 어수선한 지금의 상황을 틈타 저들이 나를 해하려 들지도 모른단 경각심이 들었다.
나는 경계심을 풀지 않고 그들을 노려봤다.
“벨.”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애를 납치하기 위해서 꽤 많은 걸 준비했나 봐.”
“벨, 나예요.”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야. 어디서?’
라는 의문이 들었을 때, 토끼 가면이 제 가면을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