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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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런은 며칠 새 이곳 사람들이랑 꽤 친해졌다.
오늘도 사람들 사이에서 기죽거나 어색해하지 않고 트리 꾸미기에 열심이었다.
이곳엔 애런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몇 명 있었는데 다행히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호텔에선 어쩐 일인지 아이들 사이에서 조금 위축되는 것 같아 걱정했는데 우려였나 보다.
잘 어울려 지내는 모습이 날 기분 좋게 만들었다.
나는 사다리에 올라 빨간 오너먼트를 장식하는 애런의 모습을 별관 창가에 서서 바라보았다.
‘보고 싶겠다.’
정말 보고 싶을 거다. 일이 순조롭게 풀려서 집으로 돌아가면 너무 기쁘겠지만, 그리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저 모습은 많이 보고 싶을 것이다.
‘찍자.’
나중을 위해서 한 장이라도 더 찍어둬야지.
나는 품속에서 꾸물꾸물 폰을 꺼내 카메라를 확대했다.
별 오너먼트를 다는 애런, 솔방울을 달다가 손에서 놓쳐서 친구의 머리 위로 솔방울을 떨어트리고 미안해하는 애런, 주섬주섬 사다리에서 내려오는 애런, 내려와서 빨개진 얼굴로 콧물을 훌쩍이는 애런……. 싹 다 찍어, 그냥.
트리가 크니까 다람쥐처럼 붙어 있는 애런이 더 귀엽게 찍혔다.
우리 집에 있는 트리를 소환한 다음 옵션으로 사이즈를 키운 건데 그러길 참 잘했다.
“와, 다했다!”
애런의 사진으로 사진첩을 가득 채우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크리스마스트리가 완성되었음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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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 점등식은 모두가 저녁을 먹고 난 이후였다.
배를 두둑이 채운 사람들이 하나둘 트리 아래로 모여들었다.
트리 조명이 넉넉히 소환됐다. 남은 조명은 정원의 벤치나 모퉁이를 장식하는 데 쓰였다.
“3, 2, 1!”
이 사람들 이벤트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트리 점등식을 위해 타운하우스의 모든 공간의 불을 끄고 모인 상태였다.
짙은 어둠 속, 누군가의 카운트 소리에 맞춰 동시에 여러 곳에서 불이 켜졌다.
“예쁘다.”
켜진 불빛에, 사람들이 작게 환호했다. 야단스럽지 않고 시끄럽지 않았지만 그들은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시스템 창이 연달아 떠, 내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으니까.
[스킬 사용 대상이 감사해합니다.
획득한 감사 포인트를 생명력으로 변환하여 저장합니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밝게 점등된 트리를 구경하는데 데일이 옆에 와 앉았다.
“네, 좋아요. 난 트리만 가져다 놨는데 알아서 꾸며주니 좋은걸요.”
“안 춥냐? 따듯하게 덮어라. 통조림 상한다.”
그가 내 어깨 위로 이불을 둘렀다. 이미 패딩 입고 있는데 왜 자꾸 이불을 외투로 쓰려고 하지.
“와아.”
아이들이 트리 주변을 뱅뱅 돌며 눈싸움을 벌였다.
눈덩이가 몸을 맞고 부서질 때마다, 은은한 트리 조명에 아이들의 얼굴이 해맑게 빛났다.
그 사이로 같이 웃으며 달리는 애런이 보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소릴 질렀다.
“어씨, 애런 뭐 해! 맞춰야지!”
왜 자꾸 맞아만 주냐, 아니 맞추면서 웃어야지. 왜 맞으면서 웃어.
“…….”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게로 이목이 쏠렸기 때문이다.
“좋은 거 가르친다.”
“애런은 맞기만 해도 좋은가 봐요. 난 맞추는 게 재밌던데, 왜지.”
내 의문에 데일은 낮게 웃었다.
한동안 조용히 트리를 구경하다 그가 말을 꺼냈다.
“네 능력은 신기해.”
“네 전 요정이니까요. 요~정. 기억 안 나요? 샤라랑~ 종의 요정, 등! 장!”
오랜만에 추억 속 대사를 내뱉어봤는데 남자가 안 웃어서 기분이 나빴다.
“사람이 적당히 분위기를 맞춰줄 줄도 알아야지 원.”
데일은 가볍게 내 말을 씹고 제가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근데 왜 트리야?”
“트리요?”
“네가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들 많았을 거 아냐. 정확히 어떻게 굴러가는 능력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중에서 왜 트리였냐고.”
“그야…….”
네가 크리스마스를 묻는 내 질문에 답을 해줬으니까.
“크리스마스니까요. 크리스마스에는 트리 꾸미는 게 당연하잖아요?”
“……됐다.”
데일은 뭔가를 더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가 나른한 눈빛으로 정원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왜 트리였냐면.”
“…….”
“크리스마스에 트리를 장식하는 일은 생존하는 데 전혀 필요하지 않은 일이라서요.”
그러자 그가 모르겠다는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크리스마스트리요. 생존에 필요하진 않잖아요. 생존에 필요한 건 이런 것들이죠. 먹고 자고. 사람은 먹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으면 죽고 생활을 해나갈 거처가 없어도 죽죠.”
왜 두툼하게 입었는데 이불을 꺼내다 둘러주지, 라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데일의 판단이 맞았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은근한 추위가 몰려왔다.
나는 어깨에 두른 이불을 끌어다 여미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에 트리를 장식하지 않는다고 해서 죽진 않아요. 그치만요. 단순히 오늘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진 않잖아요. 오늘 죽지 않았음에 감사하는 일과 행복은 별개니까요. 행복하기 위해서는 작지만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을 오늘도 내일도 꾸준히 해야 한다고요.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듣는 것, 예쁜 물건을 만지거나 보는 것, 즐거움을 주는 글을 읽는 것,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들을 하며 작게나마 행복해하는 주위 사람들을 눈에 담는 것. 그런 것들이 힘을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내가 맞춘 건지 얻어걸린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나는 성공했다.
