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막을 생각이 없어서 총도 생겨나질 않은 거냐구.
“데일…….”
“아직 이들과 충분한 대화도 설득도 하지 않았어. 너 어딜 가겠다는 거야? 저 몽타주가 이곳에만 뿌려졌을 거라고 생각해? 적어도 여긴…….”
나는 데일의 말을 다 듣지 못하고 중간에서 끊어먹었다.
꼭 속에서 올라오는 토악질을 참아낼 수 없는 것처럼, 남자에게로 말이 튀어 나갔으니까.
“어딜 가겠다는 거냐면, 우리와 애런이 가장 안전한 곳이요. 그래서 여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어요.”
“…….”
“데일도 그렇게 생각해서 여기라는 판단을 한 거예요? 우리가 가장 안전한 곳이 여기예요? 데일이 생각하는 우리는 저들인가요, 애런인가요.”
“벨.”
나는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슬픈 눈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남자에게서 뒷걸음쳤다.
“대답 못 하는 거예요? 망설여요, 지금? 그래요?”
이제까지 누구보다 의지해 왔던 사람이 소름 끼치게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오한인가, 갑자기 몸이 오슬오슬 추웠고 팔에 돋는 닭살을 느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등 뒤에 있는 별관을 향해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어떻게, 어떻게 그래. 어떻게 대답을 못 할 수가 있어.’
“도망가려 한다!”
천천히, 천천히 뒤로 걸음을 옮길 때, 사람들이 나와 애런을 향해 달려들었다.
군인들이 몸으로 쳐놓은 바리케이드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타앙!
나는 별관 쪽으로 뛰며 총성이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표적이 된 내게서 사람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에즈라가 하늘을 향해 발사한 총성이었다.
일순 사람들이 귀를 막고 몸을 움츠렸다.
레이스가 나를 향해 달리는 모습이 보였고 그 뒤로 에즈라가 별관을 향해 뛰고 있었다.
❅
나는 쫓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별관의 나선형 계단을 뛰어올랐다.
“벨, 울어?”
품에 안긴 애런이 작은 손으로 내 볼을 문질렀다.
쪽팔리게도 아이의 손바닥에 내 눈물로 추정되는 것이 묻어 나왔다.
‘XX. 왜 눈물이.’
나 지금 왜 우냐. 설마 데일이 대답 못 한 거 때문에 우냐? XX, 저 새끼가 뭔데. 뭔데 내가 저 남자 때문에 서러운데.
‘잘됐어. 그래, 어차피 언젠가 헤어질 새끼 이참에 잘 가라.’
XX! 잘 가긴 뭘 잘 가! 개서러워, XX! 우리 동료 아니었냐고! 근데 대답을 못 해? 망설여? 야, 진짜 너 너무한 거 아냐?
생각이란 건 원래 가만히 앉아서 하거나 누워서 해야 하는 건데.
애를 안고 쉼 없이 계단을 뛰어오르며 생각을 정리하려니까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어쨌든 하나는 확실했다.
‘데일 이 개자식.’
바쁘게 움직이는 두 다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면 잡힐 것이다.
데일이 있으니 당연히 잡혀도 죽진 않겠지. 대신 날 설득하려 들 것이다. 그러니 절대 잡힐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잡히지도 않고 설득당하지도 않고 난 여길 애런과 내 동료들과 빠져나갈 거니까.
내 방으로 들어간 후 문을 걸어 잠갔다.
내 핸드폰, 내 가방, 중요한 물건들을 챙긴 후 돌아서자,
-쾅쾅쾅쾅.
사람들로 가득 찬 방문 너머가 눈에 그려졌다.
-촤라락.
커튼을 젖히고 창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1층에서 내게 손을 흔드는 레이스와 입장을 정하지 못한 몇몇 방관자들이 보였다.
‘뛰어야 하나?’
애런까지 품에 안고서?
창틀에 발을 올렸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고작 3층 높이인데 왜 이렇게 높아. XX, 무서워!
