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버튼이 아주 많네.”
데일은 능청스럽게 아무 버튼이나 누르는 척을 하며 마이크 온 버튼을 눌렀다.
“아니!”
“저건 신의…… 빛인 거야.”
마이크 손잡이 끝부분에 달린 작은 미러볼이 현란한 빛을 내뿜자 사람들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발광하는 미러볼 불빛을 따라 움직였다.
노래방 마이크와 led 탬버린을 세트로 구매하면 끼워주는 이벤트 미러볼이었다.
‘역시 저 미러볼은 작지만 효과가 좋아.’
엄마가 저 미러볼 하나만으로도 노래방 분위기가 난다고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일단 화려한 불빛이 나는군요.”
데일은 물건의 용도를 모르는 사람처럼 마이크를 몇 번 휙휙 돌렸다.
그러다 끝에 가서 마이크의 머리 부분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잠깐…… 소리도 울립니다.”
그리고 곧 제 입으로 마이크를 가져갔다.
“아아. 소리를 증폭시키는군요.”
당연히 목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이 마이크임을 깨닫고, 노래방 마이크의 용도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신의 음성을 널리 퍼트리라는 목적으로 내려주신 게 아닐까요?”
“하지만 신께서 저희에게 무슨 말씀을 해주시진 않았잖아요. 식량과 저 물건만 주셨을 뿐.”
사람들은 다시 고민의 연쇄에 빠져들었다.
그때, 데일이 다른 버튼을 눌렀다.
노래방 마이크는 주로 엄마가 사용했지만 나도 가끔 한 곡씩 부르곤 했다.
하여 많진 않지만, 엄마가 자주 부르는 곡들과 내가 자주 부르던 곡들이 마이크에 저장되어 있었다.
때맞춰 데일이 누른 버튼은 노래를 가사가 있는 버전으로 재생시키는 것이었다.
마이크에서 아주 익숙한 그리고 중독적인 걸그룹 노래가 흘러나왔다.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다들 조용히 합시다!”
사람들이 숨죽였다.
어느덧 중독적인 전주가 지나가고 이곳의 언어로 바뀐 가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단 한 줄의 가사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중한 얼굴들이었다.
침묵 속에서 길다면 긴 3분 40초가 흘렀다.
사람들이 방금 들은 신의 음성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다들 잘 들었습니까?”
침묵 속에서 집중해 가사를 음미한 이들이 각자 의미 있게 들은 구절을 토해냈다.
“절대적 룰을 지키라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내 손을 놓지 말고 결속하자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너무 벅찬 말씀이 많아 무엇부터 얘길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제가 생각할 때 신의 요지는 이겁니다. 위협에 맞서서 너의 적들을 제껴라! 유혹이 깊고 진하더라도 내 맞잡은 손을 놓지만 않는다면 난 너희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신께서 말씀하신 광야는 어디일까요?”
“당연히 최후의 낙원이 아니겠습니까? 신께 의지하여 이 절대적인 고난과 슬픔을 이겨내면 낙원으로 보내주겠단 말씀이 아닐는지요.”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신께서 우리에게 목소리를 들려주셨고 그분의 의지도 내비쳐주신 겁니다! 절망하지 말고 힘을 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흥분해 각자의 목소리를 높였다.
‘어?’
이러라고 준 건 아니었다.
나는 그냥 어려운 상황을 노래나 부르면서 힘내보자는 취지로 준 것이었는데.
[희망감: 59 / 절망감: 39
⇒ 희망감: 67 / 절망감: 32]
‘그래도 수치가 긍정적으로 바뀌었으니 뭐…….’
모로 가도 도착만 잘 하면 되지 않겠는가.
나는 곧 고지가 멀지 않은 수치를 보며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수치를 확인하고 있을 때도, 노래방 마이크에 쏠린 관심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요, 저만 그래요?”
“뭐가요?”
“신전에서 신관님들이 진행하는 행사에 여러 번 참여했었는데요. 그땐 뭐랄까…… 이렇게 흥이 나진 않았거든요. 그래도 신의 말씀을 듣는 성스러운 일이니까 지루해도 꾹 참고 들었단 말이죠”
“어머 그러셨어요? 사실 저도 그래요.”
