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
나는 탐탁지 않게 시스템 창을 노려보고 있었다. 수치가 크게 변화했지만 퀘스트가 완료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이 절망을 낮추고.
‘무엇이 이들을 희망차게 할까.’
[희망감: 59 / 절망감: 39]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절망감은 어쩐지 조금 더 감소했다.
하지만 희망 수치는 누가 고정해 놓은 것처럼 그대로였다.
빨리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여길 벗어나 자유롭게 낙원에 대한 정보를 캐고 다닐 텐데.
그 생각만 하면 조바심이 났다.
의식주, 문제없지. 그럼 뭘 채워야 하지?
한참을 고민했지만 아쉽게도 이거다 싶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자기연민 게이지’가 풀충전 상태일 때 물건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 집 안에 있는 물건들로 한정됩니다. 식량은 제외됩니다.]
소환할 수 있는 건 우리 집에 있는 물건들로 한정된다. 소환하고 나면 녹색 게이지가 찰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차는 거라, 녹색 게이지는 내버려 두면 금방 찼지만, 퀘스트를 빨리 클리어하고 싶다면 신중하게 결정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내가 처음으로 소환했던 것.
나는 손에 들린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결과적으로 폰은 실패했다.
핸드폰을 소환해 소설의 앞 내용이라도 읽어보려 했었는데.
‘구매만 해놓고 다운로드를 안 한 걸 기억 못 하다니!’
그랬던 것이다. 마나핵으로 폰을 충전할 순 있었지만 소설을 다운받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지금 폰으로 할 수 있는 건, 사진첩을 구경하는 일이나 기존에 저장되어 있던 자료들을 이용하는 일뿐이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더 남아 있긴 했다. 바로바로.
‘몰래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촬영하는 일.’
애런은 바닥에 엘피판을 쫙 깔아놓고 무엇을 들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엘피판의 앨범 재킷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턴테이블에 엘피를 돌렸을 때 무슨 음악이 나올지 들리나 보다.
‘그냥 직접 들어보면 될 텐데.’
지금 이곳은 우리가 이제까지 머물렀던 장소 중 가장 안전한 장소였으니까.
얼마든지 엘피를 들어보며 골라도 좋은데 굳이 저렇게 심각하게 고민 중인 것이다.
나는 침대에 잘 개어진 이불 위로 들키지 않게 천천히 폰을 들어 올렸다.
폰 카메라에 심각한 애런의 뒤통수가 잡혔다.
‘흐흐흐흐 귀여워…… 헉!’
몰래 동영상을 찍다가 피사체가 몰카범의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는 바람에 급히 이불 속으로 폰을 밀어 넣었다.
애런은 뭐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벨?”
“으, 응?”
“나 골랐어, 이거 틀어줘.”
다행히 애런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크크, 바보.
“애런 정말로 이거 들어보고 싶어?”
애런이 내민 엘피는 앨범 재킷에서부터 술 냄새를 풍겼는데, 앨범 재킷에 떡하니 짠 하고 부딪히는 생맥주 두 잔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가 엘피를 고른 기준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응, 정했어.”
엘피를 앨범에서 꺼내 턴테이블 위에 올렸다.
바늘을 엘피 위로 올리자, 곧 음악이 흘러나왔다. 꽤 익숙한 음악이었다.
하프와 파이프 소리, 그리고 이름 모를 타악기 소리가 주된 구성이었는데, 중세 판타지 배경 게임에서 술집에 들어가면 엘프랑 생맥주를 짠 하면서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음악이었다.
옆에서 술 취한 드워프 아저씨들이 막 팔짱 끼고 뱅뱅 돌 것 같은 흥겨움이 묻어나는 음악이랄까.
신난 건 애런도 마찬가지였다.
작게 발을 구르던 아이는 결국 흥에 못 이겨 몸을 일으켰다.
문제는 자기가 흥이 나면 나도 흥이 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잠깐만.”
아이가 등을 돌렸을 때, 이불 속에서 폰을 꺼내 몰래 촬영모드를 켰다.
“빨리빨리, 히히.”
결국 나는 웃으며 내 손을 잡아끄는 애런의 손을 잡고 객실에서 뛰었다. 아래층이 빈방이라 다행이었다.
“애런, 신나?”
“응, 신나!”
“난 안 신나.”
“그럴 리가 없는데.”
중간에 그만 추려는 시도를 해봤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그러자 사람 없는 아래층 대신 옆방에서 항의가 들어왔다.
-똑똑.
“벨?”
레이스가 방문을 두드렸는데 애런에게 기가 빨리는 중이라 못 들었다.
그리고 그 뒤로 막 별관 3층에 도착한 데일과 에즈라가 방문 앞에 서 있던 레이스를 발견했다.
데일은 방 너머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쿵쿵 뛰는 소리에 대뜸 방문을 열어젖혔다.
“어, 왔어요?”
“……핼쑥해 보여서 좀 더 쉬라고 방에 두고 다녀왔더니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에즈라.”
데일은 차가워진 얼굴빛으로 에즈라에게 물었지만, 에즈라는 원하는 무언가가 있을 때가 아니면 무조건 동의해 주지 않았다.