-쾅쾅, 쾅쾅쾅쾅!
문 뒤는 나와 애런을 잡으려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데일이 아닌 레이스에게 기부를 해서 다 재워 버릴까.’
레이스가 뭐라고 했더라, 동시에 수십 명을 재우면 영영 재우는 건 불가능하고 금방 깬다고 했던가.
어차피 저들을 영영 재울 생각은 없었다.
“레이스! 눈앞에 뭐가 뜰 건데 그거 거절하지 말고 수락하면 돼요!”
의미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레이스는 눈을 껌벅였다.
지금은 몰라도 뜨면 다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해졌지?’
레이스에게 기부하려던 나는 행동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문 뒤의 소음이 갑자기 멎었다.
그때.
[아이템 ‘자선냄비(크기: 소형)’]
[불우이웃이 당신께 기부를 요청합니다.]
[포인트를 자선냄비에 넣어 대상에게 기부해 보세요.]
먼저 기부를 요청할 인간은 데일뿐이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이 자식아, 내가 서러워 죽을 뻔했다.
[대상이 기부를 받았습니다. 기부 대상의 능력치를 일정 시간, 일부분 활성화합니다.]
수락하자마자 방문이 뻥 열렸다.
쓰러진 문짝 앞에 서 있는 데일 뒤로, 사람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통조림 너 진짜 뛰어내릴 생각이었냐?”
“믿었던 동료가 입을 꾹 닫고 말을 안 하니 뛰어내리는 것밖에 더 있어요?”
어쩐지 데일은 제가 더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야, 서러운 건 나야!
아냐, 이게 아니지.
데일을 살살 구슬려서 이곳을 함께 탈출하는 게 가장 좋으니까 말이다. 좋은 말, 예쁜 말을 하자고.
나는 창틀에서 발을 내렸다.
발을 내리고 남자에게로 한 발 다가서는데.
“데일이 어떤 입장인지 모르는 건 아닌데……!?”
나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창문 옆에 서 있던 전신 거울, 그곳에서 쑥 빠져나온 커다란 손이 내 몸을 거울 속으로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
리븐은 거울 앞에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흔들어 깨우려 노력하는 남자아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벨, 벨 일어나.”
두려운 눈망울로 낯선 자를 흘끔거리며 아이는 누운 여자의 몸을 흔들었다.
“저기.”
“…….”
소리 내 부르자,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아이의 눈은 왕방울만 해졌다.
“거울을 통과했기 때문에 잠시 정신을 잃은 상태입니다. 아무리 흔들어도 지금 당장은 일어나지 않아요.”
“…….”
커다란 눈을 의식적으로 크게 한 번 깜빡인 아이가 조심스럽게 제게 물어왔다.
“그럼 벨은 괜찮은 거야? 다치지 않은 거야?”
“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순간 아이는 안심이 됐는지 휴,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여전히 여자가 걱정되는 모양인지 아이의 불안한 시선은 여자의 얼굴 위에 내내 머물렀다.
지금 저 어린 남자아이가 걱정해야 할 대상은 저 여자가 아닌데.
“이름이 애런이죠?”
질문하자 아이는 궁지에 몰린 고양이처럼 날을 세웠다.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
“거기 누워 있는 여자분이 당신을 애런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으니까요.”
긴장했는지 아이는 침을 꼴깍 삼켰다.
리븐은 잔뜩 긴장한 아이의 모습을 세심히 살펴봤다.
보기엔 평범한 어린아이인데, 중요한 실험체라 이거지?
‘저 작은 몸에 악신을 품고 있다니.’
무슨 실험을 한 건지, 그 내용은 쏙 빼먹고 얘길 한 탓에 알 순 없었지만, 아이가 실험체고 그 안에 악신을 품고 있을 거라던 그들의 말이 적어도 거짓은 아니란 건 알겠다.
거울을 넘어오면 보통 정신을 잃기 마련인데, 어린애 주제에 저렇게 똘망똘망 멀쩡한 상태를 보면 말이다.