“저도요. 이렇게 흥이 나는 신의 말씀은 처음 들어봐요.”
“또 듣고 싶지 않아요?”
그러자 이번엔 데일이 눈치 빠르게 노래방 마이크의 다른 기능을 켰다.
가수의 목소리가 제거된 노래방 mr 기능이었다.
“들리시죠? 신의 말씀이 담긴 좀전의 음악으로 먼저 말씀을 숙지하신 후, 말씀이 없이 이 음악만 나오는 걸 틀어서 제대로 암기했는지 확인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데일과 일부 군인들이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나눴다.
사람들은 즐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들 하나씩 마이크를 품에 안았다.
“그런데 캐드 대령님, 이건 어디에 쓰는 물건일까요?”
질문하는 여자의 손에 들린 건 led 탬버린이었다.
나는 이번엔 애런을 내보냈다.
“가서 보여주고 오자.”
“응.”
어젯밤 물건을 소환하자마자 이런 상황에 대비해 나는 애런을 연습시켰다.
내가 나가서 흔들 순 없으니까.
탬버린 소리를 들으면 알아서 용도를 깨닫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역시 무리였나 보다.
‘어제 연습한 결과를 보여줘!’
애런은 사명감 띤 얼굴로 무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 탬버린을 손에 들었다.
상황에 맞게 데일이 다른 곡을 선곡했다.
서서히 음악이 몸에 배는 것을 느끼며 아이가 탬버린의 스위치를 눌렀다.
“세상에.”
“저것 또한 신성한 빛을 내는 물건이었군요.”
-짤랑짤랑.
아이의 귀여운 몸짓에 따라 짤랑거리는 탬버린 소리와 화려한 led 불빛이 본관을 감쌌다.
밤이면 더 화려했을 텐데. 아침이라 좀 아쉬웠다.
“이, 이렇게 쓰시면 돼요.”
아이가 수줍게 말하자 사람들이 애런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아유, 귀여워라. 꼬마야, 넌 이 물건의 사용법을 어떻게 알았니?”
“예전에 신전에서 어떤 신관님이 흔드시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어머 그랬구나.”
나는 쑥스러운 마음에 눈동자가 막 이리저리 굴러가는 애런의 얼굴을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
때를 못 맞추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23일 날 밤, 다행히 내 자기연민 게이지는 녹색 풀충전 상태로 돌아왔다.
저번에는 무엇을 소환하면 좋을까 고민했지만, 이번에는 고민이 없었다.
‘게이지가 다 차기도 전에 결정해 놨으니까.’
역시 모두가 잠들었을 늦은 밤, 은 아니었고 대부분 잠들었지만 몇몇은 안 자고 노래를 부르는 이 밤, 나는 중앙정원으로 나갔다.
소환해 낸 노래방 마이크는 며칠 만에 이곳 사람들의 최애템으로 등극했다.
오늘 밤에도 내가 애정하는 걸그룹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저 곡 낸 지 꽤 지났으니까 지금쯤 신곡이 나오지 않았을까.
신곡은 또 얼마나 중독적이고 안무는 얼마나 멋지며 컨셉은 뭘까.
반드시 돌아가서 신곡을 듣고 말리라.
그러기 위해선 조금 남은 수치를 변화시켜야만 했다.
얼마 안 남았다. 아마 이번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낸다면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한 데일과 레이스가 나를 따라 나왔다.
데일은 무심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레이스는 내가 보여줄 물건에 한껏 기대를 품은 얼굴이었다.
혹시 저 둘 말고 보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어둠 속에서 스킬 이펙트를 끄고 물건을 소환해 냈다.
❅
12월 24일, 성탄절 전날인 크리스마스이브.
아침부터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내내 겨울이 이어지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더는 눈이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신의 은총과 함께 내린 눈이었기 때문이다.
신의 세 번째 은총이 중앙정원에 내렸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한껏 기대에 부푼 얼굴로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추운 날이 이어졌는데, 그날은 평소보다 기온이 조금 더 떨어진 것 같았다.
눈을 뜨자마자 대충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온 사람들의 코와 볼이 추위로 금세 붉게 물들었다.
“트리야.”