“왜요? 누워만 있어도 좋은 게 아닌데.”
“…….”
에즈라는 어깨를 조금씩 들썩이며 방문을 넘어오더니 비어 있던 애런의 한쪽 손을 잡고 돌았다.
“여기 남자들은 몸이 뻣뻣하네. 그치, 애런.”
“응?”
애런은 양쪽에서 잡고 돌자 신이 났는지 잘 듣질 못했다.
“형아들이 재미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어? 어어~”
애런은 대충 흘려 대답하며 깡충깡충 뛰었다.
나는 뛰다가 숨이 차 에즈라에게 애런을 넘기고 자연스럽게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앉아서 흥이 나는 음악 소리에도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는 두 남자를 노려봤다.
“레이스, 뭐 해요. 춰요. 그쪽 원하는 게 있잖아요?”
레이스는 방 분위기를 쓱 훑어보더니 잠시 고개를 떨궜다.
“벨, 이렇게까지 해야 이뤄주는 건가요?”
“예, 이 정도는 해야 이뤄줍니다.”
그러자 레이스는 다시 고개를 떨구고 ‘그냥 가지 말까.’ 작게 읊조리더니 이내 정돈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몸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동영상 웃긴 거 하나 건질 수 있겠는데.’
나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혼자 나무처럼 서 있는 데일을 쳐다봤다.
“…….”
“통조림의 소원이에요.”
“하 씨.”
뻣뻣하게 버티던 마지막 인간이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찍히고 있을 영상을 생각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다 소환해야 할 물건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더 웃고 떠들 일이 생겼으면 좋겠어.’
❅
다음 날 아침, 타운하우스의 본관 3층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막대한 식량에 이은 두 번째 신의 은총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첫 번째 은총 때와는 사뭇 달랐는데, 바로 식량인지 알아챌 수 있었던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무슨 물건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누구 이 물건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론이 쌓여 있는 까만 물체를 보며 외쳤다.
“처음 보는 물건인데요.”
“저도요.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에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웅성대는 사람들 속에서 중년 남성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이 시커먼 물건은 도대체…….”
“아니, 함부로 만지지 말아요. 부정 타요!”
“보기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그, 그렇지만…….”
사람들의 우려와 염려 속에서 중년 남자가 물건을 집어 들었다.
남자는 손에 잡힌 까만 파우치를 눌러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에 딱딱한 뭔가가 있어요.”
“위험한 물건으로 느껴지진 않습니까?”
아론의 물음에 남자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져보는 것만으론 모르겠는데요. 배를 갈라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신이 내린 물건에 배를 가른단 소리를……!”
“…….”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자, 뻘쭘해진 중년 남성은 조용히 물건을 제 위치에 내려놓고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물건을 집어 든 건 아론이었다.
아론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에 힘을 줘 물건을 눌러봤다.
‘겉에는 폭신한 질감, 그리고 안은 딱딱하다. 딱딱한데 어떤 부분은 둥그스름하고 또 어떤 부분은 둥근 손잡이처럼 길쭉하기도 해…… 이것은 무엇일까.’
겉만 보고 고심해 봤자 속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아론은 사람들 틈바구니 뒤로 멀찍이 앉아서 이곳을 보고 있는 데일을 쳐다봤다.
허락을 구하는 눈빛이었다.
데일이 그러라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서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신이 주신 물건의 용도를 알아내기 위함이니 너그러운 신께서 노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요. 열어봅시다!”
“아, 그래요. 뭔지 궁금해 죽겠네.”
단도를 꺼내 드는 아론을 보며 나는 티 나지 않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멀쩡한 파우치를 뭣 하러 찢어. 지퍼 안 보이나.’
나란히 앉아 구경하던 데일의 옆구리를 찔렀다.
“가서 저것 좀 열어줘요.”
“알아서 하겠지.”
“아, 가서 좀 해줘요!”
“귀찮네.”
데일은 구시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물건을 소환한 직후에, 내 일행들에겐 물건의 사용법을 알려줬다. 그러니 데일 역시 물건을 어떻게 켜는지 알고 있었다.
“줘.”
아론에게서 물건을 건네받은 데일은 망설임 없이 파우치 지퍼를 열었다.
거 좀, 몰라서 헤매는 연기 좀 해주지 저걸 바로 저렇게 열어버리네.
“열렸네, 배 가를 필요 없겠어.”
그리고 데일은 파우치에서 꺼낸 물건을 사람들 앞에 내보였다.
“뭘까, 이게.”
물건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라기엔 데일은 너무나 정직하게 마이크의 손잡이를 바로 잡고 있었다.
“무기? 무기라기엔 전혀 날카로운 부분이 없는데.”
“둔기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단단해 보이는데요.”
사람들은 물건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무기의 한 종류일 것이라 예상했다.
신이 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무찌르라는 용도로 무기를 주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곳의 마이크와는 겉모양이 달라서인지 바로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데일이 사람들에게 어서 물건의 사용법을 알려주길 기다리며 근질거리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에요. 저건 사람을 해하는 물건이 아니라 즐겁게 만드는 물건이라구요!’
그렇다. 내가 소환한 물건은 우리 엄마의 애용품, 노래방 마이크였다!