리븐이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서자, 아이는 자지러지듯 몸을 움츠리며 여자 위로 엎어졌다.
“그 여자한테 해를 입힐까 봐 그렇게 행동하는 건가요?”
해는 네가 입히고 있는 걸 텐데.
‘자각을 못 한 상태인 건가?’
리븐은 다가가 여자의 몸 위로 엎어진 아이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앙!”
그러자 아이는, 맹수가 한껏 몸을 낮췄다가 사냥감에게 도약하듯 벌떡 일어나 리븐의 손을 작은 입으로 콱 깨물었다.
“으.”
“…….”
제 손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 아이를 보며 리븐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실험체라더니 뭔가 더 할 수 있는 건 없는 건가요? 고작 무는 게 다예요?”
회심의 한 방이라 생각한 모양인데 상대에게서 전혀 타격을 찾아볼 수 없자, 아이는 소심하게 물고 있던 손을 놔줬다.
손에 아이의 작은 잇자국이 동그랗게 났다.
리븐은 그 잇자국을 빤히 바라보았다.
세게 물었는지 어떤 곳은 피를 봤다.
고아로 길거리를 떠돌던 시절,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얼굴이 멀쩡한 날을 찾기가 더 어려웠던 때에.
어린 리븐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발길질을 하고 주먹을 휘두르고 그마저도 안 되면 이렇게 상대를 무는 일이었다.
아이는 참 약해.
‘아,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처음 보는 아이에게서 자신의 옛 모습이나 떠올리고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저것은 사람이 아니기도 했고.
“그런데 어쩌죠. 그쪽 보호자가 깨어나려면 한참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때까지 잘 지켜줄 수 있겠어요?”
“벨은 내가 지켜.”
어쩐지 그 모습이 보기 싫어진 리븐은 고개를 돌렸다.
“별로 아프지도 않은 상처나 내놓고서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눈치네.”
“…….”
공교로운 일이었다.
8구역에서 신의 은총을 받았다는 얘기가 들어와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
5, 6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의 얼굴을 들고 와 찾아달라 말하며 대가로 낙원의 한 자리를 내어주겠다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수도를 방문한 횟수가 채 몇 번밖에 없는 리븐도 알고 있던 제국의 귀족이었다.
그들이 능력을 쓸 수 있게 해주겠다며 내민 것은 마나핵과 같은 색을 띤 납작한 구슬 같은 물건이었다.
리븐은 그 구슬을 통해 종말 이후에는 쓸 수 없었던 능력을 사용해 때마침 관심을 두던 8구역부터 아이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 애다.’
애만 데려온다는 게 여자와 아이가 꽉 달라붙어 있던 탓에 둘 다 넘어와 버렸지만.
리븐은 회상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오래 자릴 비우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이를 수중에 데리고 있다는 연락도 해야 했고, 기다리고 있을 신도들도 이곳으로 데려와야 했다.
“전 여길 뜨면서 문을 잠그고 나갈 건데, 잠긴 문을 열 수 있다고 해도 이곳에서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걸 말해줄게요.”
“…….”
“봤죠? 당신 몽타주가 쫙 깔린 거. 여길 나가면 더 곤란해질 뿐이에요.”
아이는 독기를 품은 눈으로 저를 노려봤다.
“처음 보는 사람은 다 개새끼야. 낯선 사람의 말은 믿지 않아.”
리븐은 아이가 내뱉은 험한 말에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개새끼가 아닌 사람도 있나?”
“…….”
“그 개새끼 중에 아마 내가 제일 개새끼일 거야.”
그는 탁자에 벗어두었던 흰 장갑을 꼈다. 손에 생긴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배고프면 저거 먹고 있어요.”
긴장으로 파들파들 몸을 떠는 작은 생명체를 두고 그는 집에서 떠났다.
한동안 독기 서린 눈으로 벨을 지키던 애런은, 몸을 뒤덮는 추위에 스멀스멀 밀려오는 졸음을 어쩌지 못하고 벨 위로 풀썩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