[희망감: 67 / 절망감: 32
⇒ 희망감: 79 / 절망감: 18]
[퀘스트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조건: 희망 수치 70 이상, 절망 수치 30 이하]
[세 번째 메인 퀘스트: 기울어진 시소가 클리어되었습니다.
로딩 중…….]
‘클리어했다!’
나는 기쁜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까만 밤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렇다면.”
데일은 답지 않게 말을 망설였다.
“행복해하는 주위 사람들을 눈에 담는 것. 그중에 나도 있겠다?”
남자의 뒤로 장식한 조명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의 얼굴은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은 표정이었다.
순간 너무 빤히 바라보는 것 같아 나는 시선을 피했다.
“너무 자신 있게 단언하는 거 아닌가.”
당연히 그렇지, 너무 당연한걸. 하지만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말해도 될까? 이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있어요.”
이 정도는 표현해도 될 거다. 우린 친한 동료 사이기도 하니까.
“당연히 데일도 있어요. 데일도 있고 애런도 있고 에즈라도 있고…… 다 있죠. 그러니 더 자주 웃어줘요.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그렇군.”
흘깃 본 남자의 옆얼굴은 조금은 쓸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래. 더 자주 웃을게. 널 보면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나도 기분이 좋아지더라고. 웃기게 생겨서 그런가?”
‘어, 위험한데?’
이 자식 말에 은근한 애정을 섞었잖아? 더 나가면 안 된다. 나는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데일의 어깨를 퍽퍽 치며 소리 내 웃었다.
“아하하하, 나는 웃어도 되지만 데일은 안 되죠. 유부남이잖아요.”
“아직도 그 소리야? 재미없어, 이제.”
데일은 얼굴에서 쓸쓸한 기색을 지워내고 다시 장난기 어린 표정이 되어 날 쳐다봤다.
“나 정말 그 여자랑 안 했다니까.”
“그걸…… 그걸 내가 뭐, 음 어떻게 알아요. 워낙 여러 번이라 헷갈리는 건지 뭔지 알 게 뭐야.”
“진짜래도. 난 헷갈릴 일이 없다니까.”
비밀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남자의 목소리는 작아져 있었다.
“하…… 안 되겠다. 너 이리 가까이 와봐. 귀 대봐.”
“아, 싫어요.”
아, 이 자식, 싫다니까 제 얼굴을 들이민다.
그렇지 않아도 밖이라 추운데 남자가 귀에 얼굴을 처박고 말을 하자 더운 김이 귓속으로 훅 감겨들었다.
아니, 왜 이래.
“나 관리 잘 했다.”
이게 무슨 말이지. 관리를 잘 했다는 게 당최 무슨 소리여.
갑분 관리라는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관리요? 무슨 관리요.”
남자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아직 전이라고.”
나는 진심으로 놀라버렸다.
그럼 아직 없으면서 어찌하여 그렇게 당당하게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놈처럼 지껄였단 말인가. 알 수 없었다.
“전이라고요? 나한테 맨날 잘하느니 어쩌느니 해놓고서 말을 왜 뒤집어요.”
“그거야…….”
데일은 아주 거만한 표정으로 나른하게 벤치에 허리를 기댔다.
“안 해봐도 알아.”
“아니, 님 뭐 미래라도 보고 왔어요? 안 해봤는데 잘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러나 내 날 선 공격에도 데일은 전혀 흔들리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되어갔는데…….
“어중간한 놈들이야 해봐야 결과를 아는 거고 나는 이미 확정이야. 잘할 수밖에 없게 태어났다고. 알겠냐?”
나는 놈의 자신감에 말을 잃었다.
“…….”
“정 믿기지 않는다면 특별히 확인하게 해줄 용의가 있어. 어때.”
“아니, 난 없어. 영원히 안 궁금해.”
당장 확인시켜 줄 듯한 기세에 나는 몸을 일으키다 말고 소릴 질렀다.
[스킬 사용 대상이 감사해합니다.
획득한 감사 포인트를 생명력으로 변환하여 저장합니다.]
절묘한 타이밍에 시스템 창이 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절묘한 타이밍에 레벨 업도 함께 이뤄졌다.
[클래스 ‘종의 요정’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종의 요정(Lv.5)’
⇒ ‘종의 요정(Lv.6)’]
[클래스 레벨 업에 따라 스킬 ‘탐색(Lv.6)’의 적용 범위가 확장됩니다.]
[‘탐색(Lv.6)’으로 특정 대상의 수치심과 죄의식을 탐색할 수 있습니다.]
‘수치심을 탐색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렇다면.’
나는 바로 데일을 돌아봤다.
어디서든 거리낌 없이 바지를 벗을 수 있을 것 같은 데일의 수치심은 아주 낮게 나올 게 분명했다.
30 이하로 나온다에 내 방 벽에 붙어 있는 우리 언니의 초동 포스터를 걸겠다.
‘아예 없을 수도 있고. 탐색해 봐.’
그러자 시스템이 내 기대를 배반하는 창을 띄웠다.
[부적합한 대상입니다.]
그럼 도대체 누굴 대상으로 측정해 주겠다는 거지?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 저 위를 봐요!”
위를 보라는 누군가의 외침에 중앙정원에 모인 이들 모두가 고개를 하늘로 쳐들었다.
그리고 나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비행선!’
까만 밤하늘 가운데 하얗고 둥근 기체를 가진 비행선이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