그리고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중앙정원 한가운데 높이 솟아 있는 거대한 트리였다.
크리스마스에 트리를 꾸미는 일은 익숙했지만 살면서 저만큼 커다란 트리를 본 적은 없었다.
사람들은 아직 꾸며지지 않은 트리의 거대한 크기에 압도당했다.
“트리 아래 장식볼이 떨어져 있어요!”
노래를 너무 많이 불러 목이 간 누군가가 꺼낸 말에 사람들이 트리 주변을 쳐다봤다.
리본과 다양한 오너먼트, 트리를 꾸미기 위한 각종 장식품이 나무 밑동 주변에 가득히 쌓여 있었다.
“올해도 크리스마스트리를 볼 수 있겠네요. 평범했던 지난겨울처럼 말이에요.”
“계속 앞날에 대해 걱정만 하느라 트리를 꾸밀 생각은 전혀 못 했는데.”
“저도요.”
“저도 그래요.”
사람들이 쉰 목소리로 동의했고 누군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평범한 일상을 잊지 말아요, 우리.”
그 말에 잠시 모두가 침묵했다.
“언제 최후의 낙원에 가게 될지, 언제 다시 안전한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 힘내서 우리의 일상을 지키려고 노력해 봐요. 크리스마스엔 트리를 장식하고, 누군가의 생일엔 그의 생일을 다 함께 축하해 주고요. 아주 작은 거라도 좋잖아요!”
펑펑 내리는 눈에 코끝은 점점 빨개지는데 사람들은 하던 말을 끊고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들 소리 높여 제 의견을 말했다.
“그럼 생일인 사람에게는 그날 초콜릿 바를 2개 선물하는 거 어때요? 우리 이제 식량이 넘치잖아요! 그러니 다른 걸 배불리 먹고 초콜릿은 평소 먹지 않고 생일선물용으로 아껴두는 거죠.”
“괜찮은 생각인걸?”
“나도 동의해.”
“그럼 난 곧 초콜릿을 먹을 수 있겠는데!”
그러나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다.
“안 됩니다! 제 생일은 12월 13일로 이미 지났다고요! 그때쯤이면 우린 이곳을 떠나 낙원에 가 있을 텐데, 그럼 제 초콜릿은요! 전 못 받는다고요!”
“여보, 눈치 챙겨.”
중년 여성이 반대의 목소리를 내던 제 남편의 등을 후려갈겼다.
“초콜릿 안 먹으면 죽니? 어휴, 내 생일날 2개 받으면 하나 나눠주면 될 거 아냐!”
“하하하하.”
부부의 작은 실랑이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누군가 이어지는 웃음 속에서 말을 꺼냈다.
“그렇구만. 힘내서 서로 의지하면서 이 상황을 버티다 보면 돌아오는 크리스마스는 낙원에서 보내고 있지 않겠어?”
꼭 그렇게 될 것이다, 누구도 확신에 찬 대답을 하지는 못했지만, 절대 그럴 수 없을 거란 좌절감 어린 말을 꺼내는 이 또한 없었다.
그들은 그들 안에서 점점 사라져 가던 희망이 다시 피어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다 같이 트리를 장식할까요?”
“트리가 너무 커서 다 같이 한다고 해도 저녁이 되어서야 끝나겠어요.”
“오늘 경비를 나가는 분들이나 해야 할 일이 있는 분들을 제외하고 다 같이 트리를 장식해요!”
사람들은 고개를 꺾어 트리를 올려다봤다.
정말이지 엄청난 크기의 트리였다. 장식하는 데 오래 걸리겠지만 그만큼 멋질 것 같았다.
빨리 시작하고 싶은 누군가가 설레는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할까요?”
“아침은 먹고 해야 하지 않겠어요? 장식하려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텐데, 전 아침을 안 먹고 움직이면 어지러워서 사다리에서 떨어질지도 몰라요.”
“그럼 제가 아래서 받아드릴게요.”
“됐어요. 그냥 아침 먹고 안 떨어질래요.”
누군가 의견을 정리했다.
“자자, 그럼 우선 아침부터 먹고 옵시다. 먹고 와서 해도 안 늦어요. 갑시다.”
사람들이 빨개진 코끝을 비비며 건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